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Why] "정보 캐려고 외국 어선 납치… 선원 1명 빼고 다 水葬, 몹쓸 짓 했죠"

Shawn Chase 2016. 3. 20. 01:27


입력 : 2016.03.19 03:00 | 수정 : 2016.03.19 10:07

北 '정찰국'서 20여 년간 대남공작 활동한 탈북자 인터뷰

출신 성분 좋아 뽑혀
아버지 한국전쟁서 전사… 기쁨조 뽑는 부서에서 선발

'지랄만 빼고 다 배워라'
정찰 소묘 위해 미술 교육… 日선박 만날까봐 일어 배워

신라면을 술안주로
조종사 수준 특별 배급… 남한 영화·뉴스 많이 봐

김일성 두 번 직접 만나
경어체 쓴다더니 계속 반말 "야, 어제 박정희가 죽었어"






지난 2일(현지 시각)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 정찰총국에 대한 금융제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기관이 북한 핵 미사일 개발과 자금 조달에 관련돼 있다고 본 것이다. 정찰총국은 주로 무장공비 남파, 요인 암살·납치, 군사시설 정찰을 맡고 있는 공작 부서다.

박선용(가명)씨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20여 년 동안 북한 조선인민군 정찰국에서 복무했다. 정찰국은 정찰총국의 전신으로, 1983년 버마 아웅산 암살폭파 사건과 1996년 강릉 침투 잠수함 사건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씨는 사병으로 입대해 좌급(佐級·국군의 영관급에 해당) 장교로 제대했다. 줄곧 정찰국 내 해상(海上) 침투 부서에서 근무했다. 몇 년 전 가족과 함께 탈북했으나 친척들이 아직 북쪽에 있다. 고집이 있고 필요한 말만 하는 뱃사람의 인상이었다.




'지랄(병)만 빼 놓고 다 배워라'

北 '정찰국'서 20여 년간 대남공작 활동한 탈북자 인터뷰
북한 정찰총국 출신인 박선용씨는 “전투원들은 적진 침투 시 임기응변으로 적국 주민들과 친해져야 한다”며 “상대가 노인이면 먼저 성과 본관을 파악한 후 같은 가문인 척하며 ‘안동 권씨 충렬공파 37대손입니다’ 식으로 말을 붙이라고 배웠다”고 말했다. / 박상훈 기자


―정찰국엔 원해서 들어간 겁니까.

"뽑혀서 들어간 거죠. 고등학교 졸업을 5개월 남겨두고 있었어요. 중앙당 간부들이 학교에 와 인물심사(면접)를 봤죠. 처음엔 왜 심사를 받는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땡하게(멍하게) 있지 말고 잘 답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어요. 신체검사가 다섯 번이나 거듭됐습니다. 신체검사 결과표를 슬쩍 보니 중앙당 간부5과(특수병이나 기쁨조 등을 선발하는 부서)의 직인이 찍혀 있더군요."


―무섭진 않았나요.

"왜 무서워요. 신났죠. 높은 데 올라갈 수 있다는 직감이 들었죠."

선발 후 3개월간 기초 군사 훈련을 받은 후 1년 남짓 정찰국 지휘부 직속 부대에서 군생활 하는 법을 배웠다. 농사도 짓고, 토끼도 길렀다. 철봉·수영·사격 등 체육뿐만 아니라 정찰지역을 그리기 위해 미술도 배웠다. 부대원 근무수칙 1호는 '지랄(병)만 빼 놓고 다 배워라'였다. 이후 한 항구도시에 배치돼 제대할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해상 침투 훈련은 어떻게 했나요.

"매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이론 훈련 기간이었습니다. 동해안에 배치된 남한 군사시설에 대해 세밀하게 배웠죠. 전파 탐지기나 해안초소의 위치, 쾌속정의 성능·재원 등을 외웠습니다. 5월부터 한 달 반은 '모내기 전투' 기간으로 농사일에 동원됐습니다. 그다음 10월까지가 야외 훈련 기간으로 실제 배를 몰았죠. 해안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모선(母船)을 정박하고 고무보트에 탄 뒤 노를 저어 상륙하는 훈련을 반복했습니다."

―실제 작전에 투입된 적도 있나요.



"두 번 있습니다. 한 번은 해상 납치 임무였고 한 번은 정찰 임무였죠. 납치는 외국 어선을 상대로 했습니다. 13명이 한 조가 돼 새벽 1시쯤 바다에 떠 있는 어선에 들이닥쳤어요. 선원 5명 중 비교적 젊어 보이는 남자 한 명을 우리 배에 태워왔죠. 평소 조업하며 봤을 군사 기지의 위치를 캐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머지 4명은 어선에 꽁꽁 묶은 채로 바다에 수장(水葬)시켰습니다. 초임 장교 시절이라 저는 지휘는 못하고 우리 고속정에서 고사총을 잡고 있었죠."

―죄책감이 없었나요.

"당시엔 오히려 자랑스러웠습니다."

―지금은요.

"인간으로서 못할 짓을 한 거죠. 면목 없는 일입니다."

―정찰 작전도 성공했나요.

"우리 부대가 직접 한 건 아니고 육상 부대의 상륙을 도와준 겁니다. 그들이 1주일간 체류하며 주로 군사시설을 사진으로 수백장 찍었죠. 밤에는 땅굴을 파고 자고 낮에는 숲 속으로 다녔습니다.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해상으로 복귀했습니다. 이걸로 우리 조 전원이 훈장을 받았습니다."

20여 년에 걸친 군 복무 기간에 이와 같은 정찰국 작전이 수백 회 이뤄졌다고 그는 주장했다. 어선으로 위장한 작전배를 타고 다니다 한국이나 외국 선박과 마주쳤을 때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눈가림용 외국어를 익히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일본어 교재 속 '조우했을 때'라는 단원 제목을 기억했다. 일본 선박 측에서 날씨를 물으면 "아메가후리소우데스(비가 올 것 같아요)" 등으로 자연스레 답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는 1980년대부터는 주로 교관으로 전투원을 교육했다고 한다.

北에서 신라면 즐겨 먹어

―정찰국에서 먹는 것과 입는 것은 어땠나요.


"다른 부대보다 훨씬 나았죠. 정예 대우를 받았으니까요. 하루에 1인당 백미 80g, 계란 3알, 버터, 돼지고기·물고기 반찬에다가 강계산(産) 포도주가 한 병 지급됐습니다. 비행기 조종사와 같은 수준의 배급이었습니다. 군복도 특별했죠. 일반 보병 군관들은 테토론(폴리에스테르의 일종) 재질의 풀색 군복을 입었는데, 우리는 그것보다 좀 더 누런 독일제 고급 군복을 입었습니다."

―다른 특권도 있었습니까.

"대남 공작 부서이다보니 남한 문화를 접할 수 있었죠. 상부에서 '기억은 하지 말라'며 남한 영화를 틀어주기도 했습니다. 최은희가 나오는 '저 눈밭에 사슴이(1969)', 신성일이 나오는 '이복 삼형제(1971)'가 기억납니다. 한국 뉴스는 국제 소식을 많이 들었습니다. 은행 계좌 어쩌고 하는 경제 뉴스는 들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더라고요. 한국 라면은 면발이 잘 불어나지 않아 술 안주로 즐겨 먹었습니다. 그때 먹던 신라면을 지금도 즐겨 먹죠."

―가족들이 군 부대에 면회 올 수 있었습니까.

"아내가 해산을 했다거나 부모상을 당했을 때 정도를 빼곤 면회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나마도 윗선에서 탐탁지 않아 했어요. 군 부대 위치가 기밀이고 정찰국 부지는 '완전닫긴구역(완전통제구역)'이었으니까요. 나는 군 생활 동안 편지만 했지 가족 면회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습니다."


"김일성만 두 번 봤습니다. 그중 두 번째가 1979년 평양에서 열린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사로청) 일꾼대회 때예요. '김일성 로작(勞作)' 등 책에서는 김일성이 경어체로 말하는데 실제로 주석단(檀)에서 말하는 걸 들으니 계속 반말이었습니다. '책은 다른 사람이 써 주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때 김일성이 "야, 어제 박정희가 죽었어"라고 한 게 아직도 기억에 납니다."

―1979년 10월 27일이었군요.

"28일이었어요. 제가 27일에 평양 이발소에서 머리를 다듬는데 간부 하나가 그 소식을 전하길래 반신반의했거든요. 그런데 그다음 날 김일성이 그러길래 '확실하구나' 했죠."

―탈북은 언제 결심하신 겁니까.

"제대하고 사업을 했습니다. 명색이 정찰국 출신 사업가 였지만 쉰 살 넘어서까지 한 번도 외국에 가보질 못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 사업 파트너를 찾기 위해 두만강을 몰래 건너 중국 연길에 간 게 처음입니다. 그때 한 달 체류했는데 머리가 순간 홱 돌더군요."

―머리가 홱 돌다니요.


"북한하고 삶의 질이 180도 달랐거든요. 수돗물, 전기가 풍부하고 TV 채널이 50개가 넘더라고요. 북한에는 TV채널이 평양에 2개, 지방엔 1개(조선중앙통신)입니다. 북한 사회가 정체돼 있다는 걸 머리론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직접 보니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맏이를 먼저 (남한으로) 보내고 그 후 나머지 가족과 함께 넘어왔습니다."

박씨는 하나원을 수료한 후 북한 주민들에게 북한 체제의 실상을 알리는 민간 대북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해 왔다. 재작년 1월에는 자유민주연구학회 주최 간담회에서 정찰총국의 공작 수법에 대해 증언해 '월간조선'이 그 내용을 싣기도 했다.

―북한이라면 지긋지긋하지 않나요. 왜 대북 방송을 합니까.

"제가 북에서 잘산 편입니다. 1990년대 '고 난의 행군'도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도 반평생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다고 생각하니 배신감이 북받쳐오는 겁니다. 나 같은 사람이 줄었으면 합니다."

인터뷰 도중 그의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그와 만나고 싶어 하거나 대북 방송 출연을 요청하는 전화였다. "자꾸 전화가 걸려와서…"라며 미안해하면서도 그는 다 받았다. 방향만 바꾼 공작활동이 한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