청년문제

[독자 리포트] 취준생, 취업보다 통장 개설이 더 어렵다?

Shawn Chase 2016. 10. 16. 13:34




입력 : 2016.10.13 03:00 | 수정 : 2016.10.13 07:40

[은행, 대포통장 막으려 문턱 높여… 직장 없으면 퇴짜]

- 서러운 '無職'… 통장考試 조어도
"계좌 어디에 쓰나" 일일이 확인
여행 자금용이라면 항공권 요구, 일용직에 "재직증명서 떼와라"
은행원들 대포통장 적발되면 인사 불이익 받을까 '몸조심'


이 기사는 지난 9월 30일 자 A33면 '지준구'씨의 독자 투고를 토대로 취재해 작성한 기사입니다. 조선일보는 앞으로 독자분들의 제보를 적극 기사화하겠습니다. 〈조선일보 독자서비스센터: 02-724-5555〉

경기 고양시에 사는 대학생 이모(여·25)씨는 지난 8월 해외여행 경비를 모을 계좌를 만들기 위해 은행 지점 3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처음 찾은 집 근처 은행에선 "왜 평소 거래도 없던 은행을 찾았느냐" "계좌는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씨가 '여행 자금을 모을 목적'이라고 답하자 은행 직원은 "여행을 간다는 걸 입증할 서류가 필요하다"며 "증빙 자료가 없다면 우리 지점에선 계좌 개설이 어렵다"고 했다.

두 번째 찾은 은행도 마찬가지였다. 창구 직원은 "통장 개설 목적을 입증하는 문서를 갖추라는 내부 지침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다못해 항공권 전자 티켓이라도 있어야 한다"며 "학생증과 은행 계좌가 연결돼 있다면 차라리 학교 근처 은행을 가보라"고 조언했다. 이씨는 결국 1시간 넘게 걸리는 대학교 근처 은행으로 가서 계좌를 만들 수 있었다. 이씨는 "그나마도 '국가근로장학생으로 뽑혔다'는 공지를 인쇄한 후 '아르바이트비 입금 목적'이라고 말해 계좌를 겨우 만들 수 있었다"라며 "일반 입출금 계좌 하나 만드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고 했다.

정부의 '대포통장 근절 대책'이 은행권에서 정착되면서 대학생이나 일정한 직장이 없는 일용직 근로자들이 "통장 개설이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2014년부터 계좌 개설 요건을 점차 강화해왔다. 그전에는 신분증과 도장만 가져가면 5분 만에 입출금 통장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통장 개설 목적을 밝히고 재직 증명서나 근로 계약서, 공과금 납부 실적처럼 이를 입증할 각종 '증빙서류'를 은행에 제출해야 한다. 한 일용직 근로자는 "일당을 송금받을 급여 통장을 만들려고 하니 재직 증명서를 내라고 했다"며 "일용직 근로자가 무슨 수로 재직 증명서를 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까다로운 신규 계좌 개설 조건 표


워낙 통장을 만드는 게 어렵다 보니 '통장 고시(考試·통장 만들기가 고시에 합격하기처럼 어렵다는 뜻)', '통장 난민(難民·통장 개설이 쉬운 은행 지점을 찾아다니는 사람)'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통장 개설 기준이 통일돼 있지 않다 보니 은행이나 담당 직원에 따라 요구하는 서류가 다른 것도 문제다. 어떤 직원은 명함만 내면 계좌를 만들어주지만, 까다로운 직원은 해당 사업장에 전화를 걸어 '정말 직원이 맞느냐'고 확인하는 식이다. 실제 온라인에는 '○○은행 △△지점이 잘 개설해준다'는 정보가 공유되기도 한다. 금감원 관계자는 "일선 은행에 '이런 서류를 받으라'는 지침을 내린 적은 없다"며 "계좌 개설은 은행 이익과 직결되는 부분이라, 이 부분에 대해 금융 당국이 지침을 내리는 건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금감원이 구체적인 지침을 내리지 않았는데 은행들이 알아서 규제를 강화한다는 얘기다.

은행 직원들은 "섣불리 통장을 개설해줬다가 대포 통장으로 사용되면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며 조심하는 분위기다. 은행 업계에서는 직원이 통장 발급을 꺼리는 현상을 '개설 방어'라는 은어(隱語)로 부르고 있다. 한 시중은행 창구 직원은 "만약 '대포'가 나오면 개인적으로 경위서를 쓰는 것은 물론 지점 전체적인 평가도 깎인다"며 "공무원들이 책임지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는 복지부동(伏地不動) 현상이 은행원들에게 전염된 것"이라고 말했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 2014년 하반기 5만3942건에 달하던 대포통장 발생 건수는 올해 상반 기 2만1555건까지 줄었다. 보이스피싱 피해 금액도 같은 기간 월평균 337억원에서 123억원까지 줄었다고 한다.

금감원 관계자는 "가시적인 성과도 있고, 국제적으로도 계좌 개설 요건이 강화되고 있는 추세"라며 "지난 3월부터 증빙 서류 없이도 하루 190만원까지 자유롭게 출금과 이체가 가능한 '소액 통장' 제도를 마련해 불편을 최소화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