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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 핵심 서울대 82학번 집중탐구 “조국은 ‘운동’ 열심히 안 한 半운동권”

Shawn Chase 2019. 9. 22. 12:38
송홍근 기자 |입력 2019-09-22 07:58:00

● 서울대 82학번 별칭은 ‘똥파리’
● 元, 수업 일절 안 듣고 지하서클 활동
● 羅, 曺가 노트 빌린 모범생
● 주체사상 받아들인 첫 세대
● 도덕적 헤게모니 쥐고 NL· PD 정립

똥파리.’

서울대 82학번 별칭(別稱)이다. 앞선 학번들이 82학번을 그렇게 칭했다. ‘82’를 소리 내 읽으면 ‘파리’인 데다, 82학번이 떼 지어 몰려다닌다고 해 ‘똥파리’가 됐다. 서울대는 그해 넘쳐난 신입생으로 학교 시설이 부족할 정도였다. 1981년 졸업정원제가 시행되면서 입학 정원이 늘어서다.

조국 법무부 장관,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원희룡 제주지사가 ‘똥파리’다. 대학 때 조국의 별명은 ‘입 큰 개구리’. 1963년생 동기보다 나이가 두 살 어려(1965년생) 귀여운 이미지도 있었다고 한다. 82학번 동기들은 나경원을 두고는 하나같이 “공부 열심히 하던 모범생”이라고 기억한다. 그해 학력고사 수석은 원희룡이다. 원희룡과 나경원은 법대에서 같은 반이었다. 원희룡은 수석으로 입학하다 보니 수재(秀才)로 여겨져 뭘 하든 주목받았다고 한다.

“강의실 들어가는 게 죄스럽던 시기”

서울대 법대는 2학년 때 공법학과(헌법 형법 행정법 등)와 사법학과(민법 상법 등)로 나뉜다. 전통적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고시파’가 선호하는 사법학과에 사람이 몰렸다. 공법학과가 인기를 끈 적이 있는데 그게 82학번 때다. 수석으로 입학해 학생운동권이 된 원희룡이 공법학과를 선택하자 가세한 상위권 학생이 많았던 데다 ‘시국이 이런데 고시 공부나 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분위기가 공법학과로 학생들을 이끌었다.

‘강철서신’ 팸플릿을 써 ‘주사파 대부’로 불린 김영환 ‘준비하는 미래’ 대표도 ‘법대 82학번’. 김영환과 원희룡은 1983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구로동에서 야학 교사로 활동하면서 친하게 지낸 친구다. 김영환의 회고다.

“운동권 학생이 야학에서 일하는 목적은 노동자를 의식화하고, 선진적인 노동자를 발굴하려는 것이었다. 원희룡은 전국 수석 타이틀 탓에 어디서 뭘 하든 주목받았는데, 그가 지하서클 활동을 했다. 1학년 때부터 수업은 일절들어오지 않고 ‘운동’만 열심히 했다. 운동권에 발을 디디면 제도 교육을 받으러 강의실에 들어가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껴지고 배신자처럼 눈총을 받던 시기였다.”

김영환은 반미친북(反美親北) 분위기를 확산한 인물이다. 1991년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을 만났다. 이듬해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창당했으나 북한의 실제에 환멸을 느껴 1997년 민혁당을 해체했다. 중국을 거점으로 해 북한 내 반(反)체제 조직 ‘횃불’을 조직하다 2012년 공안에 체포됐다. 현재는 교육과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똥파리’들은 뭣보다도 수가 많았다. 광주를 군홧발로 짓밟은 신군부는 1980년 7월 30일 학교 수업만 들어도 대학 입학에 문제가 없게 하겠다면서 대학별 본고사를 폐지했다. 입학 정원을 졸업 정원 대비 130%로 늘렸다. 전두환 정권의 7·30 조치로 81학번부터 대학생 수가 크게 늘었다. 서울대 법대는 280명이던 정원이 360명으로 늘었다.

“악마 몰아내다”

82학번이 ‘똥파리’로 불린 데는 81학번이 서울대에 입학할 때 초유의 입학 정원 미달 사태가 벌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1981학년도 모집 정원이 6530명이었는데 합격자 수가 5292명에 불과했다. 28개 모집단위 중 정원을 채운 곳은 6곳에 그쳤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82학번은 81학번에 비해 숫자가 확연히 많았다. 학과에 따라서는 82학번이 81학번보다 2배가량 많기도 했다. 2, 3학년을 다 합쳐도 1학년보다 학생 수가 적은 학과도 있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똥파리처럼 보인 것이다.

숫자가 많다 보니 82학번은 일종의 세력을 형성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덧붙여 김일성 주체사상을 받아들인 첫 학번이다. 1984년 학원 자율화 조치 이후 지하서클을 해산하고 학생회를 재건하거나 공개적인 투쟁 조직을 만드는 데도 이들이 앞장섰다. 떼로 몰려다니면서 거침없이 행동한 것이다.


82학번은 본격적인 ‘평준화 세대’다. 고교평준화는 1974년 서울과 부산을 시작으로 1975년 대구·인천·광주, 1979년 대전·전주·마산·청주·수원·춘천·제주로 확대됐다. 서울대 경영학과 82학번이면서 대기업 임원인 C씨는 “경기고니 뭐니 하는 폐쇄적 의식 없이 스스럼없이 누구와도 어울리는 문화를 가진 세대”라고 했다.

82학번은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 막내면서 386운동권 맏형 격이다.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주대환(65)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는 “전두환이라는 악마를 몰아내는 역사적 과업을 해낸 충만감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자기가 레닌이고, 자기가 김일성이고, 자기가 혁명가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면서 “앞으로 이런 세대는 다시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82학번은 유신 독재 교과서로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공교육을 받았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현장을 외웠다. 권위주의적 폭압과 대결하면서 평등주의, 아래로부터의 민족주의를 이념으로 채택했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로 기억되던 시절 사회에 진출했다.

“고교평준화·졸업정원제 신분적 위계 없애고 인적 자원 배가”

386 핵심 서울대 82학번 집중탐구 “조국은 ‘운동’ 열심히 안 한 半운동권”
1980년대 서울대 아크로폴리스광장. [동아DB]

82학번이 입학했을 때 운동권 지도부는 지하서클 중심으로 형성돼 있었다. 당시에는 동아리를 서클이라고 칭했다. 어느 서클에 들어갈지가 학생들의 큰 고민이었다. 서클에서 사적 유물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소비에트혁명사를 익혔다. 82학번이 학생운동 대중화를 이끌면서 1980년대 중반부터는 주체사상과 수령론이 추가됐다.

조직화의 경험과 그로 인해 형성된 네트워크는 개인화한 현재의 청년 세대가 가지지 못한 자산이다. 정치권이건, 시민사회건, 기업이건, 한 다리만 건너면 ‘친구’다. 수평적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는 것이다. 딸에게 유리바닥을 깔아준 조국 사건도 ‘카르텔의 협잡’에서 비롯한 측면이 있다.

서울대 공대 82학번으로 IT기업 임원으로 일하는 J씨는 이렇게 말했다.

“응집력, 공동체의식이 있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 우산 아래서 민족주의, 사회주의 담론의 세례를 받았다. 전두환과 맞서 싸우면서 피를 흘렸다. 캠퍼스를 장악했으며 도덕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워낙 호황이었던 터라 사회에 진출하기도 쉬웠고 물갈이에 맞춰 정치권에 들어가기도 쉬웠다. 시민사회단체로 간 친구들도 그곳에서 리더가 됐다.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질 때 나이가 젊어 선배 세대들과 달리 변신하기도 쉬웠다. 그렇다 보니 세월이 흐른 후에도 당시에 가졌던 이념적 후진성이 부각될 일이 없었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386은 한 세대의 운동가 집단 전체가 공장에 진출해 ‘노동자 군대’를 만들어 그 전위가 되고자 했다. 고교평준화와 졸업정원제가 이 세대의 신분적 위계를 없애고 인적 자원을 배가했다면 광주의 경험은 대(對)정부 혹은 반체제 투쟁 의식에 불을 지폈다”고 했다(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40쪽). 그 선두에 서 있던 게 82학번 ‘똥파리’들이다.

“희룡아, 그렇게 살지마라”

원희룡은 8월 27일 유튜브를 통해 “친구 조국아, 그만하자”고 일갈했다. 조국 사태가 한창일 때다.

“친구로서 조국 후보에게 권한다. 대통령이 강행해 ‘문재인의 조국’이 될지 모르겠지만, ‘국민의 조국’으로서는 이미 국민들이 심판을 했다. 이제 그만하자.”

9월 9일 조국이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자 원희룡은 페이스북에 이렇게 쓴다.

“대통령이 끝내 국민의 뜻을 저버리고 조국을 임명했다. 상식과 보편적 정의를 버리고 분열과 편 가르기를 택한 것이다. 권력의 오만은 결국 국민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오만은 풍요와 아침식사를 하고, 빈곤과 점심식사를 하며, 악명과 저녁식사를 한다’고 했다. 집권 절반도 지나지 않은 시점, 문재인 대통령은 벌써 ‘악명’과의 만찬을 선택한 것인가.”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서울대 사회학과 82학번)는 8월 30일 페이스북을 통해 “희룡아, 그렇게 살지마라”면서 이렇게 꼬집었다.

“노동운동 접어치우고 고시 봐서 하필이면 검사 한 거야, 사회주의 붕괴 탓이려니, 또 나름 생각이 있어서려니 했다. 그러다 정치 좀 해보겠다고 하필이면 한국당 전신인 수꼴당에 들어간 것도 뭔가 사정이 있으려니 했다.(…) 정치도 좋고 계산도 좋지만 그렇게까지 해야겠니. 그런 사람이 하겠다는 정치만큼 잔혹한 게 없었음을 누차 보았기에 네가 참 무서운 사람이란 생각이 새삼 든다. 뭐 말해도 듣지 않겠지만 그래도 한마디 하고 싶다. 제발 그렇게 살지마라.”

조국은 2010년 출간한 ‘진보집권플랜’에서 원희룡을 두고 “사시 합격 후 판사나 변호사가 아닌 검사의 길을 택했을 때 정치의 길을 걷겠구나 직감했다”면서 “민주당 내에선 ‘경쟁재’가 많아 자신의 ‘상품성’이 약해진다고 판단했기”에 한나라당을 선택했다고 평가했다.

조국은 ‘육법당’이 싫어 사법시험을 보지 않았다고 밝혀왔다. 육법당은 전두환 정권 때 집권당이던 민주정의당을 가리키는 말이다. 육사를 졸업한 군 출신 당 지도부를 머리 좋은 서울대 법대 출신들이 보좌하는 모습을 비꼰 것이다.

원희룡은 1992년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이회창 총재 시절인 2000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보수 정치권의 서울대 82학번 K씨는 “원희룡이나 나경원이 한나라당에 입당한 것은 민주당에 입당한 386의 ‘대체재’ 성격이었다고 봐야 한다”면서 “진보정당이든 보수정당이든 물갈이할 때마다 386세대는 매력적인 대상이었다”고 했다.

원희룡에게 “그렇게 살지마라”고 한 이진경의 본명은 박태호다. 1980년대 ‘한국사회 구성체 논쟁(사구체 논쟁)’의 한 축에 서 있던 사상 이론 분야의 스타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사사방)’을 쓰면서 ‘이진경’이라는 필명을 썼다. 이진경은 ‘이’것이 ‘진’짜 정치‘경’제학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PD(민중민주) 계열 이론가인 이진경은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시각에서 NL(민족해방)주사파와 김영환을 비판했다. 1989년 조국, 진중권(서울대 미학과 82학번·동양대 교수)과 서울사회과학연구소를 결성해 ‘주체사상비판’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진경은 주체사상에 비판적인 운동권에 큰 영향을 준 이론가다.

82학번은 NL, PD를 정립한 세대다. NL은 1985~1986년을 거치면서 정립됐고, PD는 NL을 비판하면서 1987년 이론의 얼개가 분명해졌다. NL, PD로 학생운동권이 분화하면서 82학번 이전 세대는 운동권 중심에서 주변화하는 모습을 나타냈으며 이후 세대는 NL, PD를 각각 뒤따라갔다. 주류는 전대협으로 상징되는 NL이었다.

PD는 소련식 사회주의에 경도됐고, NL의 주사파는 북한을 모델로 삼았다. 민족해방(NL)을 이룬 뒤 민중민주주의(PD)를 거쳐 혁명(Revolution)을 해야 하는데, NLPDR에서의 위치를 두고 논쟁이 일어났다. PD는 NL 시기를 지났다고 봤고, NL은 “남조선은 미제 식민지”라는 북한의 주장을 따랐다. PD는 사회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고, NL은 “때가 아니다. 해방부터 이뤄야 한다”고 본 것이다.

“사노맹에 무례하게 굴지마라”

조국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산하 남한사회주의과학원(사과원)에서 활동했다. 사노맹은 NL과 PD에서 한 글자씩 따 ND(민족민주)라고 불리기도 했다. 북한을 비판하면서 ‘남한 내 사회주의혁명 지도부’를 자처했다. 법무부 장관 후보 지명 후 조국의 사노맹 이력이 논란이 되자 “사노맹에 무례하게 굴지마라”고 일갈한 은수미 성남시장은 사노맹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이진경과 같은 사회학과 82학번이다.

노동운동을 한 서울대 공대 82학번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은 이진경과 조국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진경은 ‘1980년대 화석’을 연상케 한다. 조선의 성리학적 사유 체계에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을 섞어 세상을 잠시 흔든 뒤 현재는 더욱 퇴행했다. 30년 넘게 현실 세계에 발을 딛지 않고 관념의 세계에서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조국이 사노맹 활동을 할 때가 소련·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지던 시기다. 당시에 우리는 그 친구들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세상 바뀌는 것도 모르는 지진아 취급했다. 지적으로 모자라다고 여긴 것이다.”

조국의 친구인 나경원은 보수 정당 첫 여성 원내대표다. 2002년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여성특보로 정계에 입문했다. 원희룡과 같은 해인 1992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판사로 일했다.

나경원은 조국 사태 때 사퇴 공세를 주도했다. “옛정 생각해 봐줄까도 했는데 까도까도 끝이 없다” “장관이란 말 죽어도 못하겠다. 피의자 조국을 당장 파면시키라” “조국이 이끌게 될 법무부는 무차별 공포정치 발주처가 될 것이다” “조-양-은(조국-양정철-김정은) 세트로 나라가 엉망”이라고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조국은 ‘진보집권플랜’에서 나경원을 두고 “저와는 생각이 다른 친구였지만 노트 필기를 잘해 노트를 빌려 시험공부를 하기도 했다”면서 “대중민주주의의 속성을 잘 포착하거나 활용하기에 국회의원은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서울시장 선거에선 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썼다.

“사노맹 이력 과장돼 알려져”

서울대 법대 82학번이면서 비합법조직에서 활동한 A씨는 조국, 나경원, 원희룡을 각각 이렇게 기억했다.

“원희룡은 1학년 때부터 수업은 일절 들어오지 않고 ‘운동’만 한 친구다. 반면 나경원은 사회문제보다는 공부에 집중했다. 한마디로 모범생이었다. 조국 그 친구는 ‘운동’을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경력을 봐도 알겠지만 운동한 사람이 교수가 되는 코스를 그렇게 쉬지 않고 밟을 수 없다. 조국은 법대 내에서 운동권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는 반(半)운동권이었다.”

조국은 사노맹 활동 이전까지 서울대 법대 교지 편집을 하던 피데스(Fides·‘약속과 신뢰’를 상징하는 여신)를 비롯해 공개적인 곳에서 주로 활동했다. 한 NL 출신 인사의 설명이다.

“조국은 사노맹 활동도 정식 조직이 아닌 산하 기관에서 했다. 민혁당 같은 곳도 산하 기관이 있었는데 거기서 활동한 사람들을 민혁당 조직원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교재 만들고 책 읽은 정도라고나 할까. 조국의 사노맹 활동이라는 게 사실 별게 없다. 사노맹 이력이 과장돼 알려지면서 오히려 훈장이 된 격이다.”

민경우 전 범민련 사무처장은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워본 사람들은 신중한 반면 운동권에 느슨하게 묶여 있던 사람들이 과격하다. 과격함은 그 사람들이 치열하게 운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치열하게 운동을 ‘안’ 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라고 했다.(신동아 9월호 “조국, 말에 어울리는 책임을 져온 사람 아냐” 제하 기사 참조)

“고도성장 혜택 가장 많이 본 세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원희룡과 인터뷰하면서 ‘똥파리’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때로 돌아가면 어떻게 할래?’라고 물으면 뾰족한 답이 떠오르진 않지만, 똑같이 했으리란 생각도 든다. 이상론적 고민, 확장론적 고민을 했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같은 것에 관념적으로 끌렸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속은 것 같아 억울하다. 한국 경제가 외채 탓에 망한다 했지만 다 엉터리였다.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같은 책도 가슴을 뛰게 했으나 되돌아보면 우물 안 개구리 식의, 근거가 희박한 교조주의적 내용이다. 폭발적으로 지성을 키울 수 있는 20대에 교조적인 이념을 열정의 땔감으로 삼은 게 솔직히 조금 창피하다. 창조적 모색을 해야 할 시기에 그랬다는 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이 시대가 우리에게 준 불행 아니었나 싶다.”

그는 “그때는 대기업에서 취업하라고 편지가 와도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랬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비판하고 싸웠던 고도성장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세대가 이른바 386세대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 10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