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케이그룹 투자전문 지주회사인 에스케이(주)가 이날 밝힌 인수 대상 기업은 예스파워테크닉스였다. 이 회사는 국내 유일의 실리콘카바이드(SiC) 전력 반도체 설계·제조사로 꼽힌다. 에스케이는 예스파워 경영권을 확보하는데 1200억원을 들였다. 확보 지분은 95.8%에 이른다. 에스케이는 앞서 지난해 1월 268억원을 투자해 2대 주주(33.6%) 자리를 차지한 터였다. 에스케이 관계자는 “국내에서 실리콘카바이드 전력 반도체 기술을 가진 기업 리스트를 추리면 7개 정도 나오는데 양산까지 할 수 있는 곳은 예스파워 뿐”이라고 전했다.
© 제공: 한겨레예스파워테크닉스의 포항 SiC 반도체 생산시설 내부 전경. SK 제공
에스케이(SK)그룹이 현대자동차그룹을 제치고 재계 서열 2위로 올라섰다는 공정위 발표가 나온 27일, 에스케이 쪽은 흥미로운 기업 인수 소식을 알렸다. 투자금융업계 일각에선 이를 두고 “에스케이가 지갑을 주웠다”는 평까지 나왔다. 반도체 핵심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싼값에 사들였다는 뜻이었다.
실리콘카바이드는 탄소와 규소를 고온에서 결합시킨 소재이며, 우리말로 탄화규소라 부른다. 일반 반도체에 사용되는 실리콘(규소) 소재에 견줘 높은 강도와 전압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실리콘카바이드 웨이퍼(반도체 회로기판)에 기반을 둔 전력 반도체는 기존 실리콘 반도체에 견줘 약 10배의 전압과 수백도의 고열을 견디는 동시에 두께는 10분의 1 수준이라는 장점을 띠고 있다고 에스케이 쪽은 설명한다. 자동차 산업의 대전환기에 대세를 이루고 있는 전기차의 주행 연장과 충전 시간 단축에 필수적인 요소다. 테슬라가 2018년 모델3에 실리콘카바이드 전력 반도체를 처음 도입한 뒤 현재 전체 전기차의 3분의 1가량이 이를 채택하고 있다고 한다. 전력 반도체는 전기차, 전자제품에서 전류 방향과 전력 변환을 제어하는 데 쓰인다.
정은식 예스파워테크닉스 부사장(공학박사)은 “실리콘카바이드는 높은 열과 전압을 견디는 장점을 띠고 있지만, 경도가 다이아몬드에 가까울 정도로 단단해 (이를 소재로 한 웨이퍼에) 식각이나 이온주입 같은 작업을 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일반 실리콘 소재인 경우에는 상온 수준인 25~28℃에서 이온주입 공정을 할 수 있는데 견줘 실리콘카바이드 소재에선 500~600℃의 고온에서 센 에너지를 투입시켜야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실리콘카바이드 전력 반도체 설계·제조 기술을 보유한 기업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독일 인피니언, 이탈리아·프랑스 합작사 에스티(ST)마이크로, 미국 크리, 일본 로옴 등 몇몇 소수 업체가 시장을 과점하고 있다.
에스케이에 넘어간 예스파워테크닉스는 옛 메이플세미컨덕터(주)에 뿌리를 두고 있다. 메이플세미컨덕터는 회사 설립 5년 만인 2013년 6월 한국전기연구원과 기술이전 협약을 맺어 실리콘카바이드 전력 반도체 사업에 나설 바탕을 마련했다. 전기연구원 전력 반도체 연구센터는 앞서 1999년부터 실리콘카바이드 반도체 개발을 시작해 국내외 특허를 다수 보유한 상태였다.
© 제공: 한겨레예스파워테크닉스 관계자가 칩 제조공정이 완료된 웨이퍼를 들어 보이고 있다. SK 제공
반도체 강소기업으로 명성을 떨치던 메이플세미컨덕터는 2017년 희대의 ‘수출 사기’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불량 웨이퍼를 비싼 값에 수출했다가 이를 되사는 수법으로 실적을 부풀렸고, 이와 얽힌 무역금융 범죄 규모가 무려 4천억원대에 이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당시 회사 대표를 비롯한 3명이 구속되고 회사는 결국 문을 닫게 된다.
수출 사기 사건 뒤 경영진이 떠난 상태에서 정은식 부사장을 중심으로 한 기술진은 반도체 기술을 살려가기로 뜻을 모으고, 그 해 11월 파워테크닉스라는 이름의 회사를 차렸다. 이듬해엔 장동복 예스티 대표로부터 투자를 끌어내고, 포항 공장에서 실리콘카바이드 전력 반도체 양산을 시작했다. 이후 회사 이름은 예스파워테크닉스로 바뀌었다. 장 대표는 당시 빌린 돈으로 이 회사의 자본금 17억원을 대고 추가 투자에도 나서게 된다. 예스티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업체에서 사용하는 온도 제어 및 검사 장비를 만드는 회사다. 지난해 말 기준 장 대표와 예스티의 예스파워테크닉스 지분율은 각각 22.5%, 24.2%였다.
임직원 65명을 두고 있는 예스파워테크닉스의 경영 실적은 아직 저조하며 적자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한 해 매출 15억4천만원에 83억5천만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전해(매출 7억5천만원, 영업손실 72억9천만원)보다 매출은 두 배가량으로 불었지만 적자 규모는 더 커졌다. 이런 상태임에도 에스케이 쪽에서 기업 가치를 높게 매긴 것은 기술력에 따른 잠재성 때문이었다.
기업구조조정 전문가인 박윤배 서울인베스트 대표는 “실리콘카바이드 전력반도체 설계·제조 기술은 확보하기 어려운 매우 독창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예스파워에는 앞으로 조 단위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 상황인데, 예스티로서는 그 자금을 감당할 수 없어 에스케이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그는 예스티의 2대 주주(6.11%)이며, 3년 전 예스파워테크닉스에 대한 투자에도 참여했다. 예스파워가 수출 사기에 얽혔던 회사였음에도 ’’기술력을 믿고 모험을 걸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전기차 시대에 최대 수혜주는 배터리일 것이고, 그다음이 실리콘카바이드 전력 반도체”라고 덧붙였다.
현재 실리콘카바이드 전력 반도체 시장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은 6인치 웨이퍼 기반 반도체이다. 예스파워는 이보다 떨어지는 4인치 웨이퍼 기반 제품을 주력으로 삼고 있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배경의 하나다.
박윤배 대표는 “장 대표나 예스티 모두 예스파워에 대한 투자로 상당한 이익을 거두긴 했어도 대규모 시설투자 자금을 감당할 수 없어 대기업에 넘긴 대목에선 아쉬움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출연연구기관에서 개발해 국가자산이나 마찬가지인 기술이 사기 사건에 휘말려 사장될 뻔했다. 그 상황에서 일개 중소기업(예스티)이 1백억원 이상을 투자해 수년에 걸쳐 악전고투하며 살려낸 일의 결말로는 좀 씁쓸한 구석이 없지 않다.” 박 대표는 “에스케이 쪽이 이런 사정을 고려해 중소기업과 상생한다는 메시지를 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에스케이는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개발(R&D) 투자를 통해 예스파워테크닉스의 기술 경쟁력을 높이고 글로벌 선도 기업으로 키워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룹 내 관련사들과 동반 상승(시너지)효과를 거둘 것이라는 강한 기대감도 드러내고 있다. 에스케이는 2020년 미국 듀폰의 실리콘카바이드 웨이퍼 사업을 인수해 현재 한국 기업 중 유일하게 실리콘카바이드 웨이퍼를 생산하고 있다. 에스케이실트론 미국 법인이 이를 맡고 있다. 실리콘카바이드 웨이퍼 생산 업체는 전 세계적으로 4곳뿐이라고 한다. 에스케이 쪽은 예스파워를 발굴해낸 배경으로 “듀폰의 사업을 인수해 업계 ‘이너 써클’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란 점을 들었다.
김영배 선임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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