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20.07.14 00:29
광장의 분열이 재연됐다. 지난해 산 조국을 두고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쪼개진 민심이 이번에는 백선엽과 박원순, 두 사람의 죽음 앞에서 다시 갈라섰다. 쟁점은 망자를 어떻게 보내고 어떻게 모실지의 방식과 격(格)에 대한 것이다. 이는 망자의 생애에 대한 평가와 직결된다.
간도특설대 복무한 건 사실이나
이미 항일게릴라 궤멸된 뒤 부임
직접 독립군과 교전한 기록 없어
속죄인지 회피인지 분명치 않은 선택과 함께 황망히 떠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하지만 백선엽 장군의 경우는 다르다. 대한민국이 백선엽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뤄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충분히 있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아직껏 이런 소동을 빚고 있는 것이야말로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6·25전쟁 때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한 백선엽의 공(功)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과(過)가 있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공과 과의 무게를 사실에 근거해 온당하게 평가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그의 과를 집중 조명하는 사람들은 공에 눈을 감거나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공을 평가함에 있어 지나친 미화나 침소봉대가 없어야겠지만 과를 평가할 때는 더욱더 엄정하고 냉철해야 할 것이다.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과 착종돼 개인의 일생을 재단해선 안 된다. 그래서 팩트체크가 필요하다. 언제부턴가 백선엽에게는 ‘독립군을 때려잡은 악질 친일파’란 낙인이 찍혔다. 그의 부고가 전해진 뒤 인터넷 공간을 부유하는 댓글들 속에서 그 낙인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논리는 간단하다. ①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다 ②간도특설대는 독립군을 소탕한 부대다 ③고로 백선엽은 독립군 때려잡은 친일파란 결론이다. 하지만 이 논법에는 큰 흠결이 있다. ①과 ②의 시점(時點)에 대한 혼선 때문이다.
흔히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독립군, 즉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 무장세력은 1920년대에 대부분 만주를 떠나 중국 대륙 내부로 이동했다. 30년대 만주의 항일투쟁은 중국 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동북항일연군이 주축이 됐다. 김일성과 최현(최용해의 부친) 등의 조선인 부대도 항일연군에 편입됐다. 일제는 1939년부터 2년반 동안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동원해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간도특설대도 이 작전에 투입됐다.
백선엽 소위가 간도특설대에 부임한 건 1943년 2월이다. 이미 항일연군이 궤멸되고 김일성 등 조선인 잔여 세력은 1940년 소련으로 도피한 뒤였다. 그런 이유로 백선엽은 간도 근무 시절 순찰활동만 했고 교전은 없었다고 회고록에 썼다. 2009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작전 대상이 눈앞에 나타나는 일이 없어 정보 수집이나 민간인 상대의 선무 공작활동을 한 정도”라고 했다. 백선엽을 친일파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2009년)나 연구자료에도 백선엽이 구체적으로 독립군을 소탕한 사례는 안 나온다. 따라서 1938년 창설된 간도특설대가 한 모든 일을 43년 부임한 백선엽에게 전가해 ‘독립군을 때려잡았다’는 낙인을 찍을 수는 없다.
하지만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해 일제 군대의 일원이 됐다는 건 지워지지 않는 백선엽의 원죄다. 만일 그 시기가 좀 더 빨랐더라면 백선엽도 항일연군 소탕전에 동원돼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눴을 수도 있다.
다만 백선엽은 1920년에 태어난 식민지 청년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제가 강요한 교육을 받고 공무원이나 교사가 된 사람, 또는 일본 기업(태평양전쟁이 터진 뒤 다수는 전범 기업이 된다)에 취업한 부지기수의 청년들을 옥석 가리지 않고 모두 친일파로 내몰 수는 없는 법이다. 역사의 평가는 냉철하고 엄정해야 하지만, 여기에도 정상참작의 여지는 남겨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물며 해방된 조국에서 그가 남긴 공적의 평가에 인색할 필요는 없다. 공과 과는 역사의 저울에 올려 한 치의 오차 없이 형량(衡量)해야 한다.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영준 논설위원
[출처: 중앙일보] [예영준의 시시각각] 백선엽 과연 독립군 때려잡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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