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철민의 아웃룩] 최대 産油國 미국이 OPEC에 유가 인상 제동거는 이유

Shawn Chase 2019. 4. 3. 17:49

조선일보

  • 이철민 선임기자


  • 입력 2019.04.03 03:14

    1970년대 오일쇼크 겪은 미국, 셰일 오일·가스 대박 터지며 꿈에 그리던 '에너지 독립' 달성
    미국內 '고립주의' 욕구 커졌지만 중동·아시아 정세 고려하면 국제 질서에 적극 개입 불가피


    이철민 선임기자
    이철민 선임기자


    1973년 10월 제3차 중동전쟁의 와중에 시작한 오일 쇼크에 미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아랍국들은 이스라엘을 지원한 미국 등 일부 서방국에 원유 수출을 중단했고, 배럴당 가격도 70% 이상 올리고 5% 감산(減産)했다. 국제 유가는 6개월 새 배럴당 3달러에서 12달러로 치솟았다. 당시 원유 소비의 30%를 수입하던 미국에선 주유소마다 기름을 구하려는 차들이 줄을 섰고, 사람들은 텅 빈 고속도로에 마차를 끌고 나왔다.

    1975년까지 세계경제는 후퇴했다. 급기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80년까지 에너지를 자급(自給)하겠다는 '프로젝트 인디펜던스(Independence)'를 발표하고, 2차 세계대전 때의 원자탄 제조 계획이었던 '맨해튼 프로젝트'에 그 중요성을 비교했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원유의 20%를 쓰는 미국에 이후 '에너지 독립'은 역대 행정부의 목표가 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미국 내 소비에서 차지하는 원유 수입량은 한때 60%를 웃돌았다.

    미국, 5년 뒤 최대 원유 수출국

    그런 미국에 작년 12월 초 꿈 같은 일이 일어났다. 75년 만에 처음으로 원유 수출량이 수입량을 웃돌아 잠시 순(純)수출국이 된 것이다. 지난달 11일엔 "미국이 2021년부터 줄곧 순수출국으로 돌고 2024년엔 사우디와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 원유 수출국이 된다"는 국제에너지기구(IEA) 보고서도 나왔다. 이는 결코 '이변(異變)'이 아니었다. 2000년 이후 미국 텍사스·노스다코타주 등지의 대규모 퇴적층(shale)이 품은 석유와 가스가 신(新)공법으로 추출되면서 수년 전부터 예상됐던 결과이기도 하다. 오로지 셰일 석유 덕분에 지난 2월 미국의 1일 원유 생산량은 1200만 배럴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 원유 순수입량은 107만 배럴로 줄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1973년 오일 쇼크 때 미국에선 주유소마다 기름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왼쪽). 오른쪽은 미국 내 셰일 유전 지역 중 한 곳인 노스다코타주(州) 바켄 셰일 유정에서 원유 추출 작업이 이뤄지는 모습. /블룸버그


    이와 동시에 미국 내에선 고립주의의 목소리도 더욱 커져 간다. 필요한 에너지는 자국 내에서 구할 수 있는데, 해외 원유 공급 루트의 안전이니 폭압적인 중동 산유국들 정정(政情) 따위에 왜 신경 써야 하느냐는 것이다. 더 나아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여름 "우리 정부는 이제 에너지 독립뿐 아니라 에너지 지배(energy dominance)를 추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계 유가 영향력은 사우디가 강해

    그러나 이런 수사(修辭)에도 현실은 사뭇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은 2월 말에도 "OPEC, 살살 하자. 세계는 유가 인상을 견딜 수 없어. 깨지기 쉽다고!"라고 트윗했지만, OPEC 국가들과 러시아 등 산유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올해 상반기 중 매일 120만 배럴씩 감산(減産)하기로 합의했다. 유가는 2일 배럴당 70달러로 계속 올랐다. 국제 유가는 미국이 아닌 글로벌 수급(需給)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유가가 오르면 수년간 값비싼 원유 추출 비용을 쏟고도 아직 충분한 이익을 못 내고 있는 셰일 유전 개발업자와 투자자들은 좋아하지만 일반 미국인은 불만이 커지고 산업계 전반에도 추가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제이슨 보도프 컬럼비아대 글로벌에너지정책센터 소장과 같은 에너지·안보 전문가들은 "미국이 작년에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됐지만 세계 유가에 대한 진정한 영향력은 사우디처럼 명령 하나로 추가로 수백만 배럴을 수도꼭지처럼 풀고 조일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가격 담합 카르텔인 OPEC에 미국의 반(反)독점법을 적용하려는 미 의회의 움직임이 지난 20년간 흐지부지 끝난 것이나 작년 10월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 영사관에서 반정부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살해됐는데도 트럼프 행정부가 단호하게 제재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사우디의 유가 영향력 탓이다. 메건 L 오설리번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가 작년 11월 이란산 원유 수출을 막으면서도 일부 수입국에 예외를 둔 것도 미국의 증산(增産)만으론 유가 불안을 상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의 원유 생산 능력이 늘어나면서 미국의 무역수지가 크게 개선되고 미래의 오일 쇼크에 대한 완충 능력이 훨씬 커진 것은 사실이다. 셰일 석유가 쏟아지면서 에너지 부문 무역 적자 폭은 2011년의 3210억달러에서 2017년엔 550억달러로 크게 줄었다.

    완충 능력 생겼을 뿐, 고립주의 어려워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국제 항로를 지키고 민주주의 이념을 퍼뜨리고 자유무역 세계 질서를 구축한 것은 미국에 이롭기 때문이었다. 미 GDP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율은 1960년 9.16%에서 2016년엔 26%를 넘어섰다. 미국은 이웃 캐나다·멕시코 외에도 중국·일본·한국·영국 등과 1000억달러 이상씩 교역한다. 또 작년에 액화천연가스(LNG) 순수출국이 된 미국은 중동을 비롯한 전 세계에 LNG선을 보내고 있고, 독일에는 러시아와의 새 가스관을 건설하는 대신에 절반 가격에 자국산을 사라고 압력을 가한다. 앞으로도 셰일 석유를 한국과 중국 등에 계속 수출해 무역수지를 크게 개선하려면 더욱 국제 질서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미 경제 전문지 포천은 작년 9월 "미국산 제품에 들어가는 제품을 생산하는 수많은 아시아 국가는 중동산 석유에 의존하는데 중동 정세를 무시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비판했다. 미국 내 많은 전문가가 미국이 '고립주의 유혹'을 떨치고 원유 증산(增産) 능력이 주는 추가적인 영향력으로 세계 질서를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02/20190402034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