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경영

이건희의 세계 1위 방정식

Shawn Chase 2015. 11. 12. 01:40
홍하상
작가
E-mail : hasangstory@naver.com
기업인에 관한 책을 많이 써온 작가로 유명하다.

2003년에 국내 최초로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을 다룬 책 <이건희, 그의 시선은 10년 후를 바라보고 있다>를 시작으로 <이병철 경영대전>, <정주영 경영정신>, <주식회사 대한민국 CEO 박정희>, <세계를 움직이는 삼성의 스타 CEO> 등 국내의 기업가를 다룬 10여권의 저서를 냈다. 그 외에 <일본의 상도>, <중국을 움직이는 10인의 CEO> 등 일본과 중국의 기업인들에 관한 저서가 상당수 있다. 최근에는 <유럽명품기업의 정신>을 출간, 기업과 기업가 정신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

1년의 절반 정도를 일본·중국·유럽 등 현장을 누비면서 직접 취재하는, 발로 뛰는 작가이다.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이후 논픽션 작가로 30여년간 활동하고 있다.



까만 고무신 신던 이건희, 흰 고무신 생기면 아끼겠다고 구석에 숨겨

입력 : 2015.10.23 07:48 | 수정 : 2015.10.23 16:51
  • 스크랩 메일 인쇄
  • 글꼴 글꼴 크게 글꼴 작게

 

이건희와 장난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2일 청년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청년희망펀드에 200억원의 사재를 출연한다고 삼성그룹이 밝혔다. 이 회장은 아버지 이병철 회장 세대를 이어 대한민국 산업계를 이끌어온 2세대 총수들 가운데 얼굴이다. 총수 1세대가 대한민국 경제근대화의 초석을 낳았다면 그가 주도한 2세대는 대한민국 경제를 세계화시켰다. 이 회장의 삶과 업적을 시리즈로 되돌아본다./편집자

먼저 어린 시절의 이건희부터 살펴본다. 이건희 회장은 세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 같진 않다. 이건희는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선친인 이병철은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삼성상회를 경영하고 있었다. 삼성상회는 청과물과 건어물을 취급하는 무역회사로 이병철이 이제 막 사업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였다. 당시 대구에는 이건희 위로도 6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있었으므로 그의 어머니는 어린 이건희를 돌보기 어려웠다. 이건희의 어머니인 박두을 여사는 3남인 이건희를 낳은 후 젖을 떼자마자 그를 의령의 시어머니 댁으로 보낸다. 의령의 친가로 보내진 이건희는 갓난 아기때부터 친할머니집에서 친할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유모의 손에서 컸다. 유모에게는 이건희 또래의 딸이 있어 그 딸과 함께 오누이처럼 함께 자랐다.
젊은 시절의 이병철 전 삼성회장과 아들 이건희 회장.
젊은 시절의 이병철 전 삼성회장과 아들 이건희 회장.
그가 엄마를 다시 본 것은 네살이 되어서였다.네살이 되어서 그는 대구의 어머니에게 보내졌던 것이다. 어머니를 처음 보았을 때 이건희는 좀 혼란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때까지 할머니를 어머니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누구냐고 물어보기까지 할 정도였다. 또 형과 누나도 그때 처음 보았다. 누나들을 같은 형제인줄 모르고 ‘네 엄마는 누구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는 거기서 유치원을 다녔다. 어린 시절의 그는 예상 밖으로 풍족하게 지내지 못했다. 주로 까만 통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어쩌다 흰 고무신이 생기면 아낀다고 구석에 숨겨놓고 신을 정도였다. 먹고 살만 한 집안이었지만, 근검절약하는 가풍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집안은 증조모 때에 부를 쌓았다. 증조모가 한끼를 덜 먹고 베 한필을 더 짜는데 몰두했다. 안 먹고 안쓰는 것이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유일한 시대였다. 증조모 시절에 그렇게 악착같이 노력해서 4백석 지기의 부를 이루었다. 조부는 거기에 1백석을 더 늘려 5백석까지 만들었다. 그 5백석을 이병철의 형인 이병각이 3백석,동생인 이병철이 2백석씩 물려받았다. 대구 시절 그의 집안은 두평짜리 방3개, 세평짜리 방 한 개 등 4개의 방에 모두 열 대여섯식구가 살았다. 이병철 내외와 3남4녀, 그리고 일군들이 함께 살았던 것이다. 방4개에 열대여섯 식구가 살았으니 매우 비좁았다.

유치원 때 이건희가 소풍가는 날, 그의 어머니는 김 다섯장과 삶은 달걀 한개를 다른 형제들보다 더 넣어주었다. 그날이 이건희의 생일날이어서 특별 보너스로 더 준 것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근검절약으로 재산을 모아온 집안이어서 허풍더풍 쓰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당시 이건희 위로는 이맹희, 이창희 두 형과 인희, 숙희, 순희, 덕희 등 네명이나 되는 누나가 있었다. 이병철은 그 당시 사업 때문에 몹시 바빴고 누나와 형들은 학업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온 가족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것이 이건희가 중학교 3학년때였다고 한다. 그날 온가족이 처음으로 만난 것을 기념해서 가족사진을 찍었을 정도였다. 그는 초등학교를 여섯군데나 옮겨다녔다.
대구에서 사업을 하던 선친 이병철이 좀더 크게 사업을 하기 위해 1947년 5월 서울로 상경한다. 종로구 혜화동 163-25번지에 60평짜리 집을 사서 자리를 잡고 그 이듬해엔 서울의 종로2가에서 무역회사인 삼성물산공사를 차렸다. 이건희는 종로의 혜화국민학교에 다녔다. 혜화국민학교 2학년 때 6·25가 터졌다.

이병철은 6·25가 일어났을 때 미처 피난가지 못했다. 이병철 일가는 적 치하에서 3개월 동안 상당한 고생을 했다. 자본가여서 인공치하의 내무서에 수시로 불려갔고, 그가 타던 48년형 미국산 시보레 승용차는 징발되어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헌영이 타고 다니기도 했다.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이병철 일가는 9월 28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자 마산으로 내려갔다.

이건희는 거기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마산에 살 땐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대구로 전학을 했다. 대구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부친이 부산의 동광동으로 자리를 옮겨 고철수집업, 설탕과 비료 수입업 등을 했기 때문이다. 그도 부산으로 전학을 가게되었다. 부산에서는 두 번 전학을 했다.
어린 시절의 이건희 회장.
어린 시절의 이건희 회장.
“건희가 천장에 매달면 끈을 물고 빙빙 돌아가는 비행기, 레일 위를 달리는 모형기차 등 당시로서는 구경하기도 힘든 장난감을 가져와서 함께 놀던 생각은 나는데 말이 없고 장난도 잘 치지 않던 아이라 다른 기억은 거의 없다.”

부산사범부속 초등학교 시절, 4, 5학년을 같이 다녔던 권근술 전 한겨레 신문 사장의 기억이다. 아버지 이병철이 1950년대 피난지 부산에서도 사업에 성공했을 때이니까, 집안은 부유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게 있다. 그 비싼 장난감들은 그저 갖고 노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뜯어보고 다시 조립해보는 과학탐구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이건희 뿐만 아니고,그 위의 형들 즉 이맹희와 이창희가 모두 그랬다. 그들 3형제는 신기한 장난감이나 물건이 생기면 갖고 놀다가 결국은 분해해보고 다시 조립하는 것을 즐겼다. 이러한 취미는 줄곧 계속되어 그는 카메라를 뜯어보기도 하고, VTR, 훗날 심지어는 자동차까지 뜯었다가 조립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른다. 그의 형 이맹희도 60대에 이르는 나이까지 세계의 명품 AV시스템은 모조리 구입해서 왜 그 성능이 좋은 지 그 구조을 뜯어보고 살펴보는 걸 낙으로 삼을 정도였다.

이건희가 부회장이었던 1980년대초 삼성그룹은 삼성정밀을 설립했다. 삼성이 처음에 카메라 사업에 진출했을 때 그는 삼성정밀 사장을 불러 집에 카메라가 몇대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삼성정밀 사장이 카메라가 한 대밖에 없다고 대답하자 그는 카메라 회사의 사장이면 세계적인 카메라는 다 갖고있으면서 밤낮으로 연구해야한다고 권유한 적도 있었다. 이미 세계 일류 카메라의 구조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의 이건희는 말은 별로 없고, 혼자서 골똘히 생각에 빠지거나 장난감을 뜯어보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이 점은 그의 부친인 이병철도 그랬다. 이병철 회장도 혼자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스타일의 경영인이었다.

“좀체 화를 내는 법도 없었고, 큰 소리와 욕설은 물론 보고 받을 때도 겉으로 좋다, 싫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평생동안 아버지가 큰소리를 내면서 웃는 모습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병철의 장남인 이맹희가 쓴 <묻어둔 이야기>이라는 책에서 그린 아버지의 성격이다.이건희 회장은 수줍어하고,부끄러움을 타며 남 앞에 나서길 싫어하는 체질이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어 온 것이라고 볼 수있다.

 

이건희가 평생 친구로서 마음을 준 대상

입력 : 2015.11.02 06:02 | 수정 : 2015.11.02 07:12
  • 스크랩 메일 인쇄
  • 글꼴 글꼴 크게 글꼴 작게

 

이건희는 부산사범부속 초등학교 5학년때인 1953년 일본의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선진국을 보고 배우라’는 아버지의 지시였다. 일본말도 배워야 했고, 공부도 해야했다. 친구도 없었고, 또 집으로 돌아와 봐야 아버지,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상당히 외로웠을 것이다.

<나면서부터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돼서 성격이 내성적이 됐고, 친구도 없고 그러니까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생각을 해도 아주 깊이 하게 됐다…. 가장 민감한 때에 민족차별, 분노,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이 모든 걸 다 느꼈다.>

그가 한 인터뷰 중의 한 귀절이다. 중1때 그는 집에서 페키니스라는 개를 기르기 시작했다. 페키니스를 친구삼아 놀았고, 그후 지금까지 개는 그의 평생 친구로서 아이스크림을 같이 나누어 먹고, 한방에서 잠을 자며 때로는 직접 목욕도 시켜주고 빗질도 해줄 정도로 친한 대상이 되었다. 그가 개를 좋아하는 이유는 ‘거짓말 안하고 배신할 줄 모르는 충직함’ 때문이라고 훗날 술회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개. /홍하상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개. /홍하상
이건희 회장은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알아주는 애견가에 속한다. 중학교를 다니면서 특기할만한 것 중의 하나는 그가 1200~1300편의 영화를 보았다는 것이다. 1200~1300편이면 그 무렵 일본에서 10년간 만들어진 영화 편수이다.

<영화를 감상할 때면 대개 주인공에게 치중해서 보게된다. 그런데 등장 인물 각자의 처지에서 보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인생까지 느끼게 된다. 거기에 감독, 카메라맨의 입장에서 두루 생각하면서 보면 또 다른 감동을 맛보게 된다.>

그가 권하는 영화 감상법이다. 그는 영화를 볼 때 주인공 뒤의 배경까지도 본다고 알려져있다. 이런 취향은 훗날 VTR을 만들 때 반영된다. VTR을 생산하기에 앞서 외국제품을 뜯어서 그 내부를 본다. 거기에 들어가 있는 부속 하나하나의 역할과 만든 회사까지도 모두 보게 만들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인 프로레슬러 역도산(力道山·1924-1963)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건희도 역도산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건희 어린 시절의 일본유학은 3년으로 끝난다. 중1을 마치고 귀국, 서울 사대부중에 편입한 것이다. 고교도 서울사대부고를 다녔다. 고교 때는 레슬링부에 들어간다. 역도산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레슬링은 2학년말까지 계속된다. 웰터급 선수로 운동을 했고, 전국대회에 나가서 입상을 하기도 했다.

그가 훗날 레슬링협회 회장이 된 것이나 비인기종목이었던 레슬링을 88서울올림픽 때는 금2, 은 2, 동5개라는 메달밭으로 가꾸게 된 것도 고교시절 그가 레슬링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스포츠맨십은 경영과 자주 접목된다. 93년 신경영을 주창할 당시, <심판이 없는 골프에서는 자율을, 야구에서는 팀워크를, 럭비에서는 투지를 배워야한다> 고 그는 설파했다. 그러면서 근대 5종 경기를 빗대 경영자의 5대 종목을 1.기술에 대한 지식, 2.경영에 대한 감각, 3.컴퓨터에 대한 관심, 4.제1외국어, 5.제2외국어라고 빗대어 설명하기도 했다.

일본 근로자들이 불량품을 만들지 않는 비결

일견 그는 사색적이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 그는 상당한 스포츠맨이며 그러한 자질들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길러진 것들이다. 서울 사대부고를 졸업한 이건희는 국내에서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건너간다.

와세다 유학

그의 부친 이병철은 이건희에게 다시 ‘선진국을 배우라’고 권유한다. 이병철도 와세다 대학 상과 출신이다. 1961년의 일이다. 이건희는 와세다 경영학과로 진학했다. 학창 시절 책읽기를 좋아하는데다 일본 역사에 관심이 많아 거기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도 한다. 그는 와세다 대학 시절, 일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일본에서 프로레슬러로 당대를 풍미했던 역도산도 골프장에서 자주 만났고, 사기나 절도범 중에서 전과 20범같은 최고수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연구를 했다. 심지어는 1류 야쿠자들과도 퍼블릭 코스에서 같이 골프를 치며 1년간 놀아보기도 했다. 그가 그런 부류들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느 분야에서나 톱(top)은 뭔가가 있기 때문에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결론도 내렸다.

‘1류란 자신이나 일에 대해 철저한 사람들이고, 인간미가 넘치며, 벌줄 때는 사정없이 벌 주고, 상을 줄 때는 깜짝 놀랄 정도로 준다는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암수술을 받은 뒤 처음으로 야외에 모인 가족들. 왼쪽부터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이건희 삼성 회장, 고(故) 이병철 회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 /신세계 제공
1970년대 중반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 암수술을 받은 뒤 처음으로 야외에 모인 가족들. 왼쪽부터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이건희 삼성 회장, 고(故) 이병철 회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 /신세계 제공
  

 

그렇다면 한때 일본이 상품으로서 세계를 제패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20분 정신>을 얘기한다. 일본사람들은 아침8시까지 출근하라고 하면 7시50분에 사무실에 도착해서 전화기나 팩스를 닦고 서류를 정돈하는데 비해 미국 사람들은 8시 5분에 사무실에 나타나며 한국 사람들은 8시 정각이나 플러스 마이너스 1분에 온다는 것이다. 또 퇴근 할 때도 일본사람들은 10분 늦게 퇴근하면서 그 10분 동안 기계를 닦고 정리정돈을 하고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사람은 기계의 나사를 조이다가도 퇴근시간이 되면 멈추고 가버린다. 이것이 한국과 일본, 미국의 차이라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의 출퇴근 전후의 그 <20분 정신>이 결국은 불량을 없애주고 생산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그는 그 20분을 이렇게 계산해낸다. 삼성그룹은 18만명의 직원이 있다. 그 20분을 물리적으로 계산해보면 1년에 7000명을 고용한 효과가 난다는 것이다. 이걸 금액으로 따지면 89년 당시 1000억원이다. 이건희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일본과 비지니스를 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

미국 유학시절에 차를 6번이나 바꿨던 이유

입력 : 2015.11.04 07:41 | 수정 : 2015.11.04 13:41

 

 

와세다 유학이 끝나자 이번엔 미국의 조지 워싱턴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과 부전공으로 매스컴학을 공부한다. 미국 유학 시절, 그는 자동차에 빠졌다. 이건희가 자동차와 처음 친해진 것은 7살 때, 당시 아버지 이병철이 1948년형 미국산 시보레를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6·25동란 때 공산당이 징발해 박헌영이 탔다는 바로 그 차였다.
2010년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일본 와세다 대학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에 참석했다. /뉴시스
2010년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일본 와세다 대학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에 참석했다. /뉴시스

  

자동차 대국, 미국에서 그는 차를 여섯 번이나 바꿨다. 재벌집안의 막내 아들로서의 호사취미가 아니라 차의 구조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음 산차는 이집트 대사가 타던 차였다. 50마일도 타지 않은 새 차였다. 아랍전쟁이 터져 이집트 대사가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급하게 내놓은 차를 그가 사게 된 것이다. 새 차값이 6600달러였는데 그는 4200달러에 그 차를 샀다. 서너달 그 차를 타고 다니면서 차의 구조와 특성을 파악하곤 깨끗이 분해소재한 후 600달러를 남기고 팔았다. 이어 미국인이 1년도 안탄 증고차를 사서 타고 다니면서 구조를 들여다보고 다시 왁스를 먹이고 청소한 후 또 팔았다. 그런 식으로 1년반 동안 차를 여섯 번이나 바꿨다. 돈도 600~700달러쯤 벌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의 구조에 관해 점점 전문가가 되어갔다. 그의 이런 엔지니어로서의 자질은 그 후 삼성이 중요기술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상당한 작용을 했다. 말하자면 반도체를 스택(위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할 것인가, 트렌치(파고들어가는) 방식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단안을 내린 것도 그 자신이었고, 핸드폰의 크기, 단추의 위치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제시, 소위 <이건희 폰>을 만든 것도 그 자신이었다. 그는 또 방송사에서 송출된 화면이 TV수상기에 비춰질 때 화면 좌우에서 각각 8mm씩 잘려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개선을 지시, <숨겨인 1인치를 찾았다>는 광고문안으로 유명한 명품 플러스 원 TV를 탄생시켰다. 그는 경영자 시절, 세계적인 가전 회사들의 신제품이 나오면 곧바로 사서 뜯어보고, 다시 재조립한다.

이건희는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기계광이다. 그의 서가엔 경영학 서적보다 전자, 우주, 항공, 자동차, 엔진공학, 미래공학 등의 책이 더 많다. 훗날 67년부터 87년까지 선대 회장 밑에서 경영수업을 받을 때도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던 그는 퇴근 후에는 기계와 씨름했다. 전자제품이나 각종 기계를 분해해보고 다시 조립하면서 그 기능과 성능을 공부했다. 기술관련 서적도 숱하게 보았고, 그래도 잘 모를 경우엔 아예 일본기술자를 집으로 불러 직접 설명을 들었다. 그의 집을 다녀간 일본 기술자만도 수백명이었다. 그러한 노력 덕택에 그는 전자부품의 소소한 기능까지도 두루 꿰고 있다.

이건희의 미국 유학은 세계 최강국, 미국의 힘에 대한 탐구의 시간이었다. 미국이 강한 것은 ‘달걀을 품어 알을 까려는’ 에디슨과 같은 사람들이 원천기술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에디슨처럼 지금까지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함으로써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술을 창조해낸다. 그것이 미국의 힘이다. 판을 새로 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미국은 상상력을 허용하는 사회이다. 반면에 일본은 원천기술을 응용한 생산기술의 대국이다. 일본과 미국에서의 유학 경험이 오늘날 삼성전자가 첨단과학으로 무장한 반도체, 휴대폰과 LED TV를 만들어 새로운 판을 짜고 자기 씨름판을 스스로 만든 원동력이 된다.


아버지 이병철 회장에게서 경영수업을 받다

입력 : 2015.11.04 07:42 | 수정 : 2015.11.04 09:33
  • 스크랩 메일 인쇄
  • 글꼴 글꼴 크게 글꼴 작게

 

<①편에서 계속>
자, 이제 이건희의 공부의 계절은 끝난다. 현업이 기다리고 있다. 68년 12월, 그는 비로소 공식적으로 첫 직장 중앙일보, 동양방송에 입사한다. 대학원에서 그의 부전공이 매스컴학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직책은 동양방송, 중앙일보의 이사. 본격적으로 부친인 이병철 회장과 장인인 홍진기 동양매스컴 회장으로부터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부친이 주재하는 모든 경영회의에 말석에 껴서 참석하고, 아버지의 골프 라운딩에도 따라 다니면서 부친과 라운딩하는 인사들이 나누는 대화를 경청한다. 이 실전 수업은 부친이 타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나 특이한 것은 74년 그는 동양방송 이사의 자격으로 부친인 이병철 회장에게 반도체 산업에 진출할 것을 건의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병철 회장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반도체 산업은 1개 라인을 건설하는데 1조5000억원(2000년 기준)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만큼 그에 대한 리스크가 워낙 크고, 공정과정이 500여과정이 될 정도로 복잡한데도 단 한군데도 불량이 없어야 하며, 1평방 미터 안에 현미경으로 보았을 때 한 개의 먼지도 존재하지 않는 초청정 기술이 필요한 사업이었다. 말하자면 반도체 사업은 삼성이 그때까지 해왔던 기존의 사업과는 그 개념부터 다른 사업이라고 이병철은 판단했던 것이다.

자신의 건의가 무산되자 그후 이건희 이사는 사재 4억원을 털어 부천의 한국반도체라는 작은 회사를 스스로 인수한다. 그후 불과 10년이 채 안된 83년에 삼성은 본격적으로 반도체 개발에 나서게 되고, 삼성의 반도체 산업은 한국을 먹여살리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는 업종으로 발전한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기공식에 참석한 이건희 삼성 회장(왼쪽에서 두번째). /조선일보 DB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기공식에 참석한 이건희 삼성 회장(왼쪽에서 두번째). /조선일보 DB
삼성의 부회장이 되다

이건희가 삼성의 후계자로 공식거명된 것은 77년8월 이병철 회장이 <닛케이(日經) 비지니스>와 가진 인터뷰가 최초이다. 이병철 회장은 그 인터뷰에서 <3남 승계>를 최초로 밝히고 공론(公論)화했다. 이로써 삼성의 후계자가 3남 이건희 임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본격적인 차기 계승자 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78년, 그가 삼성의 부회장이 되어 첫 출근하던 날, 이병철 회장은 그를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붓을 들어 직접 경청(傾聽)이라는 휘호를 해주었다.

경청. 즉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이야말로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로서의 금과옥조임을 강조한 것이다. <경청>이라는 부친의 가르침때문인지 이건희는 사장단 회의 때나 보고를 받을 때 대부분 듣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주로 듣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지금도 그의 좌우명 중의 하나가 <좋은 경청자가 되자>이다. 하지만 한 번 말을 시작하면 3-4시간은 기본이고, 10시간을 얘기할 때도 있다. 단 그가 말을 꺼냈을 때는 철저한 사전 검증을 거친 경우이다. 비서들이나 구조조정본부 등에 조사를 시키고 그 보고서를 검토한 후 다시 그 자신이 직접 각계의 전문가를 만나 의견을 들은 후 지시를 내리기 전에 스스로에게 최소한 여섯 번 이상 ‘왜?’냐고 묻는다. 그의 여섯 번의 <why>는 ‘왜 그 사업을, 왜 그 곳에서, 왜 그 시기에, 왜 그사람으로 하여금, 왜 그만한 돈을 들이고, 어떤 목적으로 하느냐’ 하는 것 등을 생각한다고 볼 수 있다.

이건희는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조사시키고 분석한 후 자신이 답을 스스로 찾고나서 열번 정도 더 생각한 후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 한다. 그만큼 철저한 검증을 거친다는 말이다. 그는 돌다리도 두드리면서 걷는다는 그의 선친보다도 한술 더 뜬다. 이런 그의 사전검증은 이병철 회장 밑에서 경영수업을 받으면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건희는 78년부터 이병철 회장이 서거한 87년까지 햇수로 약 10년간 그러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병철과 이건희의 같은점과 다른점

입력 : 2015.11.09 07:34 | 수정 : 2015.11.09 07:35
  • 스크랩 메일 인쇄
  • 글꼴 글꼴 크게 글꼴 작게
1987년 11월19일, 이병철 회장이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38년 대구에서 과일과 건어물을 취급하는 삼성상회로 출발해서 1987년 작고할 때까지 37개 기업을 거느린 삼성그룹을 50년 가깝게 경영해온 경영의 달인이 세상을 뜬 것이다. 그가 50년간 기업경영 일선에서 얻은 교훈은 남의 말을 잘 듣는 경청과 목계였다. 이병철은 자본금 3만원으로 시작했다. 창업 49년후인 1987년 삼성그룹은 자본금 6310억원에 수출은 11억2500만불, 총매출액은 17조4000억원이었다. 경상이익 2668억원에 종업원 16만 596명으로 키운 삼성그룹의 바톤을 이병철은 이건희에게 넘겼다.

이건희는 이병철 스쿨의 수제자이다. 이병철은 살아 생전에 한국을 대표하는 수많은 기업인들을 길렀다. 그는 ‘인재제일’이라는 그의 기업관에 의해서 20-30년간에 걸쳐서 인재를 길렀고, 그들을 활용했다. 이병철과 이건희는 공통점도 있지만, 다른점도 많았다.
이병철 삼성 설립자. /조선일보 DB
이병철 삼성 설립자. /조선일보 DB
우선 공통점. 이병철 회장은 한 번 연구해야할 사안이라고 생각하면 아예 끝장을 낼 정도로 지독한 편집증이 있었다.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기전 그는 반도체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의 연구는 조직적이고 치밀했다. 연구해야할 사안이 발생하면 우선 관련서적을 최대한 수집해서 꼼꼼하게 읽어본다. 이어 해당 사안에 대해 정통하고 나름대로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기자나 교수들을 식사에 초대하여 얘기를 나눈다. 그것도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 따로 만나서 연구사안에 대한 사정을 소상히 파악했다. 그후 해당분야 사업가를 만나 실제 사정을 들은 후 나름대로 사업구상을 하고나서 구체적인 검토 내용을 비서실에 지시했다. 그는 입안(立案)에서부터 실시까지 그 과정을 지시하고 점검했으며,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에버랜드를 만들 때도 세계 일류의 테마파크를 모조리 조사시켜서 그걸 검토해본 후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제일모직이 와이셔츠를 만들 때도 전세계 명품 와이셔츠를 150장이나 구해서 매일 하나씩 입어본 사람이 이병철이었다. 이병철이 진출한 모든 신규사업은 철저한 검토와 검증 끝에 이루진 것들이었다. 이건희도 연구라면 부친과 막상막하이다. 그도 취미가 연구인 사람이다. 자동차, VTR, 핸드폰 등 기계 뜯어보기에서부터 금융실명제 연구 등 기업경영과 기술에 대한 연구는 말할 것도 없고, 개 기르기, 골프장 조성, 자동차 수집, 승마, 비단잉어, 히노키(檜)나무, 일본역사 등 연구범위가 다양하다. 그것도 아마추어 수준이 아니라 모두 끝장을 보는 타입이다.

이병철, 이건희 두사람 모두 어떤 사안에 대해서 대충대충 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그러나 이병철과 이건희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 결정적인 차이는 인재제일과 품질제일이다. 이병철은 기업도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인재를 제일로 쳤다. 그러나 이건희는 인재보다는 품질을 제일로 친다. 인재도 결국은 좋은 품질을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 이병철 회장이 카리스마가 강하고, 정확하며, 현실을 중시하는 스타일인데 비해 이건희는 사고가 유연하며, 융통성이 있고 미래지향적이다.

87년12월1일, 호암 아트홀에선 삼성그룹 신임회장의 취임식이 있었다. 관객석을 1천3백여 삼성의 임직원들이 가득 메웠고, 신임 회장인 이건희는 복도중앙을 걸어나가 단상에 올랐다.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지 20일이 갓 지났을 때였다. 이건희는 사장단의 추대형식으로 삼성그룹의 승계를 인정받았다. 단상에 신현확 삼성물산 회장과 그룹 사장단 전원이 배석한 가운데, 이건희는 거기서 입사 최고참인 삼성중공업의 최관식 사장으로부터 삼성그룹의 사기(社旗)를 물려받음으로써 경영의 대권을 쥐었다. 부친을 여윈지 며칠되지 않아서 취임사를 읽는 그의 목소리는 매우 떨렸고, 때로 울먹이기까지 했다. 분위기는 매우 가라앉아 있었으며 숙연하기 까지 했다.
46세. 젊은 총수의 취임이었다. 취임식이 끝나고 사장단과의 식사가 있은 후 이건희와 사장단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108-1의 고 이병철 회장의 자택으로 가서 고인의 상청 앞에서 명복을 빌었다. 그후 1년2개월간 시간이 날 때마다 국내 재계의 선배들은 물론 미국 제네럴 일랙트릭의 잭 웰치 회장 등 전세계의 대기업 회장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바쁘게 87년 12월 한달이 지나고, 88년이 되었다. 88년은 그가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 삼성이란 대그룹을 직접 경영해본 첫 해이다.

또 1988년은 삼성의 창립 50주년이 되던 해였다. 그해 3월 이건희는 <제2의 창업>을 선언한다. 그는 제2의 창업으로 신규사업 추진과 사업구조를 재편하겠다고 발표했다. 신규사업 추진이란 우주항구, 월면기지, 화성기지 건설 등을 현실화하기 위한 우주항공 산업으로의 진출과 유전공학, 고분자 화학 등의 진출을 말한다. 사업구조 개편은 그때까지 분리되어 있던 전자와 반도체, 통신을 하나로 합병하는 것이다.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나름대로의 판단이었다. 바로 이때의 구조 개편이 오늘날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가전, 반도체, 정보통신 메이커로서 자리잡게 된 시초라고 볼 수있다. 그러나 이건희 체제 하의 삼성의 구조개편은 생각만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우선 벽이 두터웠다.
총수를 물려받은 시절의 이건희 회장. /조선일보 DB
총수를 물려받은 시절의 이건희 회장. /조선일보 DB

“회장으로 취임한 이듬해 제2창업을 선언하고 변화와 개혁을 강조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50년 동안 굳어진 체질이 너무도 단단했다. 내가 제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19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체중이 10Kg 이상 줄었다.”

당시 그의 고백 중의 하나이다. 그가 여기서 얘기한 <굳어진 체질>은 무엇이고, 그는 무엇 때문에 당시 한국 제일의 기업 삼성이 ‘사그러질 것같은’ 위기감을 느꼈던 것일까. 당시 삼성은 선대의 이병철 회장이 거의 50년간에 걸쳐 경영해오면서 나름대로 한국 최고의 기업이라는 성취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취임한 이건희의 눈으로 볼 때 삼성은 국내에서 최고라는 안일함에 빠져 자만감에 도취해있던 기업이었다.

이병철 회장의 시대에는 모든 지시가 회장실로부터 내려왔고, 그걸 각 계열사가 실천하는 전형적인 상의하달식의 경영이었다. 또 사장단에 대한 문책도 이병철 회장 자신이 직접 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작고한 이병철 회장은 대단한 메모광이었다. 그의 메모 수첩에는 그날 해야할 일, 어제까지 미결된 일, 알아보아야 할 사항, 재확인 해야 할 사항, 점심식사를 같이 해야 할 사람, 전화해야 할 곳, 방문할 곳, 구입할 물건, 상을 줄 사람, 벌을 줄 사람, 구입해야 할 책의 제목, TV와 신문에서 본 자료 요약 등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그는 사람과의 면담시간을 사전에 정해놓고 꼭 그 시간만큼만 면담을 했다. 스위스 시계보다 더 정확하게 평생을 산 기업가가 이병철이었다. 돌다리도 두드려서 건너는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스타일이었던 그는 자신의 경영을 돕기위한 분신으로 비서실이라는 대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삼성의 비서실은 80-90년대 한국 최강의 정보분석조직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일도 잘했지만, 그만큼 권한도 강했다. 그러나 이건희는 그룹 비서실의 개혁없이는 삼성의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그 비서실의 책임자는 소병해였다. 소병해는 이건희와 동갑으로 이병철 회장 시대에 그를 12년간이나 보필해온 최고의 가신.

이건희는 3년 탈상 시점인 90년12월 소병해 비서실장을 삼성생명 부회장으로 전격적으로 전출시키고, 신임 비서실장에 사대부고 4년 선배이자 제일제당, 제일합섬, 삼성생명의 사장을 지낸 이수빈씨를 기용한다. 이른바 친정체제의 구축을 시작한 것이다.

마쓰시타의 VTR 제품을 사서 분해해 본 뒤 깜짝 놀라다

 

입력 : 2015.11.11 06:33 | 수정 : 2015.11.11 06:34  
                      
개혁과 도전

이건희의 개혁의 초점은 비서실의 기능이 회장의 상의 하달과 관리에 치중해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삼성을 병들게 했으므로 그걸 개혁하자는 것. 당시 삼성의 주력기업이었던 제일제당이나 제일모직 등에서는 전년보다 물건을 얼마나 더 많이 생산해서 판매했는가가 주관심이었다. 당시는 설탕이나 양복지 등이 만들면 팔리던 시절이었으므로, 양으로서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었다.

물건의 질보다는 양 위주의 물량적 사고방식이 팽배해있다는 것도 삼성 조직의 문제점으로 파악되었다. 계수가 늘어나는 것은 뭐든지 좋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고가 50년간 삼성을 암암리에 지배해오고 있었다. 88년에 회장에 취임하면서 <제2의 창업>을 선언했지만, <제2의 창업>이 문제가 아니라 당시의 삼성은 근본적으로 고쳐야 할 문제점을 수도 없이 안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의 이건희 회장. /조선일보 DB
젊은 시절의 이건희 회장. /조선일보 DB
이런 일도 있었다. 91년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이건희 회장은 일본의 마쓰시다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마쓰시다의 VTR 생산라인을 둘러본 후 이건희 회장은 마쓰시다의 VTR신제품을 하나 구해서 그걸 분해보았다. 분해해본 결과 마쓰시다 즉 내셔날의 VTR제품은 화질, 선명도 및 화면 해상도, 스타트 시간 등이 삼성전자의 제품보다 월등히 우수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품질은 우수한데 부품수는 오히려 삼성제품보다 30%가 적다는 것이었다.

이 회장은 그 즉시 이수빈 그룹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일간의 기술격차가 이렇게 큰 상황에서 향후 유통시장 개방시 소니, 마쓰시다 제품이 상륙할 경우 그에 대한 대응책이 마련되어 있는가를 물었다. 비서실 입장에선 별다른 대응책이 없었다. 이건희는 ‘지난 81년부터 내가 계열사 및 비서실에 지시한 내용을 모두 취합하고 그 지시사항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이행되었는지 각사별로 종합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그룹 비서실에서 파악한 81년 이후의 지시사항은 무려 284페이지나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시사항이 이행되지 않고 상당부분 실종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실망이 컸다. 91년 12월 5일의 사장단 회의에서는 이런 내용도 나왔다.

‘기술을 강조했더니 효율은 무시한 채 사람 머릿수와 연구개발비를 무턱대고 늘리고 개발과제도 지나치게 방만하게 펼쳐 외형적이고 전시적인 기술중시에 치우치고 있다.’

이건희 회장 자신이 엔지니어 이상으로 기술을 잘 알다보니 지시사항은 쌓이고 기술부서에서는 그 지시사항을 이행하느라 태스크 포스팀을 자꾸 신설하게 되고, 그럴 듯하게 겉포장만 흉내내는 일들이 빈발해지자 사장단을 질책한 것이다. 연구원 수는 많이 늘어났는데도 막상 진행되는 일은 별로 없고, 새로 만든 기술도 실용성이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그러다보니 비용부담만 늘어나고, 회사 자체의 수익구조가 나빠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90년도에는 2500억원의 순익을 기록했던 삼성이 91년도에는 매출은 늘어나는데도 순익은 감소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90년, 91년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건희가 회장으로 취임한 88년 이후 계속 반복되어 오고있는 현상이었다


"삼성전자는 암 2기, 삼성종합화학은 선천성 불구기형..."

게다가 사원들의 의식구조도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시대는 국제화로 가고 있는데, 사원들의 의식은 아직도 국내시장 1등에 만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예컨대 사원을 해외에 파견할 때도 유능한 사원을 시장잠재력이 큰 후진국에 파견해야 하는데 실제로 유능한 사원은 이미 시장의 기반이 다 잡힌 선진국으로 파견되고, 후진국에는 오히려 실력이 떨어지는 사원이 파견되는 등 인사의 난맥상도 있었다. <제2창업> 시기 5년간 이건희의 눈에 비친 삼성은 생각보다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병철은 <집권조직>의 상징이었으나, 세상은 <분권조직>의 시대로 가고 있었다.

미국은 이미 1920년대에 그것이 이루어졌고, 일본은 70년대에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1980년대 후반, 세상은 컴퓨터의 급속보급으로 획기적으로 바뀌고 있는데 한국의 기업문화는 철저한 톱다운 방식, 즉 집권조직의 시대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11명이 뛰는 축구에서 전원이 다 잘 뛰어야 게임을 이길 수 있는데, 감독만 혼자서 잘 뛰었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삼성의 문제점이었다.
삼성전자 임원들에게 지시하는 이건희 회장. /조선일보 DB
삼성전자 임원들에게 지시하는 이건희 회장. /조선일보 DB
인재 중시에서 품질 중시

93년1월부터 삼성은 <바꾸자 경영>을 선언한다. 93년 1월 한달동안 그는 <바꾸자 경영>을 위한 자신의 생각을 신년사를 비롯한 사장단 회의 등에서 쏟아냈다. 그해 1월4일에 있었던 신년사의 내용. 그를 위해 이건희 회장은 ‘일석오조의 경영정신으로 21세기에 꼭 해야될 사업과 안해도 될 사업을 구분해서 사업구조를 정비하고 자립경영의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87년에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후 5년이 걸려 삼성의 진면목을 이렇게 표현했다.

<삼성전자는 암2기. 삼성중공업은 영양실조. 건설은 영양실조에 당뇨병, 종합화학은 선천성 불구기형으로 타고 날때부터 잘못 태어난 회사. 물산은 전자와 종합화학을 합쳐서 나눈 정도의 병>

그가 파격적인 수사를 구사하면서 본 삼성계열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모두 중병에 걸려있는 셈이다. 그 중병을 고치기 위해 그가 선언한 것이 제 2의 창업이다. 그런만큼 93년의 이건희 회장은 아주 바빴다. 해외 출장만 68일.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마누라와 자식빼고는 다 바꾸자>, 파격적인 수사의 <신경영선언>이다. 그 신경영의 핵심 어휘는 <나부터 변하자>였다. 이른바 <바꾸자 경영>이라 불리우는 신경영의 선언은 93년 6월 7일 프랑크푸르트의 캠핀스키 호텔에서 있었다.

이미 그는 그해 2월부터 세계 대도시를 순회하면서 해외지사 사원들을 대상으로 직접 강의에 나섰다. 2월에 로스엔젤레스 회의, 3월에 도쿄회의, 오사카 회의,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두번의 회의가 있었다. 회의 중간중간에 세계에 산재해있는 삼성지사를 68일간 돌면서 1800명의 임직원을 상대로 직접 강연을 했다. 그중에 캠핀스키 호텔에서 발언해서 일약 주목을 받았던 것이 바로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캠핀스키 호텔은 세계의 대도시에 체인을 가지고 있는 최고의 현대식 호텔. 거기서 그는 삼성의 임직원 60명을 대상으로 강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