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치

[이기홍 칼럼]‘합법’ 외투 쓴 점입가경 폭주

Shawn Chase 2020. 1. 10. 23:40


이기홍 논설실장입력 2020-01-10 03:00수정 2020-01-10 10:02

선거법·공수처 이은 ‘檢 인사’ 강행
어느 정권도 엄두 못낸 일방 독주 극치
‘혁명’ 착각 또는 檢수사 두려움 산물
조국 임명 강행 이어 또다시 惡手될 것
“검찰 인사, 형평성-균형 맞춘 것”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 추 장관은 검찰 고위급 인사와 관련해 “가장 형평성 있고 균형 있는 인사”라며 “검찰총장이 (인사 관련 의견을 개진하라는) 저의 명을 거역한 것”이라고 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우리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정권을 겪고 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어느 정권도 요즘 문재인 정부처럼 자신들이 원하는 걸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진 않았다. 이를 과감한 개혁추진이라 부를지, 폭주·독재라 부를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제 검찰 인사를 통해 문 대통령은 밀어붙이기의 신기록을 경신했다. 온 국민이 주목하고 있는데도, 설마 했던 일들을 과감히 해낸다. 그 심리에 대한 정치학자들의 해석은 둘로 갈렸다.

하나는 혁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착각의 발로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두려움의 발로, 즉 이렇게라도 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의 발로라는 해석이다.



문 대통령이 자신을 ‘혁명 대통령’이라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그제 문화예술인 신년인사회에서도 “지금 전 세계가 극우주의나 포퓰리즘의 부상 때문에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는데 우리는 촛불혁명으로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워 전 세계가 경탄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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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많은 이들이 걱정하는 게 바로 문재인 정부가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으로 흘러간다는 우려인데, 대통령은 정반대로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켰다고 자주 강조하지만 오히려 ‘4+1’을 통한 선거법과 공수처법 강행 등 의정 농단, 그리고 이번 검찰 인사에 이르기까지 집권세력의 행태야말로 심각하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훼손시키고 있다.

만약 문 대통령이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젖어있다면, 사법개혁 적임자(조국)를 쫓아낸 검찰을 반(反)개혁, 수구적폐의 잔재로 여겼을 테고, 따라서 ‘윤석열 사단’ 해체는 반드시 필요한 역사적 결단이라고 자평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기득권 세력이 된지 오래면서 ‘주류세력 교체’를 외치는 시대착오적 여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인사들도 특수수사·공안 등 검찰 내 기득권 세력을 물갈이한 인사라고 정당화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집권세력 내 운동권 출신 참모들은 변혁운동의 관점에서 주류세력 교체, 구(舊)질서 해체가 중요하지 그 과정에서 짓밟히는 숙의민주주의의 가치는 염두에도 없을 것이다.


또 하나의 관점은 두려움의 발로라는 해석이다. 즉, 권력을 빼앗기면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된다는 콤플렉스 때문에 정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선거법을, 빼앗겨도 안전할 장치로 공수처를, 그리고 지금 당장 목을 겨누는 수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검찰 인사라는 칼을 휘둘렀다는 해석이다.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과 유재수 감찰 무마의 진실은 청와대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과 정권 실세들이 정말 무관하다면 그런 떳떳함을 공명정대하게 입증받기 위해서라도 검찰 수사를 격려했어야 정상이다. 수사팀을 무력화시키는 인사는 뭔가가 있으니 저런다는 의혹만 증폭시킬 뿐이다.


만에 하나 그런 의혹 사건들에 대통령이나 실세들이 조금이라도 개입돼 있다면 이번 검찰 인사는 수사 방해에 해당해 훗날 엄청난 후과를 가져올 수 있다.

집권세력은 항상 ‘합법’을 들먹인다. 합법적 인사권, 합법적 의사진행, 다수결 등등…. 법에 적시된 내용을 지켰다는 것인데, 법은 그 조항 자체가 전부가 아니다. 그 조항이 만들어진 취지와 그것에 반영된 선례 관습 경험을 모두 존중해야 한다. 취지와 선례 관습 경험을 짓밟은 채 활자화된 내용 자체만 지키는 건 형식적 합법을 빙자한 실질적 독재다. 쿠데타로 집권한 5공 세력조차도 일단 군복을 벗은 뒤에는 형식적 법절차를 밟는 모양새를 갖췄지만 전두환 정권 7년을 민주주의·법치주의였다고 평가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나마 요즘엔 그런 법적 요건과 절차마저도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분위기다. 위헌소송이 걸려도 헌재나 대법원에 내 편을 다수 포진시키면 되고, ‘가진 자 대(對) 덜 가진 자’ 프레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떠나지 않을 노조·좌파단체 등 콘크리트 지지층과 강력한 지역 기반이 집권세력의 자만심을 키워주고 있다.


중도층은 어차피 자유한국당으로 가지 않고 떠돌 테고 선거에 임박해 선심 복지와 남북평화 이벤트 등으로 다시 붙잡을 수 있으며, 여론 선동력과 이벤트 기획 연출력도 최고 수준이라고 자신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베네수엘라가 아니다. 조국 사태 때 보여줬듯 한국의 중도층은 결코 맹목적이지 않다. 권력의 뻔뻔함이 도를 넘으면 그 어떤 당의정(糖衣錠)으로도 그 역겨운 냄새를 감출 수 없다.


문 대통령은 조국 임명 강행에 이어 이번에 또다시 좌파 진영의 가치 토대를 약화시키는 악수(惡手)를 뒀다.

당장은 조국 아들 입시 비리를 ‘관행’이라고 옹호하는 민주당 영입 인재가 상징하듯 ‘집단적 확증편향’ 분위기 속에서 찬가가 울려 퍼지겠지만, 장기집권을 꾀하는 좌파 전략가들은 한숨을 내쉬고 있을 것이다. 훗날 운동권 내부에서는 문 대통령이 진보 진영 전체가 아니라 정권 핵심 몇몇을 살리려다 무리수를 뒀다는 준열한 내부 비판이 나올 것이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