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치

[김창균 칼럼] 文 대통령을 잘못 봤던 건가 사람이 변했나

Shawn Chase 2019. 5. 9. 17:08

조선일보

  • 김창균 논설주간



  • 입력 2019.05.09 03:17

    2012 대선 땐 지지 여부 떠나서 '사람은 괜찮아 보인다' 공감대
    "그들 했던 대로 되갚지 않겠다" '아름다운 복수' 다짐도 하더니
    되레 몇 곱절 더한 적폐 청산 2년… 첫인상에 배반당한 충격만 남아


    김창균 논설주간
    김창균 논설주간


    2012년 말 대학 동창 열 명가량이 모인 송년회가 대선 전날이었다. 신변잡사로 웃고 떠들다 헤어질 무렵 선거가 화제로 올랐다. 각자의 얘기 속에 다음 날 표심이 드러났는데 '누구를 찍으려는 이유'보다 '상대 후보를 찍을 수 없는 핑계'를 내놓는 식이었다. 문재인 후보를 못 찍겠다는 쪽은 이유가 한결같았다. 문재인 개인은 괜찮아 보이는데 그 주변이 못 미덥고 걱정스럽다는 것이었다.

    우연한 소모임에서만 이런 공감대가 이뤄진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선 이틀 후 조선일보에 '반듯하고 맑은 남자 문재인… 그 성품을 가린 문 후보의 주변'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문 후보 진영을 담당했던 본지 기자는 캠프 해단식을 소개하면서 "이번 선거운동 기간 문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문 후보 이야기가 나오면 '반듯하고 괜찮은 남자'라고 했다. '맑고 선한 느낌을 준다'는 말도 이어졌다"고 썼다.

    필자도 그런 인상을 공유했던 축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상주 문재인'이 보여준 의연함이 인상적으로 머리에 남았다. 2009년 5월 23일 오전 9시 30분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알린 그의 1분짜리 발표는 "대단히 충격적이고 슬픈 일입니다"라고 시작해서 "대통령님께서는 가족들 앞으로 짧은 유서를 남기셨습니다"로 마무리됐다. 감정을 일절 배제하고 확인된 사실만 담았다. 노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봉변당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다가가 사과하는 모습 역시 담담한 품위를 느끼게 했다.

    문 대통령은 저서 '운명'에서 노 전 대통령의 유서를 아직도 수첩에 갖고 다닌다고 썼다. 문 대통령은 그 유서를 보면서 주변에 '아름다운 복수'를 다짐했다고 했다. '그들이 했던 대로 되갚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다른 정치인의 말이었다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문재인이라면 어쩌면"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한때 그런 기대를 품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지는 지난 2년이었다. 노 전 대통령을 '극단적 선택'으로 몬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했는데 2년 새 똑같은 선택을 한 사람이 벌써 네 명이다. 자신과 아들이 겪은 수모에 충격받고 제 명을 채우지 못한 경우도 각각 있었다. '적폐 수사'로 감옥에 간 사람과 그 형량의 합은 역대 모든 정권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들이 했던 대로 되갚지 않겠다'는 말은 그 몇 곱절로 돌려준다는 뜻이었나 보다.

    단순 수치 비교보다 더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문 대통령의 인식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검찰 수사를 '정치 보복'이라고 했을 때 문 대통령은 "모욕"이라고 분노했다. MB에 대한 수사는 국정원 댓글 수사가 여의치 않자 다스 비자금에 국정원 특수활동비까지 새끼를 치면서 걸릴 때까지 별건(別件)을 뒤지는 식이었다. 이런 게 보복 수사가 아니면 무엇이 보복이겠나.

    문 대통령은 "국정원은 40명 정도 구속과 실형을 받을 정도로 적폐를 씻어냈다"면서 "정말 잘해주셨다. 감사드린다"고 했다. 한 조직의 40명이 사법처리됐다면 수백 명이 검찰 조사에 시달렸을 것이다. 먼지 떨기식 무리한 수사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당연히 든다. 그런데 인권 변호사 출신 문 대통령 눈엔 모범적 청산 모델로 비쳤다는 얘기다.

    지난주 사회 원로들을 만난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적폐 청산 그만하라는 말씀들을 하시지만 살아 움직이는 수사는 통제가 안 된다"면서 "청산을 마친 뒤에 상생과 협치도 가능하다"고 했다. 잔혹 영화에 등장하는 보스는 험상궂은 표정을 짓거나 고함을 지르는 법이 없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린치를 당한 사람에게 다가가 위로하듯 말한다. "나도 그만했으면 싶은데 어쩔 도리가 없구나. 죗값은 치러야 한다고 하니. 맞을 거 조금만 더 맞자."

    적폐 청산으로 곤욕을 치른 전 정권 인사는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 접했던 문 대통령은 "참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다"며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었다. 김종인 전 민주당 대표도 연초 인터뷰 때 문 대통 령의 첫인상을 "정직하고 솔직해 보였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앞뒤 말이 달라지고 자기 말을 남의 말같이 한다"면서 "내가 문 대통령을 잘못 봤던 것인지, 사람이 달라진 것인지 그건 모르겠다"고 했다. '반듯하고 맑아 보였던 첫인상'에 배반당한 충격담들이다. 다들 뭔가에 홀려 헛것을 봤던 걸까, 아니면 권력을 좇고 누린 세월이 사람을 변하게 만든 걸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08/20190508035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