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치

관료들의 저주?... 2012 일본 민주당 vs 2022 더불어민주당

Shawn Chase 2022. 3. 27. 12:33

[주간조선]

배용진 기자
입력 2022.03.27 05:40
2015년 3월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일본의 간 나오토 전 총리(왼쪽)를 만났다. 간 전 총리는 집권 당시 공식석상에서 관료들을 향해 ‘빠가(바보)’라고 발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photo 뉴시스

“정치인만으로는 세상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

2011년 9월 6일, 일본 민주당 소속 노다 요시히코 당시 총리가 사무차관회의를 사실상 부활시키면서 한 말이다. 이때는 2011년 3월 11일 일본을 강타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지 반 년 만이었다.

의원내각제인 일본에서 사무차관은 최고위 관료다. 우리의 5급 공채 시험에 해당하는 국가공무원 제1종시험을 통해 선발된 뒤 수십 년을 근무해야 오를 수 있는 자리다. ‘관료사회의 꽃’으로도 불린다. 이런 사무차관들이 모이는 사무차관회의는 그간의 국정 경험을 토대로 안건을 심의하고 검토하는 행정을 총괄하는 정책결정기구다. 그런데 오랜 자민당 독주를 깨고 민주당이 정권을 잡자마자 “관료를 개혁하겠다”며 이걸 없애버린 것이다. 당시 일본 민주당은 2009년 8월, 우리나라의 총선에 해당하는 중의원 선거를 통해 480석 중 308석을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고 정권을 잡은 상황이었다.

그러자 기세가 꺾인 관료들은 자연히 “우리는 분부하시는 대로 따라 하겠다”고 했고, 이후 실제로는 ‘아무것도 안 했다’. 쉽게 말해 복지부동(伏地不動·땅에 납작 엎드려 움직이지 않음)을 한 것이다.

이랬던 민주당 정권이 2년 만에 사무차관회의를 부활한 것은 일본이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등 대형 재난을 겪으면서다. 행정 경험이 없고 전문성이 부족한 정치인들이 관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 민주당 정권은 복지 혜택을 늘리면서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고, 결국 소비세를 인상하는 결정적 패착을 뒀다. 이후 2011년 참의원 선거와 같은해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연패했다. 결국 2012년에는 57석의 초라한 규모로 전락하면서 정권도 자민당에 다시 내줬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지 불과 39개월 만이었다. 지금 일본 민주당은 당명조차 남지 않았다. 반면 참패했던 자민당은 현재까지 장기집권 가도를 달리고 있다.

다시 관료에 손 내밀었지만…

왜 일본 민주당은 실패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일본 정치 전문가들은 핵심 원인 중 하나로 “민주당 정부가 전문, 기술관료들을 적폐의 대상으로 봤다는 점”을 꼽는다. 실제로 민주당 소속으로 2009년 처음 총리직을 맡은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집권을 앞두고 “관료사회를 대청소해 묵은 고름을 짜내겠다”고 말했다. 하토야마 총리 다음으로 총리를 맡은 간 나오토 총리는 관료조직을 ‘빠가(바보)’라고 공식석상에서 비난하기도 했다. 노골적으로 관료조직과 아예 척을 진 것이다.

일본 정치 전문가인 일본 중앙학원대학 이헌모 교수는 ‘도쿄 30년, 일본 정치를 꿰뚫다’라는 저서를 통해 “이 같은 총리의 태도가 2011년 3월 11일 대지진과 같은 국가 재난 상황에 직면하자 관료조직의 협조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었다”고 분석했다. 당시 관료들을 향한 다소 거친 발언을 관료조직에 만연하던 기강 해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굳은 의지의 표출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를 실현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다. 특히 관료조직 전체를 두고 행정부의 수장이 직접 ‘빠가 집단’이라고 칭하며 적개심을 드러내면서 관료들의 조직적인 저항에 부딪혔다. 그리고 이는 3·11 대지진 수습에 큰 차질을 초래했다.

다음으로 총리가 된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반대로 관료조직을 포용하려는 태도를 취하는데, 이번에는 역으로 관료의 논리에 휘둘려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연출했다는 것이 이 교수의 분석이다. 집권정당의 경험이 전무한 채로 정권을 잡은 민주당이 견고한 관료조직과의 관계 설정과 운용에 있어 실패를 거듭한 것이다. 압도적 지지로 첫 정권교체를 이룬 민주당 정권이 집권당으로서 제대로 된 국정 운영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단명 정권으로 막을 내린 데는 이 같은 요인이 도사리고 있었다.

 

“선출 권력이 임명보다 우위에 있다”는 착각

이런 일본 민주당의 몰락을 두고 최근 대선에서 패배한 한국 더불어민주당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흔히 말하는 “선출된 권력이 임명된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 “정치인이 우위”라는 것이 민주당 주류 세력이 내비쳐온 고정관념이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관료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최근 경기지사 선거를 앞두고 경쟁자로 꼽히는 김동연 새로운물결 대표를 견제한 민주당 안민석 의원의 발언에서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안 의원은 지난 3월 23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김 대표를 향해 “관료 출신이지 않나. 평생을 관료 생활을 하신 분들은 그냥 규정에 의하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해오는 게 몸에 붙은 분이시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 대표는 문재인 정부 초대 경제부총리를 지냈다. 반면 안 의원은 경기도 오산에서 5선을 한 중진 의원이다.

 

김 대표는 경제부총리를 지내던 당시 청와대 장하성 정책실장과 ‘소득주도성장’ 등을 두고 여러 번 부딪치면서 ‘김&장 갈등’이라는 조어가 세간에 나돌기도 했다. 국가 주요 경제정책의 입안과 집행 방향을 두고 끊임없이 부딪치던 김 대표와 장 실장은 결국 두 명이 동시에 교체되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경제부총리(기획재정부 장관)의 수난은 김 대표에게서 그치지 않았다. 뒤이어 취임한 홍남기 경제부총리 역시 민주당 주류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압박을 받았다. 이재명 전 민주당 대선후보는 경선 주자였던 지난해 9월, 선거를 앞두고 홍 부총리를 향해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라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이 전 후보는 당시 자신의 핵심 공약 중 하나였던 지역화폐 발행규모 확대 공약을 꺼내들었는데, 기재부가 당시 지역화폐 지원 예산을 대폭 삭감하자 거친 공격을 가한 것이다. 비슷한 발언은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입에서도 나온 바 있다. 총리 재임 중이던 지난해 1월, 김용범 당시 기재부 1차관을 향해 비슷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다.

 

관료 무시하고 세금 올린 대가는

이상돈 전 민생당 의원은 민주당의 이번 대선 패배 원인을 두고 “핵심은 축적된 경험을 갖고 있는 관료를 무시하고, 세금을 용감하게 올려버렸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선거를 앞두고 세금을 올리는 정당은 선거에 필패한다는 것이 정치권의 오랜 불문율인데, 집권 여당이 종합부동산세 등을 올려버리면서 이재명 후보의 패배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 전 의원은 당정 수뇌부가 이 같은 결정을 한 데에는 “행정부처의 축적된 경험을 무시해버렸다는 점이 컸다”고 분석했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패배한 주된 요인은 정권교체 여론이 첫 번째였다. 부동산, 탈원전 등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각종 정책을 이전으로 돌려놓으라는 국민 요구가 컸던 것이다. 고위공무원단으로 불리는 관료들은 정권교체 여론의 화살이 향하는 공적이었다. 고위공무원들은 이념과 정책을 현실에 접목시키는 이른바 ‘기술자’들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행정부와 입법부 등 모든 조직을 장악한 민주당 세력이 “선출된 권력이 우위에 있다”며 관료를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해버리면서 이들은 제 목소리를 낼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공적이 돼 버렸다.

실제로 의원입법으로 국무회의와 차관회의를 무시했다는 것도 한국 민주당이 일본 민주당과 비슷했던 점이다. 민주당은 2020년 총선에서 대승하자 의원입법으로 각종 정책들을 추진했다. 또 청와대로 권력이 쏠리는 현상이 역대 어느 정부보다 강해지면서 ‘수보회의’로 불리는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가 장관 등 국무위원들이 모이는 ‘국무회의’보다 더 주목받는 현상을 빚어내기도 했다. 최저임금 인상이나 근로시간 단축 등 핵심 정책들이 관료들의 손을 거치지 않고 청와대 인사들에 의해 발표되고 집행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결국 국정을 제대로 기획하고 운영하기 위한 핵심은 ‘돈’인데, 특히 이 중에서도 예산을 다루는 전문성이 중요하다는 설명이 나온다. 예산을 다루는 쪽이 특성상 국정 전반을 총괄하고 기획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기재부 예산실이 대표적이다.

사회는 복잡해지고 예산 규모가 거대해짐에 따라 갈수록 높은 전문성이 요구된다. 하지만 ‘예산 주무르기’가 우리 정치권의 고질병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입법부 인사들의 전문성은 오히려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는 평이다. 이상돈 전 의원은 “지금 국회의원이 많지만 예산 등 국정 운영을 위한 핵심적 경험을 해본 의원이 여야를 막론하고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20대 국회 때 새누리당 의원이었던 김광림 의원이 재정경제부(기재부 전신) 예산실을 거쳤고, 과거 국민의당 소속이었던 장병완 의원이 예산실장을 지낸 바 있다. 현역인 민주당 김진표 의원은 예산이 아닌 재경부 세제실장을 지냈고,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은 재경부 금융정책국 출신이다. 국민의힘 송언석, 류성걸 의원이 예산실장 출신이다. 이상돈 전 의원은 “미국 경제 부흥기였던 닉슨과 레이건 행정부 시절 근무했던 조지 슐츠 등은 백악관 예산실장을 지냈다”며 “예산이 국정 전반을 들여다보는 축이기 때문에 예산을 관리해본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문재인 정부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료를 중용하는 분위기다. 특히 거시경제와 예산을 총괄하는 인수위 경제1분과에서 이 같은 경향이 두드러진다. 경제1분과 인수위 간사인 최상목 전 기재부 1차관을 비롯해 전문위원 10명 중 7명이 행시 출신이다. 김병환 기재부 경제정책국장(2급), 예산총괄과장을 지낸 김동일 현 기재부 대변인(2급), 조규홍 전 기재부 재정관리관(1급) 등 기재부 고위 관료 출신들이 합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