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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선 탈 뻔했지만 어머니 설득... 北엔 야구 없어 대한민국 선택”

Shawn Chase 2022. 2. 20. 14:01

[그때 그 사람] 野神 김성근 감독

장원재·장원재TV 대표

입력 2022.02.20 11:10

 

김성근의 출생지는 일본 교토시 우쿄구다. 다른 재일동포들처럼 집안이 가난했다. 도시락이라야 맨밥에 간장만 뿌린 것이 전부일 정도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구들 모두 일을 나가고 없었다. 간섭도 없었지만, 돌봄도 없었다.

스포츠는 김성근에게 힘든 일상을 극복하는 자아실현의 수단이었다. 역전(驛前) 마라톤, 수영, 축구, 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학교 대표로 뛰었다. 야구를 주 종목으로 삼은 것은 야구가 가장 인기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김성근 감독

50년대 일본 TV가 단골로 중계한 스포츠는 야구와 스모였다. 스모는 체형 상 어려울 것 같아 대나무를 깎아 배트를 만들고 테니스공을 구해 동네 공터에서 경기를 했다. 재능은 없었다. 포지션은 우익수. 자리가 남으면 끼워주던, 당시 기준으로는 있으나 마나 한, 공이 거의 가지 않아 없어도 상관없는 자리가 우익수였기 때문이다. 발도 느렸다. 고2 때 정식 경기에서 센터 앞 안타를 치고 1루에서 죽은 일도 있다. 공식 기록은 ‘중견수 땅볼’이다. 그 경기에서 두 번 삼진을 당하고, 마지막 타석에서 사구를 얻은 뒤 교체되었던 일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실망하지는 않았다. 고심하기보다는 해결책을 찾는 것이 체질에 맞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빨라질 수 있는가?’를 연구했다. 육상부원에게 물으니 ‘내리막길을 뛰어 보라’고 했다. 뛰다 보니 개선점이 보였다. 보폭을 줄이고 늘려가며 실험한 끝에 찾아낸 방법이다. 그렇다. 중학교 시절부터 김성근은 삶의 모든 시간을 야구와 연결한, ‘야구에 미쳐 야구의 모든 것을 독학으로 연구하는 소년’이었다. 집 앞 강에 나가 잡지에 나온 프로선수들의 연속 동작 사진을 흉내 내며 돌멩이를 던지고, 집에서 학교까지 매일 6km를 뒤꿈치를 바닥에 붙이지 않고 걸었다. ‘중심 잡기’ 훈련이었다. 어쩌다 버스를 타면 자리가 나도 앉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지 않고 흔들리는 와중에 균형을 유지하는 연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로 ‘노가다’를 할 때는 지붕으로 흙을 던지며 팔의 각도를 연구했다. 김성근이 기억하는 최고의 아르바이트는 우유배달이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동네를 돌았죠. 학비를 벌어야 했으니까 고생이라면 고생인데, 이렇게 버텨서 나중에 꼭 성공해야지, 하는 욕망이 꿈틀거리던 시절이었어요. 배달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시간을 쟤고 방법을 찾아 기록을 단축하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

하루에 우유 8~9병을 마셨다. 밥도 국 대신 우유에 말아서 먹었더니 1년 사이에 갑자기 키가 자랐다. 야구를 하기에 적합한 몸이 만들어진 것이다.

북송선 탈 뻔

인생의 전기(轉機)는 우연히 찾아왔다. 1959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 선발된 것이다. 한국일보 장기영(張基榮: 1916~1977) 회장의 아이디어로 1956년부터 시작한 ‘재일(在日) 학생야구단 고국방문행사’는 국내외에서 여러모로 화제를 모았던 이벤트였다.

“59년엔 제가 고3이었는데, 투수들이 다 졸업을 하니까 58년 가을부터 학교에서 투수를 시켰어요. 재일동포팀에 투수가 부족하니까, 인원수 맞추려고 절 뽑은 거죠. 아마 이때 뽑히지 않았다면, 야구 선수로서는 바로 가라앉았겠다 싶어요.”

김포에 내리니 민둥산의 붉은 흙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 어디에도 먼지가 많았다. 버스를 타고 영등포구청 근처를 지나는데 길가에 쓰러진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행인(行人)들이 걱정하는 기색도 없이 그냥 지나치는 것이 충격이었다. 경기는 재미있었다. 만원 관중이 뿜어내는 열기도 신세계였다. 멋진 플레이를 하면 박수가 쏟아졌다. ‘고국(故國)의 편안함’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제가 통했을 정도니까, 한국 야구 수준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죠. 좋은 선수는 많았지만 개발이 덜 된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그래도 경동고 2학년이던 백인천(白仁天)은 발군(拔群)이었습니다. 경남고 박영길(朴永吉)도 기억에 남습니다.”

경남고와의 경기를 구덕야구장에서 직관한 동아대 관계자가 6명의 재일동포 선수에게 입학을 제의했다. 1960년 부산행(釜山行)은 김성근 인생의 분기점(分岐點)이다. 김성근의 홀어머니는 1959년부터 시작한 이른바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지원했다. 모든 서류절차를 마쳤고 만경봉호를 탈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도 김성근도 가족들 모두가 북송선에 오를 예정이었다.

“일본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이 어머니를 설득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서 보니 여기서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더라, 한국이 살만한 곳이더라’고 했죠. 북한에는 야구가 없어서 대한민국을 택한 겁니다.”

북송 교포들의 비극적 삶을 생각한다면, 야구와 김성근이 그의 가족을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국가대표 시절의 김성근 (뒷줄 왼쪽)

26살에 선수 생활 접어

동아대는 1960년 학번으로 입학, 가을까지 다녔다. 재일동포 6명이 한 방에 기거했고, 교수 얼굴을 딱 한 번만 봤다. 야구선수는 야구만 하는 것이 상식이던 시절이다. 우리말도 서툴렀고, 일본에서 배운 북한 노래를 불렀다가 오해를 산 일도 있었다. 그해 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배경이다.

도일(渡日) 후 재일 대한야구협회 최태환의 도움으로 프로야구 난카이(南海) 호크스 2군 입단 테스트를 봤지만 결과는 낙방. 프로선수들과의 수준차를 절감했다. 훈련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를 했다고 느낄 정도였다. 같은 재일동포인 1군의 사이드암 투수 김영덕(金永德)이 많은 도움을 줬다.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 삼성, 삼미 등에서 제안이 있었지만 김영덕 감독의 OB를 선택한 배경이기도 하다. 은혜를 갚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향인 교토의 상호차량(相互車輛)에 취업했습니다. 석 달 정도 직장 생활을 하며 야구를 했는데, 선수 출신은 저 빼고 둘, 전용 연습장이 없어서 근무 끝나고 차고에서 운동하던 팀이었죠.”

일본 사회인야구 2부리그 격인 클럽팀이었지만, 수준은 한국 실업 야구보다 높았다. 재일동포 선배 배수찬의 권유로 김성근은 다시 한국행을 결심한다. 1961년 교통부 야구단 입단이다. 1961년이라면 김성근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더 있다. 국가대표 투수로 뽑힌 것이다.

“10월에 일본 사회인야구 우승팀인 미쓰비시 중공업 야구팀이 방한했어요. 그 팀을 상대로 잘 던져서 대표팀에 선발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대표팀은 1962년 1월 1일부터 9일까지 타이완에서 열리는 제4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한국, 일본, 자유중국, 필리핀 등 4개국이 더블리그로 격돌하는 대회였다. 에이스는 ‘태양을 던지는 남자’ 김양중(金洋中), 좌완(左腕) 김성근의 역할은 제2선발이었다.

 

“12월에 서울운동장에 모여 연습을 했는데, 영하 13도니까 모닥불에 공을 달궈서 썼죠. 야구공이 골프공처럼 탁탁 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한국대표팀의 성적은 3승 3패로 자유중국과 공동 우승. 우승은 5승 1무의 일본이 차지했다. 김성근은 0-2로 패한 일본 전 1차전 선발투수, 1-2로 패한 2차전에는 김양중을 구원해 5회부터 마운드에 올랐다. 2차전 한국팀의 득점은 8회초 2사후 김성근의 단타에 이은 백인천의 3루타가 터진 결과다. 총 12경기에서 터진 홈런은 딱 한 개. 주인공은 대회 마지막 날 한국과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4회 투런 홈런을 날린 백인천이다.

“백인천 선수는 재능도 뛰어났지만,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하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일본한테 3루타 치고, 필리핀한테 홈런을 치니까 스카우터들이 주목을 했지요.”

기억나는 또 다른 대표팀 동료는 일루수 김응용이다. 최고의 타자였고, 연습량이 어마어마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62년은 배수찬과 함께 팀을 옮겼다. 기업은행 창단멤버로 가서 68년까지 활약했다. 63년에는 인천시청을 상대로 볼넷 하나만 내준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실업야구가 기록을 시작한 64년 성적은 20승 5패. 선수로서 최고의 한 해를 보냈지만 9경기 완투 등, 관리를 받지 못해 투수 생명이 끝났다. 던지라면 던지고, 팔꿈치와 어깨 통증을 우수 선수의 훈장처럼 여기던 시절이다. 65년부터 타자로 전향한 까닭이다. 1루에서 포수까지도 공을 던질 수 없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만 스물여섯에 선수 생활을 접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에요. 선수 생활을 오래 했으면 지도자 생활이 단명으로 끝났을 겁니다.”

영원한 라이벌 김응용

64년 말 영구귀국을 결심했다. 국교 수립 전이라, 가족과 영영 이별할 수도 있다는 각오로 던진 인생의 승부수다. 은퇴 후에는 행원으로 근무했다. 한국어가 서툴러 일이 힘들었다. 서류를 잘못 읽고, 도장만 찍는 일상이 이어졌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마산 출신 이창현 기업은행 감사가 길을 터줬다. 김성근을 마산지점으로 발령했다. 자신의 모교였던 마산상고 야구부 감독으로 일하도록 편의를 봐준 것이다. 1969년의 일이다. 갈현동 신혼집을 팔고 마산으로 내려갔다. 훈련의 강도는 높았다. 선수들이 쓰러지면 양동이의 물을 부어 일으켜 세웠다. 의욕은 높았지만, 지도 방법을 몰랐던 초보 감독의 실수담이다. 그래도 선수들은 반발하지 않았다. 야구부 예산이 부족해 사비(私費)를 털어 식비, 목욕비를 대는 젊은 감독의 열정(熱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성적은 별무(別無)에 집 판 돈이 없어졌다. 이듬해, 다시 서울로 와 기업은행 투수 코치(1970~1971)를 거쳐 감독(1972~1975)에 올랐다. 당시 한일은행 감독이 김성근의 영원한 라이벌 김응용이다.

一球二無

김성근의 현 직책은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고문이다. 63년 전 김성근이 2군 테스트를 봤던 바로 그 구단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한화 이글스 감독을 그만두고 야인(野人)으로 지낼 때 ‘야구에 대한 열정과 지혜를 빌리고 싶다’며 고마운 제안을 해줬다. 영어 명칭은 Coach Advisor, 감독에게 조언을 건네는 자리다. 2018년부터 네 시즌 째 활동 중인데, 쿠도 키미야스(工藤公康) 감독이 “야구에 대해서 느낀 점을 언제든지 바로 얘기해 달라”고 청했다. 김성근의 조언을 경기 중에 바로 시행한 일도 여러 번이다. 2022년부터 팀 지휘를 맡은 신임 후지모토 히로시(藤本博史) 감독은 ‘봄 캠프 전에 팀에 꼭 합류해 달라’고 부탁했다. 팀의 전체적인 움직임, 분위기, 훈련 일정 등에 대해 종합적인 조언을 해달라는 뜻이다.

한화 시절 가깝게 지낸 전설적인 홈런왕 오 사다하루(王貞治) 소프트뱅크 회장과 거의 모든 홈 경기를 보며 그동안 몰랐던 많은 것을 배운다. 발렌타인도, 오 사다하루도 모두 야구계의 신화적 인물이지만, 아직도 자기들이 모르는 것을 흡수하려는 자세를 보인다. 모르면 사람들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손정의(孫正義) 구단주는 ‘무조건 강해지라’며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만난 적은 없지만, 어마어마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한다.

- 좋은 감독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사명감을 가지고 좋은 결과를 내고, 선수에게 대가를 돌려주는 감독입니다. 한계를 넘어서면 선수 자신이 그걸 가장 먼저 압니다. ‘나를 위해서 감독, 코치가 도와주시는구나’라는 느낌이 생기죠. 사명감이라는 건, 저하고 만났던 선수들이 20년 30년 후에 과거를 돌아봤을 때 ‘프로에서 성공하지 못했지만 얻어온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좋은 선수는 어떻게 만드나요?

“스스로 한계를 넘어가도록 도와줍니다. 한계를 못 넘으면 어느 시점에서 더 올라가지 못해요. 한계를 넘으면 그 프로세스가 자기 것이 됩니다. 어렵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앞길이 없는 거죠. ‘힘들다’는 건 아직 그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뜻이에요. 관리 속에 자율이 있고 자율 속에 관리가 있는데, 자율(自律)은 어느 정도 정상에 올라간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 평소에 즐겨 말씀하신다는 ‘일구이무(一球二無)’는 어떤 뜻입니까?

“야구도 인생도 3번 정도 찬스가 옵니다.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기회가 와도 온 걸 모르거나 기회를 못 잡아요. ‘지금 이 공을 놓치면 끝’입니다. 이 공을 놓치면 두 번째는 없어요.”

김성근의 별명은 ‘잠자리 눈깔’이다. ‘관중석에서도 투수들 그립이 보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노 감독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봐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생이나 야구나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 식으로 살지 말고, 왜 졌나, 왜 안 풀렸나를 연구하면 해결책이 보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단서들이 흘러가고, 관심이 있으면 답이 보이지 않나 싶어요. 갈림길에선 어려운 쪽을 택하세요. 그것이 투쟁이고 새로운 길을 만듭니다.”

아직도 야구장에 가면 가슴이 설렌다는 거장(巨匠)에게도 바꾸고 싶은 순간이 있을까?

“저는 구단과 많이 싸운 감독이죠. 제 청년 시절에는 야구선수를 ‘무식한 집단, 거친 사람들’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야구인도 전문인력이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했는데, 지금이라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 같습니다. 상대방에게도 길을 내주면서 일을 해야 했는데, 너무 내 길만 가려고 한 것은 아닌가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