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Why] 25만원에 청부살인 가능한 필리핀… 한국인들 총맞는 까닭

Shawn Chase 2015. 11. 1. 00:14

마닐라·앙헬레스=강훈 기자

 

입력 : 2015.10.31 03:00 | 수정 : 2015.10.31 03:38

3년새 한국인 31명 피살 왜?… 마닐라·앙헬레스 현지 취재

안하무인 어글리 코리안
욕설 퍼붓고 자존심 긁고… 일부 관광객 도넘은 갑질
술집 종업원 뺨 때렸다가 남자 친구의 총에 맞기도

조폭 등 수배범 도피처
카지노 임차 영업하거나 유흥업 벌이다 잦은 다툼
교민들 "현지인보다 한국인 여행객 더 무서워"

최근 3년간 필리핀에서 한국인 31명이 피살됐다. 사건이 잦다 보니 경찰청장으로는 처음 강신명 청장이 다음 달 5일 필리핀을 직접 찾아 대책을 찾아본다고 한다. 하지만 현지 취재 결과, 필리핀에서 앞으로 더 많은 한국인이 강력범죄에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점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지난 27일 밤 필리핀 최대 환락가인 앙헬레스의 ‘워킹 스트리트’. 이곳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코리아타운에선 최근 2년간 한국인 사업가 3명이 청부살인을 당했다.
지난 27일 밤 필리핀 최대 환락가인 앙헬레스의 ‘워킹 스트리트’. 이곳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코리아타운에선 최근 2년간 한국인 사업가 3명이 청부살인을 당했다. /앙헬레스=강훈 기자
위험에 스스로 노출되는 한국인들

지난 26일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100㎞ 떨어진 앙헬레스의 코리아타운. 한인 식당은 물론 떡집, 전당포, 약국, 병원 등 한국어 간판을 단 200여개 업체가 영업 중인 곳이다. 이곳에서 작년부터 올해까지 3명의 한인이 총에 맞아 숨졌다. 얼마 전엔 이곳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수비크 해안에서 시신이 발견됐으며 그 역시 앙헬레스에 사는 한인이었다. 그런데 현지 교민들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대부분 사고가 날 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지난달 이곳에서 숨진 현지 사업가 박모씨가 운영하는 호텔은 현지 경찰조차 접근이 어려웠다. 그가 죽자 호텔에 자금을 댔다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과 박씨 측근, 공사 대금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현지인들이 뒤엉켜 충돌 일보 직전 상황이었다. 현지 경찰은 "청부살인은 확실한데 배후를 아직 찾지 못했다"고 했다.

석 달 전 마닐라 남쪽 카비테 지역 주택가에서 60대 나모씨 부부는 여러 발의 총알을 맞고 숨졌다. 이 부부는 자동차 대금과 집 공사 문제로 필리핀 현지인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아왔다. 필리핀 경찰 수사 지원을 위해 한국에서 파견된 '코리안 데스크' 서승환 경감은 "살인 사건을 조사해보면 대부분 한국인끼리 혹은 필리핀 현지인과의 오랜 갈등과 원한 관계가 있다"고 했다. 앙헬레스의 한 한인 식당 주인은 "현지인들이 대부분 순박해서 서로 잘 지내면 위험한 곳이 아니다"고 했다.

'어글리 코리안'이 문제

지난 24일 밤 1시 유흥가가 밀집한 마닐라 말라테 지역의 한 유흥주점. 만취한 한국인 손님 4명 일행 가운데 한 명이 여종업원에게 한국말로 "이 ○○년, 왜 (2차) 안 나가? ○테 둘렀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곳은 여종업원들이 '2차'를 가지 않는 업소인데도 호텔 동행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소란해진 테이블로 필리핀 지배인이 다가오자 일행 중 다른 한 명이 대뜸 "야, 넌 뭐야. 원숭이 ○들이 왜 이리 뻣뻣해"라고 소리를 질렀다. 결국 이들은 주점 보안요원들에게 끌려나갔다. 주점 여종업원은 "가끔 보는 일"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인근 다른 주점에선 술집 여종업원의 뺨을 때린 한국인이 여종업원 연락을 받고 온 남자 친구가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현지 교민들과 가이드들이 "현지인을 자극하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하지만, 한국인의 추태는 반복되고 있다.

술집뿐만 아니다. 한국인이 많이 찾는 카지노에서도 현지인을 비하하는 광경은 자주 목격된다. '솔레어 카지노'의 블랙잭 테이블에 앉은 50대 남성은 돈을 잃자 여성 딜러에게 "빨리 패 돌려. ○○" "이 ○년 때문에 대체 얼마 잃은 거야?" "넌 얼마면 되냐" 등 말마다 욕설을 섞었다. 게임은 영어로 진행되지만 그에게서 영어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테이블을 떠나면서도 "재수 없는 년"이라고 내뱉었다. 카지노의 한 딜러는 "표정만 보면 우리 욕하는 거 다 안다"면서 "대부분 한국인들이 매너 좋고 착한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점잖던 한국인들도 필리핀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마치 자신이 점령군인 양 행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마닐라에서 20년간 사업을 하는 교민 김모씨는 "유럽이나 미국에선 기 못 펴는 사람들이 필리핀에 오면 목소리부터 커진다"며 "50년 전만 해도 필리핀은 우리를 돕던 아시아 강국이었다.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위는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필리핀은 6·25전쟁 당시 미국, 영국 다음으로 규모가 큰 7000여명의 장병을 파병한 혈맹(血盟)이었고, 1960년대 국내 첫 실내체육관인 장충체육관과 세종로 미국 대사관 건물을 지을 땐 기술 지원을 해줄 정도로 한국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500년간 스페인과 미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국민들은 온순하고 참는 데 익숙하며 외국인들에게 매우 친절한 편이다. 이원주 전 필리핀 한인총연합회장은 "한류(韓流) 영향으로 한국 호감도가 높은 편이지만, '어글리 코리안'까지 포용할 만큼 넉넉한 곳은 아니다"라고 했다.

우범 지대가 많은 마닐라 말라테 지역에 우리 정부가 만들어 준 필리핀 파출소. 마닐라에만 교민 5만명이 있으며 전체 필리핀 교민은 10만명이 넘는다. 

 

우범 지대가 많은 마닐라 말라테 지역에 우리 정부가 만들어 준 필리핀 파출소. 마닐라에만 교민 5만명이 있으며 전체 필리핀 교민은 10만명이 넘는다. /마닐라=강훈 기자

 

 

한인들도 한국인 여행객이 무서워

마닐라에 오래 살았던 교민들은 "요즘은 현지인보다 필리핀에 오는 한국인이 더 무섭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23일 오전 인천발 마닐라행 비행기 비즈니스 좌석 손님 9명 가운데 5명은 건장한 체격에 짧은 스포츠 머리를 한 20~30대 남성들이었다. 그중 3명의 팔뚝엔 문신이 있었다. 다른 해외 노선의 비즈니스석에는 중년의 기업인이나 회사 중역, 귀부인들이 앉아 있지만 마닐라행 비행기는 손님 구성부터 조금 다르다.

필리핀엔 국내에서 죄를 저지르고 도피한 조직폭력배 등 전과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조용히 숨어 있는 게 아니라 대부분 현지에서 또 다른 사업을 한다. 주로 카지노 일부를 임차 영업하는 '정킷'을 차리거나 유흥업이나 임대 사업 등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조직들끼리 서로 싸우고 대립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경찰 조사 결과, 작년 4월 앙헬레스 F호텔 앞에서 살해된 허모씨는 사업 갈등 중에 있던 다른 한국인이 청부살인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닐라 한인회 관계자는 "정착하려는 사람은 적고 임시방편 혹은 도피처 삼아 필리핀을 찾는 한국인들이 많다"면서 "이런 '뜨내기' 한국인들은 현지 융화는커녕 현지인들을 미개인이나 하인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사건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필리핀은 총기가 범람하는 곳이다. 총기 소유와 휴대에 허가 절차가 있지만, 2년 전 재등록해야 할 총기 36만정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현재 미등록 상태다. 여기에 사제(私製) 총까지 더하면 100만정 이상이 시중에 나돌고 있다. 은행·상가는 물론 작은 식당이나 마트를 지키는 수십만 명의 사설 보안요원도 실탄이 들어 있는 총을 차고 다닌다.

마닐라 한인 식당의 한 보안요원은 "월급으로 9000페소(23만원)를 받는데 너무 적다"고 했다. "범죄 유혹이 많지 않으냐"는 물음에 "돈을 받고 총을 빌려주는 친구도 있다"고 했다. 실물 권총은 15만~70만원 선에 구할 수 있고, 사제 총은 마닐라 산타크루즈 차이나타운에서 7만원이면 살 수 있다. 청부살인은 10만페소(250만원) 정도에 가격이 형성돼 있다고 한다. 마닐라의 한 호텔 보안요원은 "친구의 부탁이거나 목표 대상이 나쁜 사람이라면 1만페소(25만원)에도 청부살인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수사나 처벌이 어려운 사법 시스템도 문제다. 앙헬레스 지역 코리안 데스크 이지훈 경감은 "필리핀 경찰은 수사지원비가 없어 서류 작성에 들어가는 A4 용지조차 담당 경찰관이 자기 돈으로 사야 하는데 누가 수사를 하겠느냐"면서 "사건 이해 당사자가 뒷돈을 대지 않으면 필리핀 경찰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현지 경찰만 나무랄 일도 아니다. 필리핀 재판은 수사 기록은 모두 무시하고 법정에서 진실을 가리는 철저한 공판 중심주의 제도를 따른다. 피해자나 가족이 재판에 직접 나오지 않으면 즉시 '공소권 없음' 처분이 내려져 피의자는 석방된다. 우리나라는 검사가 피해자 대신 법정에 서지만, 필리핀에선 변호사가 피해자를 대신할 수도 없다. 외국인 피해자에게 현지 법정에 와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해 마닐라에서 납치 살해됐던 여대생의 가족은 한국 경찰의 설득으로 범인 처벌을 위해 서울에서 마닐라 법정을 8번이나 출석해야 했다. 서승환 경감은 "범인을 잡아도 처벌이 쉽지 않은 곳"이라면서 "돈 많은 범죄자들은 재판을 8~10년씩 끌면서 피해자나 핵심 증인들이 지쳐서 재판을 포기하게 하는 수법을 사용한다"고 했다. 경찰이든 법원이든 '뒷돈'으로 처벌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경찰청에서 파견한 코리안 데스크들이 맡은 역할은 한국인 사건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도록 현지 경찰들을 물심양면 지원하는 게 주된 임무이다.

이런 수사·재판 시스템으로 온라인 도박과 같은 음지(陰地)의 사업을 필리핀에서 벌이려 는 한국인도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 필리핀 정부가 마닐라를 '제2의 마카오'로 만들려고 세계 유수의 카지노를 속속 유치하고 있어, 국내 폭력조직이나 특별한 사업 아이템이 없는 한국인들에겐 '기회의 땅'이 되고 있다. 필리핀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한 교민은 "돈은 몰려오지, 비정상적인 한국인은 많지, 앞으로 한국인 강력 사건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