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치
YS, 하룻밤에 별 50개 날리자 DJ “나도 쉽게 못할 일”
Shawn Chase
2015. 11. 25.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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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2015.11.24 01:28 수정 2015.11.24 02:00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독특한 정치인이었다. “머리는 빌리면 된다”는 느긋함,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민주화)은 온다”는 굴하지 않는 신념을 동시에 지닌 승부사였다. 빈소를 찾은 정치인들 사이에 ‘YS스타일’이 재조명되고 있다.
①DJ도 인정한 전격성=YS의 배짱과 실천력은 동교동계(김대중계)도 인정했다고 한다.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비서였던 새정치민주연합 설훈 의원은 “YS가 하나회 척결을 하는 걸 보더니 DJ도 ‘저건 나도 쉽게 못할 일’이라고 말한 게 기억난다”고 회고했다. YS는 1993년 2월 25일 취임한 뒤 11일 만에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에 나섰다. 그러고는 하룻밤에 별 50개를 날리는 방식으로 단기간에 승부를 내버렸다. 이걸 보고 당시 ‘적진(敵陣)’이었던 DJ와 동교동계가 모두 감탄했단 얘기다.
노무현 정부에서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문희상 의원의 평가도 비슷했다. 문 의원은 22일 “YS는 개혁을 (집권) 1년 안에 다 해치운 분”이라며 “이런 면에선 독보적”이라고 평가했다. 하나회 척결 외에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 ▶부패와의 전쟁이 모두 집권 1년차에 YS가 벌인 일이다. 당시 참모진의 속도조절론이 컸지만 YS는 멈추지 않았다.
②“가라! 뚫어라!” 단순함=YS는 정치적 목표가 정해지면 에둘러가는 법이 없었다. 늘 직진했다는 게 정치권의 공통된 증언이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3일이나 단식투쟁을 이어간 건 하나의 예일 뿐이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어려울 때 복잡한 생각을 단순하게 가질 수 있도록 해준 정치선배”라고 YS를 기억했다. 22일 빈소를 떠나며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은 “YS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싸워 민주주의를 쟁취했다”고 소개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이광재 전 강원지사는 YS와 관련된 기억을 전했다. 노무현 의원 보좌관 시절의 기억이다. 이 전 지사는 “YS는 선거 때면 당시 관행이었던 선거자금을 나눠주는 대신 새벽부터 자기 당 후보들한테 전화를 걸어 ‘빨리 일어나 뛰라’고 불호령을 내리곤 했다”며 “YS는 늘 가진 걸 다 걸고 풀베팅하는 지도자였다”고 했다.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과 열린우리당-민주당(새정치연합 전신)에서 YS 정치와 DJ 정치를 곁에서 지켜본 새정치연합 김부겸 전 의원은 빈소에서 “DJ가 치밀한 준비를 가르쳐줬다면 YS는 의제를 가르쳐줬다”면서 “YS의 의제는 ‘가라! 뚫어라! 그러면 된다!’는 것”이라고 했다.
③‘내편’으로 만드는 매력=YS 정치는 ‘도와주고 싶게 만드는’ 매력의 정치였다. 민정당에서 노태우계로 정치를 시작했지만 90년 3당 합당 이후 민자당 대변인으로 YS 총재를 보좌했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빈소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3당 합당 이후) 우리 (민자)당에 여러 계파가 있었는데 YS를 반대하던 사람도 YS가 직접 만나 손을 꼭 잡고 ‘한번 꼭 도와주십시오’ 하면 YS 사람이 되는 걸 여러 번 목격했다. 뜨거운 포용력이 YS의 장기(長技)였다.”
이광재 전 지사도 YS의 그런 면모를 직접 경험했다고 한다. 89년 당시 노무현 의원이 진보운동을 하겠다며 의원직을 사퇴하고 갑자기 잠적한 적이 있다. YS가 그의 보좌관이었던 자신을 따로 불렀다고 한다. 이 전 지사는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던 나를 YS가 상도동 자택 2층 방으로 불러 직접 차를 만들어 따라주며 30분간 간곡하게 ‘노무현 의원을 좀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더라. YS는 그런 인간적인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조문객들은 권력의지는 불굴에 가깝고, 실천할 때는 전격적이고 신속하게 밀어붙이며, 필요한 인재를 향해선 포용력과 친화력을 보이는 걸 YS 정치의 특징으로 꼽았다. 하지만 드러난 스타일의 이면에 있는 능력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서울대 강원택(정치외교학부) 교수는 “YS의 용기와 결단 이면에는 시대의 변화를 보는 눈이 있었다”며 “민주화가 올 것이라는 판단과 그 판단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실천하며 주변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남궁욱·강태화 기자 periodista@joongang.co.kr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독특한 정치인이었다. “머리는 빌리면 된다”는 느긋함,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민주화)은 온다”는 굴하지 않는 신념을 동시에 지닌 승부사였다. 빈소를 찾은 정치인들 사이에 ‘YS스타일’이 재조명되고 있다.
빈소에서 회자된 정치스타일
직선의 정치 … 에둘러 가지 않았다
문희상 “개혁 1년 안에 해치워”
김문수 “복잡한 걸 단순하게 정리”
이재오 “말 아닌 몸으로 민주 쟁취”
①DJ도 인정한 전격성=YS의 배짱과 실천력은 동교동계(김대중계)도 인정했다고 한다.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비서였던 새정치민주연합 설훈 의원은 “YS가 하나회 척결을 하는 걸 보더니 DJ도 ‘저건 나도 쉽게 못할 일’이라고 말한 게 기억난다”고 회고했다. YS는 1993년 2월 25일 취임한 뒤 11일 만에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에 나섰다. 그러고는 하룻밤에 별 50개를 날리는 방식으로 단기간에 승부를 내버렸다. 이걸 보고 당시 ‘적진(敵陣)’이었던 DJ와 동교동계가 모두 감탄했단 얘기다.
노무현 정부에서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문희상 의원의 평가도 비슷했다. 문 의원은 22일 “YS는 개혁을 (집권) 1년 안에 다 해치운 분”이라며 “이런 면에선 독보적”이라고 평가했다. 하나회 척결 외에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 ▶부패와의 전쟁이 모두 집권 1년차에 YS가 벌인 일이다. 당시 참모진의 속도조절론이 컸지만 YS는 멈추지 않았다.
②“가라! 뚫어라!” 단순함=YS는 정치적 목표가 정해지면 에둘러가는 법이 없었다. 늘 직진했다는 게 정치권의 공통된 증언이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3일이나 단식투쟁을 이어간 건 하나의 예일 뿐이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어려울 때 복잡한 생각을 단순하게 가질 수 있도록 해준 정치선배”라고 YS를 기억했다. 22일 빈소를 떠나며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은 “YS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싸워 민주주의를 쟁취했다”고 소개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이광재 전 강원지사는 YS와 관련된 기억을 전했다. 노무현 의원 보좌관 시절의 기억이다. 이 전 지사는 “YS는 선거 때면 당시 관행이었던 선거자금을 나눠주는 대신 새벽부터 자기 당 후보들한테 전화를 걸어 ‘빨리 일어나 뛰라’고 불호령을 내리곤 했다”며 “YS는 늘 가진 걸 다 걸고 풀베팅하는 지도자였다”고 했다.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과 열린우리당-민주당(새정치연합 전신)에서 YS 정치와 DJ 정치를 곁에서 지켜본 새정치연합 김부겸 전 의원은 빈소에서 “DJ가 치밀한 준비를 가르쳐줬다면 YS는 의제를 가르쳐줬다”면서 “YS의 의제는 ‘가라! 뚫어라! 그러면 된다!’는 것”이라고 했다.
③‘내편’으로 만드는 매력=YS 정치는 ‘도와주고 싶게 만드는’ 매력의 정치였다. 민정당에서 노태우계로 정치를 시작했지만 90년 3당 합당 이후 민자당 대변인으로 YS 총재를 보좌했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빈소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3당 합당 이후) 우리 (민자)당에 여러 계파가 있었는데 YS를 반대하던 사람도 YS가 직접 만나 손을 꼭 잡고 ‘한번 꼭 도와주십시오’ 하면 YS 사람이 되는 걸 여러 번 목격했다. 뜨거운 포용력이 YS의 장기(長技)였다.”
이광재 전 지사도 YS의 그런 면모를 직접 경험했다고 한다. 89년 당시 노무현 의원이 진보운동을 하겠다며 의원직을 사퇴하고 갑자기 잠적한 적이 있다. YS가 그의 보좌관이었던 자신을 따로 불렀다고 한다. 이 전 지사는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던 나를 YS가 상도동 자택 2층 방으로 불러 직접 차를 만들어 따라주며 30분간 간곡하게 ‘노무현 의원을 좀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더라. YS는 그런 인간적인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조문객들은 권력의지는 불굴에 가깝고, 실천할 때는 전격적이고 신속하게 밀어붙이며, 필요한 인재를 향해선 포용력과 친화력을 보이는 걸 YS 정치의 특징으로 꼽았다. 하지만 드러난 스타일의 이면에 있는 능력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서울대 강원택(정치외교학부) 교수는 “YS의 용기와 결단 이면에는 시대의 변화를 보는 눈이 있었다”며 “민주화가 올 것이라는 판단과 그 판단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실천하며 주변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남궁욱·강태화 기자 periodista@joongang.co.kr
[직격인터뷰 27회] 생방송 담화 준비하는 YS에 "읽다 울음 나오면 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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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2015.11.24 21:32 수정 2015.11.25 00:01
2015년 11월 22일 00시 22분. 제 14대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서거했다. 24일 오전 10시에 생방송된 중앙일보 인터넷 방송 ‘직격인터뷰’ 27회에서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출연했다. 윤 전 장관은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중후반기까지 2년 넘게 청와대에서 청와대 공보수석과 대변인 역할을 맡았다. 윤 전 장관은 이날 방송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다양한 일화를 풀어냈다. 또한 중앙일보 강찬호 논설위원과 함께 김 전 대통령에 대해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중앙일보 강찬호 논설위원과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일문일답 전문.
-빈소에 계속 계셨나.
"계속 못 있었다. 빈소가 준비되기 전에 일찍 가긴 했다. 여러 방송에서 출연해서 김영삼 전 대통령 추모 이야기를 나누자고 해서 방송 순회하느라 빈소를 지키지 못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전국적으로 추모 열기가 조용한 듯 확산하고 있다. 국민 마음에 김영삼 전 대통령 떠나보내기가 서운한가 보다. 어떻게 보나.
"그럴 것이다. 그는 일생을 통한 민주화 운동을 했다. 그 과정에서 동지적 인연을 맺은 사람이 전국에 많다. 또한, 그렇지 않더라도 팬이나 호감을 가진 사람이 많다. 근래에는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분위기가 많다. 그러다 보니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아지고 추모의 열기가 확산하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김 전 대통령은 야권의 지도자였지만, 3당 합당을 통해 현지 여권으로 이동한 사람이고, 지역주의를 바탕으로 정치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야권 지지자나 호남 사람 중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서운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분들도 하루 이틀 지나서는 추모에 동참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영호남의 감정적인 분열 때문에 그런 듯하다. 김 전 대통령도 영남분이다. 어떻게 보면 그와 함께 민주화 투쟁을 했고, 5.18 민주혁명을 격상시킨 대통령이지 않나."
-김 전 대통령은 5.18 3주년을 맞아서 서슬 퍼런 군사 정권에 아무도 대들지 못할 때 단식을 시작했고, 23일 동안 목숨을 건 투쟁을 했다. 단식을 하면서 김 전 대통령은 거대 정치인의 반열에 올랐다. 본인의 가치가 5.18 민주 회복이었는데 그것은 어떻게 보나.
"우리는 지금 5.18을 민주화의 기폭제로 본다. 김 전 대통령도 그러한 명분하에 단식을 했고, 대통령 취임 후 바로 5.18을 민주 혁명으로 승격했다."
-흔히 5.18이라고 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언급한다. 두 분을 비교하자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이 관심을 쏟았다는 게 여론의 관측이다. 사실은 김영삼 전 대통령도 5.18이나 광주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는 게 최근 부각되는 듯하다. 김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면서 그의 5.18이나 광주에 대한 관심을 느끼거나 체험한 적이 있나.
"직접 5.18이나 광주에 대한 말을 들을 기회는 없었다. 그동안의 행적으로 봐서는 광주나 5.18이 김대중 대통령과의 사적인 인연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의에 대해서 동감해 함께 투쟁한 것이니까, 그런 조치를 하고 평가하는 건 당연하다고 봤다."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그의 ‘통합 정신’을 계승하자는 추모 지면이 나온다. 어떻게 평가하나.
"지금 한국사회가 갈가리 분열이 돼 갈등 수습이 안 되고 있다. 이게 공동체 해체 현상이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그런 말이 나왔다고 본다.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 박근혜 후보는 국민 대통합을 내걸었고, 문재인 후보도 국민 통합을 내걸었다. 그러나 두 후보가 똑같이 통합을 얘기하면서도 통합의 개념을 설명한 일은 없다. 나는 당시 국민통합추진위원장을 맡아서 ‘국민통합 개념을 어떻게 설정해야하는가’하는 생각을 해보았는데, 이게 지도자 한 사람의 생각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고, 갈등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민주사회에는 갈등이 없을 수 없다. 통합은 다양한 갈등을 더 큰 가치로 묶어내는 것이라고 본다. 결국, 그 과정이 통합이다. 통합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다. 민주주의로의 과정. 따라서 의회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통합은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국회라는 게 정당들이 모여서 각각 다양한 지지 세력을 가진 정당들이 모여서 갈등을 하다가 대화와 타협으로, 또는 다수결의 원칙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국민의 일반의지 아닌가. 그게 통합이다. 국회가 통합 기능의 중심인데 입법부가 그 역할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가 갈등 수습이 안 된다. 따라서 통합이라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통합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통합이라고 할 때 김 전 대통령의 행적 혹은 발언에서 통합을 보여준 적절한 예는 무엇인가.
"특별히 다른 뜻이 있어서 통합을 언급한 것인지 헤아리기는 어렵다. 다만, 김 전 대통령이 야당에서 활동 할 때 끝없는 당권 경쟁을 하면서 대야 투쟁을 했다. 그 과정에서 당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분열이 계속 되었던 과정을 돌아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 오랜 내부투쟁과 대정부투쟁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늘 통합에 대한 절실함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위치는 독특했다. 항상 교량적, 중간적 역할을 했다. 야권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의회주의적이고 좀 더 중도적이었다.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좀 더 재야 쪽이고 투사적 이미지가 더 강한 쪽이다. 또한, 삼 당합당을 통해 민주화 투사이면서도 군정세력과 손을 잡아서 문민정부를 만들었다. 이후에 완전히 수평적 정권 교체가 되어서 야권으로 넘어갔는데, 그런 것들을 보면 모두 역사의 주요 결정점에서 교량 역할을 했다. 어떻게 보나.
"현실 정치인으로써는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명분도 좋지만, 현실은 늘 최선을 추구하더라도 최선을 택하긴 어렵다. 차선을 선택하고 최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것을 보면, 현실적으로는 그 당시에 군부세력하고 합당해서 빨리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게 시급하다는 판단을 하셨다고 본다."
-그게 논란이다. 그게 지금 와서는 역사의 순리 속에서 필요한 조치였다고 보지만, 사실 그때는 많은 사람이 변절한 것이 아닌가, 권력욕이 있었던 거 아닌가 말이 많다.
"정치지도자에게 권력욕에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권력욕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보면 군사 권위주의를 빨리 청산하고 문민정부를 세우는 게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핵심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대통령이 돼서 문민정부를 세워야겠다’고 한 것은 현실적인 판단이라고 본다. 그것에 대해 '투항이다', '변절이다', '한국 민주주의를 왜곡했다'는 비판도 일리는 있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김 전 대통령의 판단이 옳았다."
-민주주의의 양대 산맥이었던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이 5년 동안 나름대로 합세해서 대정부투쟁을 했고 '92년 대선에서 연합 단일화를 해서 진정한 민주정권을 이룰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하는 가설도 있었다. 가설은 어떻게 보나.
"가설로는 성립돼도 후보 단일화가 실제로는 안 됐다. 둘이 힘을 합쳐서 하나의 세력으로 정권 교체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봤던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무슨 생각이었다고 보나.
"확실히는 모른다. 어렴풋이 들은 말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태우 정부 시절, 현실을 타개하는 방안을 많이 고민했다고 들었다."
-역설적으로, 군정세력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연합하는 모델을 추측할 수는 없나.
"가능하다. 정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게 없다. 다만, DJ 같은 경우 합당의 성격이 가능했겠느냐는 의심이 든다. 연대까지는 가능해도 말이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분단 현실에서 안보를 생각하면서 경제발전도 하고 그러면서 민주화도 추진해야 하는 고난도의 방정식을 가진 나라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여권에서 야권으로 넘어간다기보다는 야권의 투사가 여권의 일정한 통합을 통해 중간적 형태의 민주화를 먼저 성취하고 이어서 야당으로 넘어간 것, 이것이 정치사적으로 보면 구도가 그럴 듯하다. 과연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런 구도를 그렸을까.
"그런 전체적 구도를 가졌는지 내가 알 길은 없다. 다만, 야당총재로 대투쟁을 할 때,그 당시 야당에는 세력이 여럿 있었다. 그 중에는 상당수가 박정희와의 투쟁을 주장하면서도, 늘 한편으론 '우리가 이래서 파국이 오는 경우엔 결국 북한 좋은 일이 아닌가'하는 걱정을 많이 했다. 항상 그 생각을 하니까 대 투쟁에 수위를 자꾸 조정하는 일이 생겼다. 이때는 야권도 북한을 많이 걱정했다. 당시 출입기자로 취재할 때였는데, 항상 그 사람들 머릿속에는 북한이란 존재가 있었다. 요즘하고는 남북한 관계가 다르다. 지금은 우리가 압도적으로 우월하지만 그땐 아니었다."
-여러 다른 정치적 상황 속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고난도의 의미 있는 정치를 했다는 것인가.
"그렇다. 권력욕을 가지고 3당 합당을 보는 사람도 있지만 꼭 그것만 가지고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 정치인으로는 필연적인 권력욕과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시대적 소명의식을 나누면 비율이 몇 대 몇으로 김 전 대통령의 머릿속에서 작동했을까.
"비율이 비슷했을 것이라 본다. 김 전 대통령의 권력욕도 남 못지않았다고 본다. 다만, 권력욕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권력욕을 성취하는 방식이 정당하냐가 문제다. 김 전 대통령은 권력욕과 민주화를 구현하는 의지가 결국 같은 것이었다."
-대통령이 되고 극과 극을 오갔다. 93년도에는 90%의 지지율, 97년 물러나기 직전엔 8%. 즉 극단을 오갔다. 이것도 김 전 대통령만의 특징인데, 이 극단성은 어떻게 보나.
"초기에 지지도가 높았던 것은 국민이 갈망했던 몇 가지 큰 조치를 했기 때문이다. 하나회라던가 금융실명제, 재산공개와 같은 것들이 국민이 보기엔 굉장히 과감하고 신속했다. 국민이 기대하기도 했지만 못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단호하게 실행해냈다. 그러다 보니 인기가 치솟았다. 그런데 항상 그렇게 국정을 운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정에 들어간 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고 모순이 생겼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전부 김영삼 대통령의 책임은 아니지만 IMF까지 오다 보니 정권 말기엔 한자릿수로 지지도가 내려갔다고 본다."
-합산하면 평균 40%는 나온다. 안타까운 점은, 보통 국민여론 조사를 하면 대게 1등이 박정희 전 대통령, 2등이 노무현 전 대통령 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최하위권이다.
"주로 IMF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 그게 워낙 국민에게 충격과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IMF에 가려진 성과들이 보이고 균형잡힌 평가가 이루어질 것이라 본다."
-이번 추모 열기 속에서도 그런 의견이 자주 보인다. ‘IMF에 가려 저서 그렇지 업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쓴 네티즌도 있다. 결국, 민심은 기억하는 것인 것 같다. 김 전 대통령 집권 중후반 기까지 2년 넘게 청와대에서 청와대 공보수석을 하고 대변인 역할도 하고 8개월 환경부 장관도 했다. 나의 인상에 남는 것 중 하나가 김영삼 대통령이 5년차 접어들어 아들 현철씨의 잘못을 사과하는 것인데, 어땠나.
"사과문은 내가 썼다. 사건이 터지고 작은아들 문제로 옮겨갈 때, 나는 이 문제는 그냥 못 넘어갈 것이라고 봤다. 당시 김광일 대표 실장에게 올라가서 ‘실장은 어떻게 판단했는지 몰라도, 내가 봤을 때 이 문제를 적당히 덮으려고 했을 땐 각하가 임기를 못 채울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 실장님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도 같은 생각인데, 내 걱정하지 말고 윤수석 똑바로 해라. 나는 말로 해야 하는 사람이지만, 당신은 글로 써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제 걱정하지 마세요’하고 나오는데, ‘윤수석’하고 불러세우고는 ‘우리 둘 다 각오를 합시다’라고 하더라. 옷 벗을 각오를 말하는 것이다.
당시 청와대 참모 중 수습 방안을 놓고 양론이 있었다. 정면으로 해결해야한다는 쪽과 잘못한 게 없으니 버텨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대통령도 판단을 쉽게 못했다. 김광일이나 윤여준·문정수·박세일 민정수석도 같은 생각이라서 이야기를 했지만, 대통령은 다른 의견도 듣고 가족도 있어 고민이 많았다. 나머지 분들은 현철씨가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여론에 휩싸여서 문책하는 건 아니라고 봤다.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쉽게 판단 못 하다가, 하루는 김광일 실장이 김수환 추기경이 전화를 해서 각하를 뵙자고 했다고 전했다. 그래서 대통령이 ‘그럼 내가 알다시피 복잡한 상태이니 며칠 후에 뵙자고 연락을 드려라’라고 했다. 그러고는 다시 실장에게 ‘추기경에게 연락을 드렸느냐’ 묻고 ‘뭐라고 하시더냐’ 물어보니 대답이, ‘알았다고는 하시는데 전화를 통해서도 조금 서운해 하시는 게 보였다’고 전했다. 그랬더니 대통령이 ‘그럼 안 된다. 빨리 모셔오라.’ 그래서 일정을 조정하고 대기실에 추기경님이 들어오셨다. 내가 ‘대통령의 심기를 살피지 말고 가감 없이 말해 달라’ 부탁했다. 추기경께서 ‘이 사람아, 내가 그러려고 왔지 왜 왔겠나’하셨다. 두 분이 두 시간 이야기를 나누더니, 추기경이 나오시는데 휘청거리셔, ‘조금 쉬었다 가시죠’ 하고 부축해 드렸다. 추기경께서 날 보고 ‘내가 할 일은 다 했어. 이제 당신들 일만 남았어’라고 했다. 대통령이 불러서 갔더니 ‘추기경 말을 들었으니까 이제 개신교 원로 목사 말을 들어야겠다. 한 분은 보수교단 원로이고 한 분은 진보교단의 원로를 모시니 연락처를 줄 테니 모시고 와라.’ 세분이 앉아서 한 시간 사십 분을 이야기했다. 나중에 대통령이 불러 갔더니 구두를 벗으면서 ‘어제 추기경 말씀이나 목사 말씀이나 내용이 똑같아’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담화를 준비하라고 해서 스님 말씀도 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소월추스님을 모셔왔고, 비슷한 시간 담화를 나누시고는 다 말씀이 비슷하다고 했다.
담화 준비를 하라고 해서 준비하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까 생각한 것보다 어려웠다. ‘담화로 민심을 좀 가라앉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국민이 대통령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분노가 누그러드나’생각을 하니 그렇게 쓰기 어려웠다. 어쨌거나 초안을 완성해서 드렸다, 그랬더니 매일 급한 업무를 처리하면 10시쯤 되는데, 나를 앉혀놓고 초안을 놓고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검토를 했다. 며칠 그렇게 하다가 날 보고 한 말이 ‘현철이 그런 일 없다. 내가 잘 안다’했다. 그래서 내가 ‘저도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다. 문제는 다수의 국민은 둘째 아드님이 모든 인사에 개입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이 믿고 있는 게 진실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해야한다. '국민이 몰라서 그렇지 현철이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하면 타는 불에 기름 붓는 격이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알겠다고 하고는 담화문을 읽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었다. ‘조사해봐서 책임질 일이 있으면 응분이 책임을 묻겠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이것을 읽고는 펜으로 ‘응분’을 지우고 ‘사법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하면 뜻이 달라진다고, '응분엔 사법적·정치적·도의적 모든 책임을 포괄적으로 담았기 때문에 이것이 낫다. 사법적으로 못박을 필요는 없다. 대통령 또한 아들이 사법적 책임이 있다고 보는 인상을 줄 필요가 없다.' 그러자 ‘그럼 대통령 아들은 잘못한 게 있어도 괜찮단 말이야? 책임을 안 물어? 그냥 둬’라고 했다. 아마 아들의 무고함을 확신했던 듯 하다. 경찰 조사를 받으면 무고할 것이고, 그렇다면 극적인 반전이 생겨 반전의 극대화가 나올 테고 그것을 생각해서 그렇게 강경하게 대응했다고 본다."
-응분을 사법으로 바꾸는 건 상당히 YS적이다.
"내 입장에선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조심스러워서 원본을 오래 가지고 있었다, 담화를 발표하는데 마지막까지도 섬세하게 검토했다. 내 생각엔 생방송으로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 수석 회의 때 그렇게 말했더니 각하가 '심경이 어지러운데 그럴 순 없다'고 모두 반대했다. 최소 15~20분 시차를 두어야 손질할 수 있다고 했다. 대통령에게 전달하자 ‘아니야, 윤수석 최초의 판단이 맞아. 생방송으로 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또 한 가지 허락을 받았다. 대통령이 있는 곳엔 늘 경호원이 있어야 하는데, 담화 발표 방에 경호원조차도 넣지 않겠다고 했다, 카메라맨 두 사람과 카메라 두 대만 가지고 혼자 고독하게 말씀하시라 전했다, ‘감정의 흐름에 맞기세요. 읽다 울음이 나오시면 우세요. 열 번 틀리게 읽으시면 열 번 고쳐 읽으세요, 구애받지마세요’ 하자 ‘알았어’ 하고 허락한 후 혼자 담화문을 읽었다. 옆방에서 모니터를 보며 어떻게 해야 국민을 달래나 만 생각했다. 근데 막상 대통령이 읽는 것을 보니 매우 처참했다. 현직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이런 처참한 사과를 하는 일이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 봤다. 보좌를 잘못해서 대통령이 재임중 이런 일을 하게 하였으니 책임을 져야 하고, 특히 나는 이것을 내 손으로 썼으니 사표를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표를 써서 실장에게 드렸더니, ‘누가 윤실장한테 사표 내라 했나요’ 하길래, ‘제가 그 처참한 각하 사과문을 제 손으로 썼습니다’고 했다. 그러자 ‘그럼 당신 혼자 양심적이고 남아있는 우리는 비양심적인가요’ 핀잔해서, ‘실장님이 옳다. 그러면 실장님 이하 전 수석이 그만둡시다’했다. 그래서 긴급 수석회의를 열었다. ‘윤수석이 다 그만두자고 그런다’ 말을 전하니까 아무도 말을 안했다. 그러다가 어느 수석이 ‘수석들이 다 그만두면 누가 국정을 보좌하느냐’라고 해서 내가 ‘그것도 옳다. 그럼 최소한 이 사태를 초래한 정무 수석·경제 수석·민정 수석·공보수석, 4석 그만 둡시다’고 말했다. 그래서 김 실장이 ‘그러면 내가 각하께 올라가서 전 수석이 퇴사를 한다고 전하겠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수석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 심기일전해서 열심히 해라‘ 말해서 일괄 사표는 없던 것이 되었다."
- 사과문 내용이 매우 직설적이었다. 특히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담화 발표 전 20분 전에 대통령이 전화를 했었다. ‘윤수석 다른 건 좋은데 그 표현은 좀 속된 표현이 아닌가’해서 ‘그렇지 않다. 조선조 때는 사대부집 안에서 관용구로 쓴 말인데, 근래엔 이 표현을 잘 안 써서 비속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원하시면 자식의 허물은 부모의 허물이라고 고칠 수는 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담화를 왜 발표하는가. 이 발표를 민심을 진정시켜야한다’고 하자 한참 생각하더니 ‘윤수석이 고집하면 할 수 없지’하고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참 죄송스러웠다. 나중에 담화 발표한 다음에 여러 보고가 올라오는데, 국민이 동정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민심이 가라앉을 것으로 보여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에 대통령은 상당히 처참했을 것이다. 때때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천장을 멍하게 쳐다봤다. 보고를 드리면 정신집중이 안 되어 보였다. 보고하면서 웬만한 건 보고하지 말자고 이야기했었다. 의연하게 버티려고 노력하셨지만 아버지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한가지 눈에 띄는 게, 집권 초기에는 대통령이 머리를 검게 염색해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가 중반으로 가면서 흰머리가 늘고 염색을 안 하더니 대국민 사과할 때는 "아니 YS가 저렇게 흰머리가 많았어?" 할 정도로 백발이었다. 왜 바뀌었나.
"검게 염색하는 것이 젊어 보이긴 하지만 자연스럽진 않다고 말씀 드렸다. 너무 새까맣게 하지 말고 적당히 자연스럽게 하시라 말씀드렸더니, 고개만 끄떡하면서 '알았다'고 했다. 막판에는 신경을 아예 안 썼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자서전에 현철씨 관련해서 쓴 내용을 보면 '아무리 봐도 사법적으로 잘못한 게 없다'고 썼다. 당시 검찰 총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문제 되는 걸 찾아내라' 지시를 했는데 검찰 총장이 ‘아무리 뒤져도 없다’하자 '그럼 만들어서라도 가져와라’고 했다고 한다. 정말 억울하고 사법적인 죄는 없었나.
"대통령은 민심을 수습해야 하니까, 그 상황에서 검찰이 죄 없다고 해도 국민이 신뢰를 못했을 것이고 민심이 더 악화 될 것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없는 죄라도 만들어내서 처벌해야한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현철씨가 사법적인 죄는 없는데, 정치적으로 여론이 그렇게 된 것인가.
"미세하게 아는 게 없으니까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의 성격을 봐선 법률을 어긴 일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주로 논란이 된 것은 인사 개입이나 국정 농담이다.
"단순히 차남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 시절엔 핵심 참모였기에 신뢰가 아주 컸다. 후산이라고도 불렸다. 대통령의 아들에 대한 신뢰는 매우 컸다. 아들의 입장에서, 전부터 참모역할 했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발언할 수 있다. 그게 공조직 의견과 다를 수 있고 그런 경우에는 대통령이 아들 말을 들을 수 있다. 가령 중요한 인사가 있어서 집무실에 들어가면 대통령이 ‘어느 자리에 아무개로 임명하겠음 발표해라’고 말해서 나오면 밖에 비서실장, 민정수석 등이 기다리고 있다. 인사는 민정에서 검증을 하고 올리는데, 그 분들이 궁금하니까 내가 나오면 ‘누구냐’ 묻는다 그래서 ‘아무개’라고 말하면 깜짝 놀라는 것을 몇 번 보았다. 그 뜻은 공조직에서 올린 인사가 아니란 뜻이다. 두 분이 ‘왜 인사가 그렇게 되었지’ 말하다가, ‘다 알잖아요’라고 말하는 것을 몇 번 들었다. 그게 아드님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게 사법적인 처리 대상은 아니다."
-거친 비유일 수 있겠으나, 박근혜 대통령도 최근 측근 보좌관 3인방 몇 명하고만 얘기를 하면서 국정을 결정해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가 많다. 이것과 아들의 국정개입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
"아들의 국정 개입은 아주 부분적인 것이었다. 김대통령은 시스템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생각을 널리 들었다. 참모가 올라가서 직언을 해도 언짢아 하지 않았다. 사람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을 불시에 던졌다. ‘아무개 장관 어때? 어떻게 수습할까’ 물어보거나 ‘아무개를 장관으로 쓰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나’ 묻곤 했다. 나의 경우 ‘제가 잘 아는 사람이라면 잘 안다고 하고 , 겪어 보았을 때 장단점과 공직과 언론에서의 평가를 말해드리겠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나의 판단은 없지만 학계·언론계·정치계의 평가를 전해드리겠다’고 했다. 그게 정보를 드린 것이지 판단을 드린 게 아니라 그런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경제부처 장관인데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데 ‘아무개 장관을 바꾸어야겠다. 말과 잡음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 직책이 장관이 어떤 정책을 결정하느냐에 따라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기업이 너무도 많다. 아무리 장관이 국가의 이익을 생각해서 합리적으로 결정해도 손해 봤다고 생각하는 기업이 많을 수 있다. 기업이 음해성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단순히 잡음이 많다는 이유로 바꾸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잡음의 내용이 무엇이냐 사실이냐가 중요하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수긍하면서 바꾸지 않으셨다. 그만큼 가까운 참모의 이야기를 기탄 없이 들으셨다."
-요즘 불통 논란이 많고 500m 거리가 논란이다. 그때와 구조가 같은데 지금에 비해 그때의 소통은 어땠는가.
"그 구조 때문에 늘 불평이 많았다. 대통령 집무실을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골조가 정해져서 바꾸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대통령 집무실이 정구장만 해서 공간 낭비가 참 많다. 문열고 들어가서 대통령 책상 앞에 가려면 오래 걸어가야 한다. 지금도 아마 고치는 게 힘들 것이다. 다만, 김대통령은 수석들과의 소통은 아주 자유로웠다. 수석들은 공식 일정 없는 틈에 부속실에 미리 얘기해놓고 틈날 때 수석이 올라가서 보고했다. 틈만 있으면 직보가 가능했다. 나의 경우 하루 몇 번씩 수시로 드나들었다. 분위기가 근엄해서 권위 부리고 이게 아니었다. 정말 편하게 이야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소통이 어렵고 직접 만나기가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고 했더니 ‘디지털 시대에 이메일이니 많은데 그게 더 편하지 않으냐’ 하면서 뒤돌아 장관들을 보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어 화제가됐다.
"대면 보고나 문서 보고의 차이를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지만 대통령이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상충하는 여러 가지 요소를 다 감안해야 한다. 딜레마적인 요소를 다 짚어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은 대면보고를 받아야 그 일에 책임을 진 장관이든 수석이든 충분히 토론을 해야 한다. 서면으론 그게 불가능하다. 대면보고와 서면보고는 큰 차이가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부탁이나 의견을 받아주는 게 많아 보였다. 수석으로 있으면서 건의하는 것 중에 10개를 건의하면 몇 개 정도 수용하나.
"10개 건의하면 6-7개는 수용한다. 그 중의 일부는 완전히 바꾸었던 것도 있다. 내가 ‘잘못 판단하셨다’ 하면 ‘윤수석이 잘 몰라서 그래’하고 쭉 말씀을 하신다. 그래서 ‘아니다. 각하가 이렇게 하셔야한다’ 말하면, 가만히 있다가 ‘내 생각이 짧았다’ 하고 바꾸신다. 이거 쉽지 않다. 또한 항상 연초에 기자회견을 했다. 그 바람에 난 못 쉬었다. 늘 연초에 의무처럼 대통령은 연초에 국민에게 ‘근년 국정을 이렇게 할 것이다’ 보고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대게 재가 기자들에게 뭐 물어볼 것인지 좀 알려달라고 부탁해서, 힌트를 주면 종합해서 국민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대통령에게 알려주었다. 답변을 써드리진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주 꼼꼼했다. 20분 담화면 20분 안에 국정을 다 담는 게 물리적으로 안 된다. 그래서 체육을 빼면 ‘이 사람아 체육이 없잖아’라고 한다. 그래서 ‘분량이 불어나서 안 된다’고 하면 ‘이 사람아 체육이 얼마나 중요한데. 체육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얼마며 국민이 즐기는 스포츠가 얼마인데 빼나. 체육 넣어’해서 하나 둘 씩 다 넣으면 20분 담화가 30분, 35분 늘어난다. 그게 대통령으로선 중요한 자세였다고 본다."
-현 대통령이랑 차이가 크다. 기자회견을 별로 안 하고 만나더라도 사전 답변을 꼼꼼히 준비한다고 하는데...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연초에 국민에게 국정 보고 안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본다. 이건 의무다."
-재미있는 게 20년 전 1996년 총선에서 지금하고 비슷하게 김 전 대통령이 4년차 초에 총선을 치렀고 박 대통령도 내년 4년차에 총선을 치렀다. 두 분이 시기적으로 똑같은 상황이다. 자서전을 보면 ‘다음은 내가 공천을 한 인물들의 신앙국당 의원들의 명단이다’ 하고선 아예 명단을 공개했다. 정의화, 이재오 등 다 나오는데 요즘으론 대통령이 이렇게 다 한다는 게 상상이 안 간다.
"평생 정치를 한 사람이고 정당 총재를 오래 한 사람이다. 공천을 오래 해봐서 아주 능란하다. 그는 사람을 평소에 굉장히 유심히 찾는다. 이미 선거를 상당기간 앞두고 사람을 찾아둔다. 그러다 적기에 사람을 찾아 쓴다."
- 정말 놀랍다. 보수 정치권이지만 재야에서 일반적으로 보수 진영 분이 싫어하는 분들을 택하기도 했다.
"그는 '정치권에 여러 색깔의 사람을 넣어서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동력 에너지가 있어야한다' 생각했다. 또한 김 전 대통령은 놀라운 포용력을 지녔다. 자신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사람도 포용했다. 대표적으로 이회창 전 총리가 있다. 국무총리 재임 중 헌법상 총리의 권한을 요구해서 대통령과 마찰이 생겨 나간 분이다. 근데 이회창을 선거 앞두고 택했다."
-자서전을 보면 분이 안 풀린 듯 보인다, ‘총리로서 지나친 월권을 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는 대목이 있다.
"그렇지만 감정은 감정대로 두고, 필요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중요하게 따졌다. 개인적으론 마땅치 않아도 필요한 사람은 기탄없이 썼다."
-자서전 후반부를 보면, 이회창 총재 대표가 그 땐 신한국당 대선 후보가 되어서 대선을 벌이다 막판에 지게 되는 것까지 묘사가 되어있다. 그 과정에 역시 대통령의 서운한 부분이 노출이 되어있다. 책만 보자면 대통령이 ‘자유 경선으로 누구의 개입 없이 당원의 뜻으로 된 사람이어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핸들링을 잘못하고 지지율도 계속 떨어지고 막판엔 대구에서 김 전 대통령 인형을 짓밟는 행사까지 열어서 나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온 의견이 김 전 대통령이 이회창을 버리고 미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내막을 자세하게 알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서 이인제 의원을 밀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이회창 전 총재에 대해서는 험한 이야기를 하는 가까운 측근들의 분노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동교동과 상도동의 관계를 모른다’고 했다. 싸울 땐 치열해도 협력할 때는 동지적 성격으로 사랑과 위험이 얽혀 있는 관계다."
-김대중 전 대통령 비자금 때문에 이야기 나온 것인가.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서 그렇게 공격을 하니까 ‘그럼 무조건 우리가 자기를 밀어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아니다'라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당시 이회창 전 총재 측근이었던 사무총장이 터뜨리는데 이것을 정말 청와대가 몰랐나.
"몰랐다고 보기엔 어렵다. 그 때 경찰 총장에게 수사하지 말라고 대통령에 말했었다. 그땐 수사하는 경우 호남 민심이 심상치 않았을 것이라 걱정해서란 말이 있다."
-결국 이회창 후보에 대한 미움이 있던 건가.
"국민의 판단에 맡겨서 김대중 후보가 선택되어도 괜찮지 않겠느냐 생각한 것 같다."
-이것에 관심 있는 사람은 '상도동과 동교동의 특수 관계가 작동을 했고, 더 큰 틀에서 보면 야권 출신 두 정권이 카르텔 형성을 한 것 아니냐'는 말이 있었다.
"카르텔 형성까지는 아니고 김 전 대통령이나 측근들의 분노가 있었으니까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도 나쁠 건 없지 않느냐, 이회창 후보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서 좋을 게 뭐가 있느냐’ 생각했을 수 있다. 카르텔 형성은 아니라고 본다."
-당시 부산 시민들은 ‘이회창 후보 당선되면 김 전 대통령 감옥 갈지도 모른다. 이회창 후보 찍느니 김대중 후보 찍고 기권하자’란 생각도 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도 퇴임 후 안위를 조금은 생각한 것 아닌가.
"그럴 일 은 없었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 재임 시절 퇴임 후 감옥 갈 일을 없었다."
-객관적으로는 잘못이 없어도 정치라는 게 비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전임자를 깎아내리거나 공격할 수 있지 않나.
"정치적으로 깎아낼 순 있을지 몰라도 전임대통령한테 없는 죄를 만들어서 씌우는 건 가능하지 않다. 이회창이 그럴 사람도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된 이후 사이좋은 모습을 기대했으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을 비판하는 정치를 했다.
"그것은 아마 김대중 대통령의 행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을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아 한 것은 무엇인가.
"IMF가 온 것에 대해서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 대통령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것과 아들 현철씨에 대한 아버지로서 섭섭한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고. 복합적이었을 것이다."
-우연한 일치인지 검찰총장과 국무총리가 모두 호남 출신이다, 자서전엔 그것을 자랑스럽게 썼다.
"역대 정권이 영남 지도자였다. 따라서 인사에서 늘 호남에 대한 배려가 있어왔다. 김 전 대통령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국무총리와 경찰총장까지 그렇게 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근 배포이고, 호남 쪽 민심을 감안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경제부분이 아쉽다. 자서전을 보면 경제부분 언급이 별로 없다. 상황 기술만 있는데, 대통령이 경제에 손을 놓고 있었나.
"사실 제도적으로는 경제 장관회의를 정기적으로 했다. 그렇게 보면 경제 분야에 소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해석을 해보면 경제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성이 떨어졌고, 관심도 많지 않았다. 회의하는 것을 보면 간간이 딴생각하는 표정도 있었다. 지시사항은 준비된 게 있어 했지만 경제를 꼼꼼히 챙기지는 않았다. 따라서 경제 분야를 맡은 참모나 고위 공직자에게 경제는 맡겨두었다. 속으로는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는 그때 주로 학계와 언론계 경제 논설위원을 많이 만났는데, 경제를 많이 걱정하곤 했다. 그래서 내가 ‘민간의 전문가는 경제를 걱정하는데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걸 보면 '경제가 매우 순탄하다'고 쓰여있다. 어느 쪽이 옳은 건가’ 몇 번 이야기 했다. 즉, IMF 사건이 오기 몇 달 전만 해도 대통령은 경제가 잘 돌아가는 줄 알았다. IMF의 궁극적 책임은 대통령이더라도 과정을 보면 대통령을 보좌한 사람의 잘못이 크다."
-전두환 전 대통령 경우에도, 경제는 잘 몰라 전문가에게 맡겼는데 경제가 신장되었다. 운이 좋아서 그런가. 왜 김 전 대통령에서는 비슷하게 했는데 실패했는가.
"김 전 대통령 정부에 있는 전문가 분들이 판단을 잘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을 게을리 한 건 아니다. 판단 잘못 때문에 두 분의 차이가 났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경제적 홍역을 치르는 게 불가피 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렇다면 인식을 해서 어떻게 구조 조정을 할 거인가 준비했을 텐데,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국무회의를 참석해서 경제 전문 각료들이 문제제기를 하면 당시 경제 부총리가 면박을 주었다. '재정이튼튼한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했다. 경제 장관들이 문제제기를 해도 경제부총리가 언짢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아쉬운 부분은 부총리를 바꾸지 못한 것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청와대를 나오기 전에 경제수석이 회의를 할 때 경제수석이 최초로 ‘한국 경제가 급격히 어려워지고 있다’ 말했다. 그것이 1997년 3, 4월경이다. 그 전 주까지만 해도 경제가 순조롭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회의가 끝나자마자 대통령에게 ‘제가 알고 있기로 어떤 나라도 일주일 세에 나빠지지 않습니다. 선행지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나본 모든 경제 전문가는 한결같이 경제가 나빠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각하는 어떤 보고를 받으셨습니까. 경제분야에 누군가 중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말을 했다. 대통령이 날 한참 보더니 아무 말 안하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알았다는 뜻이었다."
-외교 쪽에서 일관성이 없는 부분이 아쉬웠다. 외교 부분은 어떻게 평가하나.
"취임사에도 보면 ‘동맹보다 민족이 우선한다’고 썼다. 레터링은 좋다. 분단된 민족 국가니까 민족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고 남북한이 언젠가 통일 할 때는 민족을 염두에 두는 게 맞다. 하지만 취임사를 듣고 대통령이 남북한의 문제를 관리해야 하는데, ‘이 사람이 국가와 민족의 차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북 관계는 체제와 이념이 전혀 다른 국가와 국가의 관념이다. 민족으로 우회되지 않는데, 민족을 중심에 둘 때 어떤 문제가 생길지는 통찰이 부족했던 것 같다. 취임식장에 가서 들으면서 ‘국정이 상당히 혼란스러울 것 같다’ 생각을 했다. 취임사에서 옳은 지적을 했지만 자칫하면 상당히 시끄럽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초기에 김 전 대통령은 북한에 우호적이었다. 그땐 이미 북한이 핵개발 할 때다. 그런 현실과 핵 개발 이유를 깊이 고민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김 전 대통령에게 그것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국내 개혁만 해도 엄청난데 외교와 경제까지 잘하라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어깨에 짊어진 짐이 너무 컸다."
-대통령의 자격이란 관점에서 YS 시대를 어떻게 평가하나. 그 관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계승해야 할까.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시기가 국내외적으로 큰 전환기였다. 문민정부가 탄생했고 냉전해체가 있었으며 세계화 정보화의 물결이 나타났다. 오랜 세월에 걸친 권위주의 발전국가 모델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어떻게 운영해야 유지 발전이 되는지 더 고민했어야 한다. 새로운 국가 모델과 운영 원리도 고민해야 했다. 이 노력이 충분치 않았다. 취임 후 여러 개혁적 조치가 있을 때는 높았다. 국정운영 하면서 국민 지지도가 떨어진 것은 미리 이런 거시적인 통찰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통치 능력이라는 것이 쉽게 갖춰지지는 않는다. 역사적으로도 그렇다. 말 위해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분이다. 창업과정이 너무 험난해서 수성까지 요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 뒤를 이어받은 국가 지도자들과 정치가들은 김 전 대통령이 미처 하지 못한 것을 이루어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거시적인 비전을 제기한 사람이 이후 있었나 싶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국정 지표로 내세운 것이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병행 발전’이었다. 탁월한 현실 감각이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너무 노쇠해 집중력도 떨어지고 지구력도 떨어졌다. 그래서 좋은 국정 지표를 내걸고도 그걸 내걸고 꾸준히 처리를 못 했다."
-지금 김 전 대통령 빈소에서 ‘내가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이 될만한 정치인은 누구인가.
야박하다고 볼 수 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두 분의 철학을 이어갈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김 전 대통령과 김무성 대통령의 관계를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아들이라는 수사를 쓰면 그분의 정치적 이념을 계승해야 하는데, 거리가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선택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감하게 밀어붙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본인이 진다. 김무성은 여당 대표고 현직 대통령과 계속 대립하면 국정이 어렵게 때문에 이해해야 하는 측면은 있다. 그렇게 하면 당선되기도 어렵다. 김무성의 경우 대통령과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고심하는 것이 보인다. 지금 시점에선 정치적 아들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는 보일 수도 있다."
- 사람들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떠올리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자동으로 떠올린다. 책을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거짓말을 너무해서 그를 믿지 않았다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러한 발언을 들은 적이 있나.
"출입기자 할 적엔 수도 없이 들었으나, 대통령이 되고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어올리지도, 깎아내리지도 않았다. 두 차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왔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아주 깍듯하게 대했다. 존댓말을 쓰고, '대통령 각하'라고 부르며 몸가짐도 굉장히 조심했다. 아주 정중하고 겸손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김총재께서'라고 말했다. 방에선 서로 말을 놓았지만 대통령과 야당총재니까 공식적 자리에서는 높임말을 썼다. 회담을 끝내고, 나중에 통신 기사가 나오는 것을 확인해 보면 몇 군데 의심스러운 것이 있어서 ‘김 총재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각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물어보면 ‘아니 그러지 않았어. 그렇지만, 놔두어라. 야당이 다 그런 거 아니냐’ 말씀 하셨다. 정말 통큰 정치였다. 아무 불편 없이 소통이 되었다."
정리 김유진 인턴기자
촬영 공성룡, 김세희, 이진우
다음은 중앙일보 강찬호 논설위원과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일문일답 전문.
-빈소에 계속 계셨나.
"계속 못 있었다. 빈소가 준비되기 전에 일찍 가긴 했다. 여러 방송에서 출연해서 김영삼 전 대통령 추모 이야기를 나누자고 해서 방송 순회하느라 빈소를 지키지 못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전국적으로 추모 열기가 조용한 듯 확산하고 있다. 국민 마음에 김영삼 전 대통령 떠나보내기가 서운한가 보다. 어떻게 보나.
"그럴 것이다. 그는 일생을 통한 민주화 운동을 했다. 그 과정에서 동지적 인연을 맺은 사람이 전국에 많다. 또한, 그렇지 않더라도 팬이나 호감을 가진 사람이 많다. 근래에는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분위기가 많다. 그러다 보니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아지고 추모의 열기가 확산하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김 전 대통령은 야권의 지도자였지만, 3당 합당을 통해 현지 여권으로 이동한 사람이고, 지역주의를 바탕으로 정치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야권 지지자나 호남 사람 중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서운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분들도 하루 이틀 지나서는 추모에 동참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영호남의 감정적인 분열 때문에 그런 듯하다. 김 전 대통령도 영남분이다. 어떻게 보면 그와 함께 민주화 투쟁을 했고, 5.18 민주혁명을 격상시킨 대통령이지 않나."
-김 전 대통령은 5.18 3주년을 맞아서 서슬 퍼런 군사 정권에 아무도 대들지 못할 때 단식을 시작했고, 23일 동안 목숨을 건 투쟁을 했다. 단식을 하면서 김 전 대통령은 거대 정치인의 반열에 올랐다. 본인의 가치가 5.18 민주 회복이었는데 그것은 어떻게 보나.
"우리는 지금 5.18을 민주화의 기폭제로 본다. 김 전 대통령도 그러한 명분하에 단식을 했고, 대통령 취임 후 바로 5.18을 민주 혁명으로 승격했다."
-흔히 5.18이라고 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언급한다. 두 분을 비교하자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이 관심을 쏟았다는 게 여론의 관측이다. 사실은 김영삼 전 대통령도 5.18이나 광주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는 게 최근 부각되는 듯하다. 김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면서 그의 5.18이나 광주에 대한 관심을 느끼거나 체험한 적이 있나.
"직접 5.18이나 광주에 대한 말을 들을 기회는 없었다. 그동안의 행적으로 봐서는 광주나 5.18이 김대중 대통령과의 사적인 인연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의에 대해서 동감해 함께 투쟁한 것이니까, 그런 조치를 하고 평가하는 건 당연하다고 봤다."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그의 ‘통합 정신’을 계승하자는 추모 지면이 나온다. 어떻게 평가하나.
"지금 한국사회가 갈가리 분열이 돼 갈등 수습이 안 되고 있다. 이게 공동체 해체 현상이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그런 말이 나왔다고 본다.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 박근혜 후보는 국민 대통합을 내걸었고, 문재인 후보도 국민 통합을 내걸었다. 그러나 두 후보가 똑같이 통합을 얘기하면서도 통합의 개념을 설명한 일은 없다. 나는 당시 국민통합추진위원장을 맡아서 ‘국민통합 개념을 어떻게 설정해야하는가’하는 생각을 해보았는데, 이게 지도자 한 사람의 생각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고, 갈등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민주사회에는 갈등이 없을 수 없다. 통합은 다양한 갈등을 더 큰 가치로 묶어내는 것이라고 본다. 결국, 그 과정이 통합이다. 통합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다. 민주주의로의 과정. 따라서 의회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통합은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국회라는 게 정당들이 모여서 각각 다양한 지지 세력을 가진 정당들이 모여서 갈등을 하다가 대화와 타협으로, 또는 다수결의 원칙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국민의 일반의지 아닌가. 그게 통합이다. 국회가 통합 기능의 중심인데 입법부가 그 역할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가 갈등 수습이 안 된다. 따라서 통합이라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통합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통합이라고 할 때 김 전 대통령의 행적 혹은 발언에서 통합을 보여준 적절한 예는 무엇인가.
"특별히 다른 뜻이 있어서 통합을 언급한 것인지 헤아리기는 어렵다. 다만, 김 전 대통령이 야당에서 활동 할 때 끝없는 당권 경쟁을 하면서 대야 투쟁을 했다. 그 과정에서 당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분열이 계속 되었던 과정을 돌아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 오랜 내부투쟁과 대정부투쟁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늘 통합에 대한 절실함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위치는 독특했다. 항상 교량적, 중간적 역할을 했다. 야권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의회주의적이고 좀 더 중도적이었다.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좀 더 재야 쪽이고 투사적 이미지가 더 강한 쪽이다. 또한, 삼 당합당을 통해 민주화 투사이면서도 군정세력과 손을 잡아서 문민정부를 만들었다. 이후에 완전히 수평적 정권 교체가 되어서 야권으로 넘어갔는데, 그런 것들을 보면 모두 역사의 주요 결정점에서 교량 역할을 했다. 어떻게 보나.
"현실 정치인으로써는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명분도 좋지만, 현실은 늘 최선을 추구하더라도 최선을 택하긴 어렵다. 차선을 선택하고 최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것을 보면, 현실적으로는 그 당시에 군부세력하고 합당해서 빨리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게 시급하다는 판단을 하셨다고 본다."
-그게 논란이다. 그게 지금 와서는 역사의 순리 속에서 필요한 조치였다고 보지만, 사실 그때는 많은 사람이 변절한 것이 아닌가, 권력욕이 있었던 거 아닌가 말이 많다.
"정치지도자에게 권력욕에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권력욕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보면 군사 권위주의를 빨리 청산하고 문민정부를 세우는 게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핵심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대통령이 돼서 문민정부를 세워야겠다’고 한 것은 현실적인 판단이라고 본다. 그것에 대해 '투항이다', '변절이다', '한국 민주주의를 왜곡했다'는 비판도 일리는 있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김 전 대통령의 판단이 옳았다."
-민주주의의 양대 산맥이었던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이 5년 동안 나름대로 합세해서 대정부투쟁을 했고 '92년 대선에서 연합 단일화를 해서 진정한 민주정권을 이룰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하는 가설도 있었다. 가설은 어떻게 보나.
"가설로는 성립돼도 후보 단일화가 실제로는 안 됐다. 둘이 힘을 합쳐서 하나의 세력으로 정권 교체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봤던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무슨 생각이었다고 보나.
"확실히는 모른다. 어렴풋이 들은 말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태우 정부 시절, 현실을 타개하는 방안을 많이 고민했다고 들었다."
-역설적으로, 군정세력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연합하는 모델을 추측할 수는 없나.
"가능하다. 정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게 없다. 다만, DJ 같은 경우 합당의 성격이 가능했겠느냐는 의심이 든다. 연대까지는 가능해도 말이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분단 현실에서 안보를 생각하면서 경제발전도 하고 그러면서 민주화도 추진해야 하는 고난도의 방정식을 가진 나라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여권에서 야권으로 넘어간다기보다는 야권의 투사가 여권의 일정한 통합을 통해 중간적 형태의 민주화를 먼저 성취하고 이어서 야당으로 넘어간 것, 이것이 정치사적으로 보면 구도가 그럴 듯하다. 과연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런 구도를 그렸을까.
"그런 전체적 구도를 가졌는지 내가 알 길은 없다. 다만, 야당총재로 대투쟁을 할 때,그 당시 야당에는 세력이 여럿 있었다. 그 중에는 상당수가 박정희와의 투쟁을 주장하면서도, 늘 한편으론 '우리가 이래서 파국이 오는 경우엔 결국 북한 좋은 일이 아닌가'하는 걱정을 많이 했다. 항상 그 생각을 하니까 대 투쟁에 수위를 자꾸 조정하는 일이 생겼다. 이때는 야권도 북한을 많이 걱정했다. 당시 출입기자로 취재할 때였는데, 항상 그 사람들 머릿속에는 북한이란 존재가 있었다. 요즘하고는 남북한 관계가 다르다. 지금은 우리가 압도적으로 우월하지만 그땐 아니었다."
-여러 다른 정치적 상황 속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고난도의 의미 있는 정치를 했다는 것인가.
"그렇다. 권력욕을 가지고 3당 합당을 보는 사람도 있지만 꼭 그것만 가지고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 정치인으로는 필연적인 권력욕과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시대적 소명의식을 나누면 비율이 몇 대 몇으로 김 전 대통령의 머릿속에서 작동했을까.
"비율이 비슷했을 것이라 본다. 김 전 대통령의 권력욕도 남 못지않았다고 본다. 다만, 권력욕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권력욕을 성취하는 방식이 정당하냐가 문제다. 김 전 대통령은 권력욕과 민주화를 구현하는 의지가 결국 같은 것이었다."
-대통령이 되고 극과 극을 오갔다. 93년도에는 90%의 지지율, 97년 물러나기 직전엔 8%. 즉 극단을 오갔다. 이것도 김 전 대통령만의 특징인데, 이 극단성은 어떻게 보나.
"초기에 지지도가 높았던 것은 국민이 갈망했던 몇 가지 큰 조치를 했기 때문이다. 하나회라던가 금융실명제, 재산공개와 같은 것들이 국민이 보기엔 굉장히 과감하고 신속했다. 국민이 기대하기도 했지만 못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단호하게 실행해냈다. 그러다 보니 인기가 치솟았다. 그런데 항상 그렇게 국정을 운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정에 들어간 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고 모순이 생겼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전부 김영삼 대통령의 책임은 아니지만 IMF까지 오다 보니 정권 말기엔 한자릿수로 지지도가 내려갔다고 본다."
-합산하면 평균 40%는 나온다. 안타까운 점은, 보통 국민여론 조사를 하면 대게 1등이 박정희 전 대통령, 2등이 노무현 전 대통령 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최하위권이다.
"주로 IMF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 그게 워낙 국민에게 충격과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IMF에 가려진 성과들이 보이고 균형잡힌 평가가 이루어질 것이라 본다."
-이번 추모 열기 속에서도 그런 의견이 자주 보인다. ‘IMF에 가려 저서 그렇지 업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쓴 네티즌도 있다. 결국, 민심은 기억하는 것인 것 같다. 김 전 대통령 집권 중후반 기까지 2년 넘게 청와대에서 청와대 공보수석을 하고 대변인 역할도 하고 8개월 환경부 장관도 했다. 나의 인상에 남는 것 중 하나가 김영삼 대통령이 5년차 접어들어 아들 현철씨의 잘못을 사과하는 것인데, 어땠나.
"사과문은 내가 썼다. 사건이 터지고 작은아들 문제로 옮겨갈 때, 나는 이 문제는 그냥 못 넘어갈 것이라고 봤다. 당시 김광일 대표 실장에게 올라가서 ‘실장은 어떻게 판단했는지 몰라도, 내가 봤을 때 이 문제를 적당히 덮으려고 했을 땐 각하가 임기를 못 채울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 실장님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도 같은 생각인데, 내 걱정하지 말고 윤수석 똑바로 해라. 나는 말로 해야 하는 사람이지만, 당신은 글로 써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제 걱정하지 마세요’하고 나오는데, ‘윤수석’하고 불러세우고는 ‘우리 둘 다 각오를 합시다’라고 하더라. 옷 벗을 각오를 말하는 것이다.
당시 청와대 참모 중 수습 방안을 놓고 양론이 있었다. 정면으로 해결해야한다는 쪽과 잘못한 게 없으니 버텨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대통령도 판단을 쉽게 못했다. 김광일이나 윤여준·문정수·박세일 민정수석도 같은 생각이라서 이야기를 했지만, 대통령은 다른 의견도 듣고 가족도 있어 고민이 많았다. 나머지 분들은 현철씨가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여론에 휩싸여서 문책하는 건 아니라고 봤다.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쉽게 판단 못 하다가, 하루는 김광일 실장이 김수환 추기경이 전화를 해서 각하를 뵙자고 했다고 전했다. 그래서 대통령이 ‘그럼 내가 알다시피 복잡한 상태이니 며칠 후에 뵙자고 연락을 드려라’라고 했다. 그러고는 다시 실장에게 ‘추기경에게 연락을 드렸느냐’ 묻고 ‘뭐라고 하시더냐’ 물어보니 대답이, ‘알았다고는 하시는데 전화를 통해서도 조금 서운해 하시는 게 보였다’고 전했다. 그랬더니 대통령이 ‘그럼 안 된다. 빨리 모셔오라.’ 그래서 일정을 조정하고 대기실에 추기경님이 들어오셨다. 내가 ‘대통령의 심기를 살피지 말고 가감 없이 말해 달라’ 부탁했다. 추기경께서 ‘이 사람아, 내가 그러려고 왔지 왜 왔겠나’하셨다. 두 분이 두 시간 이야기를 나누더니, 추기경이 나오시는데 휘청거리셔, ‘조금 쉬었다 가시죠’ 하고 부축해 드렸다. 추기경께서 날 보고 ‘내가 할 일은 다 했어. 이제 당신들 일만 남았어’라고 했다. 대통령이 불러서 갔더니 ‘추기경 말을 들었으니까 이제 개신교 원로 목사 말을 들어야겠다. 한 분은 보수교단 원로이고 한 분은 진보교단의 원로를 모시니 연락처를 줄 테니 모시고 와라.’ 세분이 앉아서 한 시간 사십 분을 이야기했다. 나중에 대통령이 불러 갔더니 구두를 벗으면서 ‘어제 추기경 말씀이나 목사 말씀이나 내용이 똑같아’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담화를 준비하라고 해서 스님 말씀도 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소월추스님을 모셔왔고, 비슷한 시간 담화를 나누시고는 다 말씀이 비슷하다고 했다.
담화 준비를 하라고 해서 준비하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까 생각한 것보다 어려웠다. ‘담화로 민심을 좀 가라앉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국민이 대통령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분노가 누그러드나’생각을 하니 그렇게 쓰기 어려웠다. 어쨌거나 초안을 완성해서 드렸다, 그랬더니 매일 급한 업무를 처리하면 10시쯤 되는데, 나를 앉혀놓고 초안을 놓고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검토를 했다. 며칠 그렇게 하다가 날 보고 한 말이 ‘현철이 그런 일 없다. 내가 잘 안다’했다. 그래서 내가 ‘저도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다. 문제는 다수의 국민은 둘째 아드님이 모든 인사에 개입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이 믿고 있는 게 진실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해야한다. '국민이 몰라서 그렇지 현철이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하면 타는 불에 기름 붓는 격이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알겠다고 하고는 담화문을 읽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었다. ‘조사해봐서 책임질 일이 있으면 응분이 책임을 묻겠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이것을 읽고는 펜으로 ‘응분’을 지우고 ‘사법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하면 뜻이 달라진다고, '응분엔 사법적·정치적·도의적 모든 책임을 포괄적으로 담았기 때문에 이것이 낫다. 사법적으로 못박을 필요는 없다. 대통령 또한 아들이 사법적 책임이 있다고 보는 인상을 줄 필요가 없다.' 그러자 ‘그럼 대통령 아들은 잘못한 게 있어도 괜찮단 말이야? 책임을 안 물어? 그냥 둬’라고 했다. 아마 아들의 무고함을 확신했던 듯 하다. 경찰 조사를 받으면 무고할 것이고, 그렇다면 극적인 반전이 생겨 반전의 극대화가 나올 테고 그것을 생각해서 그렇게 강경하게 대응했다고 본다."
-응분을 사법으로 바꾸는 건 상당히 YS적이다.
"내 입장에선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조심스러워서 원본을 오래 가지고 있었다, 담화를 발표하는데 마지막까지도 섬세하게 검토했다. 내 생각엔 생방송으로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 수석 회의 때 그렇게 말했더니 각하가 '심경이 어지러운데 그럴 순 없다'고 모두 반대했다. 최소 15~20분 시차를 두어야 손질할 수 있다고 했다. 대통령에게 전달하자 ‘아니야, 윤수석 최초의 판단이 맞아. 생방송으로 해’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또 한 가지 허락을 받았다. 대통령이 있는 곳엔 늘 경호원이 있어야 하는데, 담화 발표 방에 경호원조차도 넣지 않겠다고 했다, 카메라맨 두 사람과 카메라 두 대만 가지고 혼자 고독하게 말씀하시라 전했다, ‘감정의 흐름에 맞기세요. 읽다 울음이 나오시면 우세요. 열 번 틀리게 읽으시면 열 번 고쳐 읽으세요, 구애받지마세요’ 하자 ‘알았어’ 하고 허락한 후 혼자 담화문을 읽었다. 옆방에서 모니터를 보며 어떻게 해야 국민을 달래나 만 생각했다. 근데 막상 대통령이 읽는 것을 보니 매우 처참했다. 현직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이런 처참한 사과를 하는 일이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 봤다. 보좌를 잘못해서 대통령이 재임중 이런 일을 하게 하였으니 책임을 져야 하고, 특히 나는 이것을 내 손으로 썼으니 사표를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표를 써서 실장에게 드렸더니, ‘누가 윤실장한테 사표 내라 했나요’ 하길래, ‘제가 그 처참한 각하 사과문을 제 손으로 썼습니다’고 했다. 그러자 ‘그럼 당신 혼자 양심적이고 남아있는 우리는 비양심적인가요’ 핀잔해서, ‘실장님이 옳다. 그러면 실장님 이하 전 수석이 그만둡시다’했다. 그래서 긴급 수석회의를 열었다. ‘윤수석이 다 그만두자고 그런다’ 말을 전하니까 아무도 말을 안했다. 그러다가 어느 수석이 ‘수석들이 다 그만두면 누가 국정을 보좌하느냐’라고 해서 내가 ‘그것도 옳다. 그럼 최소한 이 사태를 초래한 정무 수석·경제 수석·민정 수석·공보수석, 4석 그만 둡시다’고 말했다. 그래서 김 실장이 ‘그러면 내가 각하께 올라가서 전 수석이 퇴사를 한다고 전하겠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수석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 심기일전해서 열심히 해라‘ 말해서 일괄 사표는 없던 것이 되었다."
- 사과문 내용이 매우 직설적이었다. 특히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담화 발표 전 20분 전에 대통령이 전화를 했었다. ‘윤수석 다른 건 좋은데 그 표현은 좀 속된 표현이 아닌가’해서 ‘그렇지 않다. 조선조 때는 사대부집 안에서 관용구로 쓴 말인데, 근래엔 이 표현을 잘 안 써서 비속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원하시면 자식의 허물은 부모의 허물이라고 고칠 수는 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담화를 왜 발표하는가. 이 발표를 민심을 진정시켜야한다’고 하자 한참 생각하더니 ‘윤수석이 고집하면 할 수 없지’하고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참 죄송스러웠다. 나중에 담화 발표한 다음에 여러 보고가 올라오는데, 국민이 동정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민심이 가라앉을 것으로 보여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에 대통령은 상당히 처참했을 것이다. 때때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천장을 멍하게 쳐다봤다. 보고를 드리면 정신집중이 안 되어 보였다. 보고하면서 웬만한 건 보고하지 말자고 이야기했었다. 의연하게 버티려고 노력하셨지만 아버지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한가지 눈에 띄는 게, 집권 초기에는 대통령이 머리를 검게 염색해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가 중반으로 가면서 흰머리가 늘고 염색을 안 하더니 대국민 사과할 때는 "아니 YS가 저렇게 흰머리가 많았어?" 할 정도로 백발이었다. 왜 바뀌었나.
"검게 염색하는 것이 젊어 보이긴 하지만 자연스럽진 않다고 말씀 드렸다. 너무 새까맣게 하지 말고 적당히 자연스럽게 하시라 말씀드렸더니, 고개만 끄떡하면서 '알았다'고 했다. 막판에는 신경을 아예 안 썼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자서전에 현철씨 관련해서 쓴 내용을 보면 '아무리 봐도 사법적으로 잘못한 게 없다'고 썼다. 당시 검찰 총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문제 되는 걸 찾아내라' 지시를 했는데 검찰 총장이 ‘아무리 뒤져도 없다’하자 '그럼 만들어서라도 가져와라’고 했다고 한다. 정말 억울하고 사법적인 죄는 없었나.
"대통령은 민심을 수습해야 하니까, 그 상황에서 검찰이 죄 없다고 해도 국민이 신뢰를 못했을 것이고 민심이 더 악화 될 것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없는 죄라도 만들어내서 처벌해야한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현철씨가 사법적인 죄는 없는데, 정치적으로 여론이 그렇게 된 것인가.
"미세하게 아는 게 없으니까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의 성격을 봐선 법률을 어긴 일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주로 논란이 된 것은 인사 개입이나 국정 농담이다.
"단순히 차남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 시절엔 핵심 참모였기에 신뢰가 아주 컸다. 후산이라고도 불렸다. 대통령의 아들에 대한 신뢰는 매우 컸다. 아들의 입장에서, 전부터 참모역할 했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발언할 수 있다. 그게 공조직 의견과 다를 수 있고 그런 경우에는 대통령이 아들 말을 들을 수 있다. 가령 중요한 인사가 있어서 집무실에 들어가면 대통령이 ‘어느 자리에 아무개로 임명하겠음 발표해라’고 말해서 나오면 밖에 비서실장, 민정수석 등이 기다리고 있다. 인사는 민정에서 검증을 하고 올리는데, 그 분들이 궁금하니까 내가 나오면 ‘누구냐’ 묻는다 그래서 ‘아무개’라고 말하면 깜짝 놀라는 것을 몇 번 보았다. 그 뜻은 공조직에서 올린 인사가 아니란 뜻이다. 두 분이 ‘왜 인사가 그렇게 되었지’ 말하다가, ‘다 알잖아요’라고 말하는 것을 몇 번 들었다. 그게 아드님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게 사법적인 처리 대상은 아니다."
-거친 비유일 수 있겠으나, 박근혜 대통령도 최근 측근 보좌관 3인방 몇 명하고만 얘기를 하면서 국정을 결정해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가 많다. 이것과 아들의 국정개입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
"아들의 국정 개입은 아주 부분적인 것이었다. 김대통령은 시스템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생각을 널리 들었다. 참모가 올라가서 직언을 해도 언짢아 하지 않았다. 사람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을 불시에 던졌다. ‘아무개 장관 어때? 어떻게 수습할까’ 물어보거나 ‘아무개를 장관으로 쓰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나’ 묻곤 했다. 나의 경우 ‘제가 잘 아는 사람이라면 잘 안다고 하고 , 겪어 보았을 때 장단점과 공직과 언론에서의 평가를 말해드리겠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나의 판단은 없지만 학계·언론계·정치계의 평가를 전해드리겠다’고 했다. 그게 정보를 드린 것이지 판단을 드린 게 아니라 그런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경제부처 장관인데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데 ‘아무개 장관을 바꾸어야겠다. 말과 잡음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 직책이 장관이 어떤 정책을 결정하느냐에 따라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기업이 너무도 많다. 아무리 장관이 국가의 이익을 생각해서 합리적으로 결정해도 손해 봤다고 생각하는 기업이 많을 수 있다. 기업이 음해성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단순히 잡음이 많다는 이유로 바꾸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잡음의 내용이 무엇이냐 사실이냐가 중요하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수긍하면서 바꾸지 않으셨다. 그만큼 가까운 참모의 이야기를 기탄 없이 들으셨다."
-요즘 불통 논란이 많고 500m 거리가 논란이다. 그때와 구조가 같은데 지금에 비해 그때의 소통은 어땠는가.
"그 구조 때문에 늘 불평이 많았다. 대통령 집무실을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골조가 정해져서 바꾸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대통령 집무실이 정구장만 해서 공간 낭비가 참 많다. 문열고 들어가서 대통령 책상 앞에 가려면 오래 걸어가야 한다. 지금도 아마 고치는 게 힘들 것이다. 다만, 김대통령은 수석들과의 소통은 아주 자유로웠다. 수석들은 공식 일정 없는 틈에 부속실에 미리 얘기해놓고 틈날 때 수석이 올라가서 보고했다. 틈만 있으면 직보가 가능했다. 나의 경우 하루 몇 번씩 수시로 드나들었다. 분위기가 근엄해서 권위 부리고 이게 아니었다. 정말 편하게 이야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소통이 어렵고 직접 만나기가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고 했더니 ‘디지털 시대에 이메일이니 많은데 그게 더 편하지 않으냐’ 하면서 뒤돌아 장관들을 보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어 화제가됐다.
"대면 보고나 문서 보고의 차이를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지만 대통령이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상충하는 여러 가지 요소를 다 감안해야 한다. 딜레마적인 요소를 다 짚어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은 대면보고를 받아야 그 일에 책임을 진 장관이든 수석이든 충분히 토론을 해야 한다. 서면으론 그게 불가능하다. 대면보고와 서면보고는 큰 차이가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부탁이나 의견을 받아주는 게 많아 보였다. 수석으로 있으면서 건의하는 것 중에 10개를 건의하면 몇 개 정도 수용하나.
"10개 건의하면 6-7개는 수용한다. 그 중의 일부는 완전히 바꾸었던 것도 있다. 내가 ‘잘못 판단하셨다’ 하면 ‘윤수석이 잘 몰라서 그래’하고 쭉 말씀을 하신다. 그래서 ‘아니다. 각하가 이렇게 하셔야한다’ 말하면, 가만히 있다가 ‘내 생각이 짧았다’ 하고 바꾸신다. 이거 쉽지 않다. 또한 항상 연초에 기자회견을 했다. 그 바람에 난 못 쉬었다. 늘 연초에 의무처럼 대통령은 연초에 국민에게 ‘근년 국정을 이렇게 할 것이다’ 보고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대게 재가 기자들에게 뭐 물어볼 것인지 좀 알려달라고 부탁해서, 힌트를 주면 종합해서 국민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대통령에게 알려주었다. 답변을 써드리진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주 꼼꼼했다. 20분 담화면 20분 안에 국정을 다 담는 게 물리적으로 안 된다. 그래서 체육을 빼면 ‘이 사람아 체육이 없잖아’라고 한다. 그래서 ‘분량이 불어나서 안 된다’고 하면 ‘이 사람아 체육이 얼마나 중요한데. 체육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얼마며 국민이 즐기는 스포츠가 얼마인데 빼나. 체육 넣어’해서 하나 둘 씩 다 넣으면 20분 담화가 30분, 35분 늘어난다. 그게 대통령으로선 중요한 자세였다고 본다."
-현 대통령이랑 차이가 크다. 기자회견을 별로 안 하고 만나더라도 사전 답변을 꼼꼼히 준비한다고 하는데...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연초에 국민에게 국정 보고 안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본다. 이건 의무다."
-재미있는 게 20년 전 1996년 총선에서 지금하고 비슷하게 김 전 대통령이 4년차 초에 총선을 치렀고 박 대통령도 내년 4년차에 총선을 치렀다. 두 분이 시기적으로 똑같은 상황이다. 자서전을 보면 ‘다음은 내가 공천을 한 인물들의 신앙국당 의원들의 명단이다’ 하고선 아예 명단을 공개했다. 정의화, 이재오 등 다 나오는데 요즘으론 대통령이 이렇게 다 한다는 게 상상이 안 간다.
"평생 정치를 한 사람이고 정당 총재를 오래 한 사람이다. 공천을 오래 해봐서 아주 능란하다. 그는 사람을 평소에 굉장히 유심히 찾는다. 이미 선거를 상당기간 앞두고 사람을 찾아둔다. 그러다 적기에 사람을 찾아 쓴다."
- 정말 놀랍다. 보수 정치권이지만 재야에서 일반적으로 보수 진영 분이 싫어하는 분들을 택하기도 했다.
"그는 '정치권에 여러 색깔의 사람을 넣어서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동력 에너지가 있어야한다' 생각했다. 또한 김 전 대통령은 놀라운 포용력을 지녔다. 자신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사람도 포용했다. 대표적으로 이회창 전 총리가 있다. 국무총리 재임 중 헌법상 총리의 권한을 요구해서 대통령과 마찰이 생겨 나간 분이다. 근데 이회창을 선거 앞두고 택했다."
-자서전을 보면 분이 안 풀린 듯 보인다, ‘총리로서 지나친 월권을 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는 대목이 있다.
"그렇지만 감정은 감정대로 두고, 필요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중요하게 따졌다. 개인적으론 마땅치 않아도 필요한 사람은 기탄없이 썼다."
-자서전 후반부를 보면, 이회창 총재 대표가 그 땐 신한국당 대선 후보가 되어서 대선을 벌이다 막판에 지게 되는 것까지 묘사가 되어있다. 그 과정에 역시 대통령의 서운한 부분이 노출이 되어있다. 책만 보자면 대통령이 ‘자유 경선으로 누구의 개입 없이 당원의 뜻으로 된 사람이어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핸들링을 잘못하고 지지율도 계속 떨어지고 막판엔 대구에서 김 전 대통령 인형을 짓밟는 행사까지 열어서 나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온 의견이 김 전 대통령이 이회창을 버리고 미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내막을 자세하게 알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서 이인제 의원을 밀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이회창 전 총재에 대해서는 험한 이야기를 하는 가까운 측근들의 분노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동교동과 상도동의 관계를 모른다’고 했다. 싸울 땐 치열해도 협력할 때는 동지적 성격으로 사랑과 위험이 얽혀 있는 관계다."
-김대중 전 대통령 비자금 때문에 이야기 나온 것인가.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서 그렇게 공격을 하니까 ‘그럼 무조건 우리가 자기를 밀어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아니다'라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당시 이회창 전 총재 측근이었던 사무총장이 터뜨리는데 이것을 정말 청와대가 몰랐나.
"몰랐다고 보기엔 어렵다. 그 때 경찰 총장에게 수사하지 말라고 대통령에 말했었다. 그땐 수사하는 경우 호남 민심이 심상치 않았을 것이라 걱정해서란 말이 있다."
-결국 이회창 후보에 대한 미움이 있던 건가.
"국민의 판단에 맡겨서 김대중 후보가 선택되어도 괜찮지 않겠느냐 생각한 것 같다."
-이것에 관심 있는 사람은 '상도동과 동교동의 특수 관계가 작동을 했고, 더 큰 틀에서 보면 야권 출신 두 정권이 카르텔 형성을 한 것 아니냐'는 말이 있었다.
"카르텔 형성까지는 아니고 김 전 대통령이나 측근들의 분노가 있었으니까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도 나쁠 건 없지 않느냐, 이회창 후보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서 좋을 게 뭐가 있느냐’ 생각했을 수 있다. 카르텔 형성은 아니라고 본다."
-당시 부산 시민들은 ‘이회창 후보 당선되면 김 전 대통령 감옥 갈지도 모른다. 이회창 후보 찍느니 김대중 후보 찍고 기권하자’란 생각도 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도 퇴임 후 안위를 조금은 생각한 것 아닌가.
"그럴 일 은 없었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 재임 시절 퇴임 후 감옥 갈 일을 없었다."
-객관적으로는 잘못이 없어도 정치라는 게 비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전임자를 깎아내리거나 공격할 수 있지 않나.
"정치적으로 깎아낼 순 있을지 몰라도 전임대통령한테 없는 죄를 만들어서 씌우는 건 가능하지 않다. 이회창이 그럴 사람도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된 이후 사이좋은 모습을 기대했으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을 비판하는 정치를 했다.
"그것은 아마 김대중 대통령의 행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을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아 한 것은 무엇인가.
"IMF가 온 것에 대해서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 대통령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것과 아들 현철씨에 대한 아버지로서 섭섭한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고. 복합적이었을 것이다."
-우연한 일치인지 검찰총장과 국무총리가 모두 호남 출신이다, 자서전엔 그것을 자랑스럽게 썼다.
"역대 정권이 영남 지도자였다. 따라서 인사에서 늘 호남에 대한 배려가 있어왔다. 김 전 대통령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국무총리와 경찰총장까지 그렇게 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근 배포이고, 호남 쪽 민심을 감안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경제부분이 아쉽다. 자서전을 보면 경제부분 언급이 별로 없다. 상황 기술만 있는데, 대통령이 경제에 손을 놓고 있었나.
"사실 제도적으로는 경제 장관회의를 정기적으로 했다. 그렇게 보면 경제 분야에 소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해석을 해보면 경제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성이 떨어졌고, 관심도 많지 않았다. 회의하는 것을 보면 간간이 딴생각하는 표정도 있었다. 지시사항은 준비된 게 있어 했지만 경제를 꼼꼼히 챙기지는 않았다. 따라서 경제 분야를 맡은 참모나 고위 공직자에게 경제는 맡겨두었다. 속으로는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는 그때 주로 학계와 언론계 경제 논설위원을 많이 만났는데, 경제를 많이 걱정하곤 했다. 그래서 내가 ‘민간의 전문가는 경제를 걱정하는데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걸 보면 '경제가 매우 순탄하다'고 쓰여있다. 어느 쪽이 옳은 건가’ 몇 번 이야기 했다. 즉, IMF 사건이 오기 몇 달 전만 해도 대통령은 경제가 잘 돌아가는 줄 알았다. IMF의 궁극적 책임은 대통령이더라도 과정을 보면 대통령을 보좌한 사람의 잘못이 크다."
-전두환 전 대통령 경우에도, 경제는 잘 몰라 전문가에게 맡겼는데 경제가 신장되었다. 운이 좋아서 그런가. 왜 김 전 대통령에서는 비슷하게 했는데 실패했는가.
"김 전 대통령 정부에 있는 전문가 분들이 판단을 잘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을 게을리 한 건 아니다. 판단 잘못 때문에 두 분의 차이가 났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경제적 홍역을 치르는 게 불가피 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렇다면 인식을 해서 어떻게 구조 조정을 할 거인가 준비했을 텐데,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국무회의를 참석해서 경제 전문 각료들이 문제제기를 하면 당시 경제 부총리가 면박을 주었다. '재정이튼튼한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했다. 경제 장관들이 문제제기를 해도 경제부총리가 언짢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아쉬운 부분은 부총리를 바꾸지 못한 것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청와대를 나오기 전에 경제수석이 회의를 할 때 경제수석이 최초로 ‘한국 경제가 급격히 어려워지고 있다’ 말했다. 그것이 1997년 3, 4월경이다. 그 전 주까지만 해도 경제가 순조롭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회의가 끝나자마자 대통령에게 ‘제가 알고 있기로 어떤 나라도 일주일 세에 나빠지지 않습니다. 선행지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나본 모든 경제 전문가는 한결같이 경제가 나빠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각하는 어떤 보고를 받으셨습니까. 경제분야에 누군가 중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말을 했다. 대통령이 날 한참 보더니 아무 말 안하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알았다는 뜻이었다."
-외교 쪽에서 일관성이 없는 부분이 아쉬웠다. 외교 부분은 어떻게 평가하나.
"취임사에도 보면 ‘동맹보다 민족이 우선한다’고 썼다. 레터링은 좋다. 분단된 민족 국가니까 민족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고 남북한이 언젠가 통일 할 때는 민족을 염두에 두는 게 맞다. 하지만 취임사를 듣고 대통령이 남북한의 문제를 관리해야 하는데, ‘이 사람이 국가와 민족의 차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북 관계는 체제와 이념이 전혀 다른 국가와 국가의 관념이다. 민족으로 우회되지 않는데, 민족을 중심에 둘 때 어떤 문제가 생길지는 통찰이 부족했던 것 같다. 취임식장에 가서 들으면서 ‘국정이 상당히 혼란스러울 것 같다’ 생각을 했다. 취임사에서 옳은 지적을 했지만 자칫하면 상당히 시끄럽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초기에 김 전 대통령은 북한에 우호적이었다. 그땐 이미 북한이 핵개발 할 때다. 그런 현실과 핵 개발 이유를 깊이 고민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김 전 대통령에게 그것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국내 개혁만 해도 엄청난데 외교와 경제까지 잘하라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어깨에 짊어진 짐이 너무 컸다."
-대통령의 자격이란 관점에서 YS 시대를 어떻게 평가하나. 그 관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계승해야 할까.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시기가 국내외적으로 큰 전환기였다. 문민정부가 탄생했고 냉전해체가 있었으며 세계화 정보화의 물결이 나타났다. 오랜 세월에 걸친 권위주의 발전국가 모델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어떻게 운영해야 유지 발전이 되는지 더 고민했어야 한다. 새로운 국가 모델과 운영 원리도 고민해야 했다. 이 노력이 충분치 않았다. 취임 후 여러 개혁적 조치가 있을 때는 높았다. 국정운영 하면서 국민 지지도가 떨어진 것은 미리 이런 거시적인 통찰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통치 능력이라는 것이 쉽게 갖춰지지는 않는다. 역사적으로도 그렇다. 말 위해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분이다. 창업과정이 너무 험난해서 수성까지 요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 뒤를 이어받은 국가 지도자들과 정치가들은 김 전 대통령이 미처 하지 못한 것을 이루어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거시적인 비전을 제기한 사람이 이후 있었나 싶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국정 지표로 내세운 것이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병행 발전’이었다. 탁월한 현실 감각이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너무 노쇠해 집중력도 떨어지고 지구력도 떨어졌다. 그래서 좋은 국정 지표를 내걸고도 그걸 내걸고 꾸준히 처리를 못 했다."
-지금 김 전 대통령 빈소에서 ‘내가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이 될만한 정치인은 누구인가.
야박하다고 볼 수 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두 분의 철학을 이어갈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김 전 대통령과 김무성 대통령의 관계를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아들이라는 수사를 쓰면 그분의 정치적 이념을 계승해야 하는데, 거리가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선택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감하게 밀어붙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본인이 진다. 김무성은 여당 대표고 현직 대통령과 계속 대립하면 국정이 어렵게 때문에 이해해야 하는 측면은 있다. 그렇게 하면 당선되기도 어렵다. 김무성의 경우 대통령과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고심하는 것이 보인다. 지금 시점에선 정치적 아들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는 보일 수도 있다."
- 사람들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떠올리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자동으로 떠올린다. 책을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거짓말을 너무해서 그를 믿지 않았다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러한 발언을 들은 적이 있나.
"출입기자 할 적엔 수도 없이 들었으나, 대통령이 되고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어올리지도, 깎아내리지도 않았다. 두 차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왔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아주 깍듯하게 대했다. 존댓말을 쓰고, '대통령 각하'라고 부르며 몸가짐도 굉장히 조심했다. 아주 정중하고 겸손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김총재께서'라고 말했다. 방에선 서로 말을 놓았지만 대통령과 야당총재니까 공식적 자리에서는 높임말을 썼다. 회담을 끝내고, 나중에 통신 기사가 나오는 것을 확인해 보면 몇 군데 의심스러운 것이 있어서 ‘김 총재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각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물어보면 ‘아니 그러지 않았어. 그렇지만, 놔두어라. 야당이 다 그런 거 아니냐’ 말씀 하셨다. 정말 통큰 정치였다. 아무 불편 없이 소통이 되었다."
정리 김유진 인턴기자
촬영 공성룡, 김세희, 이진우
“YS, 87년 괴한들 당사 급습 때 도망치다 국밥집 솥에 빠질 뻔”
- J 트렌드 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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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2015.11.25 02:18 수정 2015.11.25 02:22
당사 3층서 뛰어내려 지붕 위 도주
김수한 “그 뒤 용팔이 사건 이어져”
‘용팔이’ 김용남씨도 빈소 찾아
당시 현장에 있었던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 이날 오전 빈소에 조문객이 뜸한 사이에 이야기를 꺼냈다. “당사 3층에 YS랑 나랑 이충환 부총재랑 있는데 김동영(전 의원)이가 뛰어 올라와 ‘누군가 몰려온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다보니까 정말 당사 주변에 새까맣게 몰려들었어. 셔터를 내려 문을 막으니까 그 자들이 사다리까지 타고 기어오르더라고. 그래서 ‘아! 오늘 맞아 죽겠구나’ 하고 있는데 YS는 역시 보통이 아냐. 3층 조그만 문간방 창문을 확 열더니 그냥 뛰어내리더라고. 그래서 종로경찰서 쪽으로 기와집 지붕을 타고 뛰었어. 나도 빠른데 YS가 막대기 하나 주워 들고 뛰는데 정말 빠릅디다. 그런데 그러다가 경찰서 거의 다 와서 YS가 발을 헛디뎠어. 그래서 그만 국밥집 마당으로 떨어졌지. 이게 다 나중에 용팔이 사건으로 이어진 겁니다.”
어렵게 화를 면한 YS는 통일민주당 창당을 강행했다. 이후 지구당 20여 곳에 폭력배들이 난입해 기물을 파손하고 당 관계자들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폭행사건의 주동자 김용남씨의 별명이 ‘용팔이’였기 때문에 훗날 이 사건은 ‘용팔이 사건’으로 통하게 됐다.
결국 안국동에서 YS가 벌인 구사일생의 활극은 ‘용팔이 사건’의 전초전이었던 셈이다. 지금은 목사로 변신한 ‘용팔이 사건’의 주동자 김씨(65)도 이날 오후 4시쯤 빈소를 다녀갔다. 김씨를 직접 맞은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은 "조문을 길게 하진 않았고 기도하고 묵념을 오래했다”며 "‘저 목사 됐어요’하고 휙 가버렸다”고 말했다. 빈소 관계자들 사이에선 “YS가 ‘통합과 화합’을 이야기하셨는데 그런 측면에서 참 재미있는 장면”이란 얘기가 나왔다.
88년 검찰은 ‘용팔이 사건’의 배후가 신민당 내부의 창당 반대 세력이라고만 결론 내리고 서둘러 사건을 종결했다. 하지만 YS가 대통령이 된 뒤인 93년 이 사건은 재조사됐고 결국 당시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신민당 내부 창당 반대파에 폭력배 동원 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났다.
김경희·박병현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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