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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생 열전]⑤김승진 선장, 54세에 집 팔아 산 요트로 세계일주 "노후 걱정 안한다"

Shawn Chase 2019. 3. 15. 00:07

    조선비즈
  • 김지수 기자
  • 허인혜 인턴기자

  • 입력 2015.08.10 06:00 | 수정 2015.08.20 09:03

    1962년생 김승진 선장은 2014년 10월 18일 무동력 요트 아라파니호(13m)를 타고 세계 일주에 나섰다. 올해 5월 16일 41,900km 209일의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왔다./사진제공=김승진

    요트 선장 김승진은 작년 4월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다. 무동력, 무기항, 무원조로 세계일주를 떠날 준비를 하던 차에 사고 소식을 듣고 팽목항으로 달려갔던 터였다. 거기서 45일간 현장을 리포트했다. 그는 어떤 기자보다 오래 유가족과 텐트 안에서 지냈다.

    그는 뱃사람이기 전에 다큐멘터리 PD다. 중국 두만강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북한의 꽃제비를 취재해서 ‘그것이 알고 싶다’에 처음 알린 이도 그다. 1998년부터 자그마치 7년의 시간을 국경지대에서 보냈었다. 일본을 비롯해 서구에서도 그의 다큐멘터리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성수대교가 두 동강이 나는 것도(1994년), 삼풍 백화점이 맥없이 쓰러지는 것도(1995년) 보았지만, 진도 앞바다의 재난 현장에서 그는 궁극의 아수라를 경험했다. 물 앞에서 아이들은 구명 조끼를 입고도 뛰어내리지 못했다. 무참하게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3면이 바다로 둘러 싸인 나라에서 이해할 수 없는 재앙이 일어났다. 어른도 아이도 패닉이었다.

    “아이들한테 수영을 가르쳤어야 했는데… 해적과 상어만 아니면 바다는 무서울 게 없다고 가르쳤어야 했는데...” 물 속에서 시신이 들어올려 질 때마다 그는 텐트 구석에서 홀로 탄식했다.

    김승진의 딸도 세 살 때 뉴질랜드에서 수영장에 빠져 숨이 멎었다. 소식을 듣고 숨가쁘게 도착하니, 다행히도 그의 누이가 먼저 와서 인공호흡으로 끊어진 숨을 살리는 중이었다. 3분 안에 숨이 되돌아왔다. 그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다시 물에 들어갔다.
    “아빠 믿지? 너 수영 다시 배워야 한다!” 딸애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았다. 물에 빠진 기억을 물에서 노는 기억으로 바꿔놓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임무가 끝났다.

    고등학생이 된 딸은 아빠와 함께 요트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자고 약속했다. 김승진은 2014년 10월 13m 길이의 무동력 요트 아라파니호를 타고 바다에 41,900km라는 길을 냈다. 세월호의 슬픔을 기억하며 요트 꼭대기에 ‘희망 항해’라는 깃발을 달았다.

    한 여고생이 “선장님 배에 희망을 싣고 싶다”며 1만원의 후원금을 보탰다. 아라파니호는 지난 5월 16일태평양, 남극해, 인도양을 돌아 성공적으로 당진 왜목항으로 돌아왔다. 항해의 전 과정은 그의 카메라에 담겨 MBC 다큐스페셜로 방영됐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딸과의 항해에 앞선 리허설이었다.

    김승진은 언뜻 봐도 바람의 기운이 세다. 눈썹이 짙고 숱이 풍성한 곱슬머리에 피부는 검다. 검은 뿔테 안경에 공들여서 기른 낭만적인 콧수염 때문에 코메디언이나 성악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1962년에 태어난 대한민국 보통 남자들과는 다른 외모처럼 다른 인생을 살았다.

    1962년생 대한민국 남자로서 뿐만 아니라, 54세의 보편적인 세계인으로 봐도 그의 인생은 남다르다. 역사 속의 개인이, 국가에 속한 국민이, 큰 범주 안에 영향은 받되 이 정도로 구속 받지않고 사는 건 쉽지 않다./사진=허인혜 인턴 기자

    교장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와 실리적인 재테크 능력을 갖춘 어머니는 장남인 김승진을 비롯해 네 동생들을 부족함 없이 키웠다. 김승진은 성장하면서 아버지에게 몇 가지 선물을 받았다. 초등학생 때는 집안을 가득 채울만큼의 책을, 중학생 때는 시계를, 고등학생 때는 포르노 잡지를, 대학생 때는 담배를.

    아버지는 그를 어른으로 대접했다. “아버지와 함께 담배를 피울 수 있어서 커서도 부자 간에 대화가 끊기지 않았지요.” 김승진의 아버지는 그가 안전한 삶을 살기를 바랬다. 아들이 험악한 국경 지대에서 중국 공안에게 잡히고, 태평양에서 상어에게 공격 당하고, 유빙이 떠다니는 남극, 뜨거운 적도를 통과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요트 안에서 본 바다./사진 제공=김승진

    1977년, 중학생 김승진을 앞에 앉혀두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아니다. 취직해서 월급받고 살 수 있으면 그게 최고다.” 마침 텔레비전에서 에스키모의 인생이 방송중이었다. 소년 김승진은 말했다. “아버지, 저 사람들 보세요! 저것도 인생이잖아요. 어느 한 길을 강요하지 마세요.”

    1962년생 대한민국 남자로서 뿐만 아니라, 54세의 보편적인 세계인으로 봐도 그의 인생은 남다르다. 역사 속의 개인이, 국가에 속한 국민이, 큰 범주 안에 영향은 받되 이 정도로 구속 받지않고 사는 건 쉽지 않다. 어찌 보면 행운의 사나이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그의 본성이 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70%를 차지하는 물, 지구의 70%를 차지하는 물… 그는 ‘수영만 할 줄 알면, 해적과 상어만 만나지 않으면’ 인생이라는 항해가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생 시절부터 스킨스쿠버 동아리를 만들고 전국대학연합잠수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바다에 빠졌다. 아시안 게임이 열리던 1986년, 그는 한강 350㎞를 스킨 다이빙으로 종단하고, 같은 해 일본 시나노강 380㎞를 같은 방식으로 헤엄쳐 건넜다.

    강을 건너 본 사람은 바다를 꿈꾼다. 웬만한 태풍엔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는 ‘수영만 할 줄 알면, 해적과 상어만 만나지 않으면’ 인생이라는 항해가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생 시절부터 스킨스쿠버 동아리를 만들고 전국대학연합잠수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바다에 빠졌다./사진 제공=김승진

    -살아온 이력을 보면 삶이 상당히 극단적이다. 고베 대지진 현장으로, 탈북자가 있는 중국 국경 으로 카메라를 들고 뛰다가 요트를 타고 케이프혼을 지나 노을을 감상하는 삶이라니… 체제나 국경에 얽매이지 않는다. 대체 “내가 이런 인간이구나”라고 깨달은 것은 언제인가?

    “마흔 살이 되고서야 알았다. 보통 사람의 욕망은 다 똑같다. 많은 돈을 벌고, 편한 집에 살고. 나도 중산층으로 살았다. 북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중에 베이스를 뉴질랜드로 옮겼다. 그런 아름다운 곳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2001년도, 아이가 세 살 때, 수영장도 정원도 있고 전면이 통유리로 된 멋진 집도 샀다. 6개월 정도 가족과 함께 지냈는데, 어느날 아이를 보니 너무너무 행복해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에게 “너는 행복하냐?”고 질문을 던졌다. 행복하지 않았다. 그날로 짐 싸서 중국 국경으로 뛰어갔다. 거기서 난민들 만나고 같이 도망다니고, 취재하니까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알았다. 나는 무엇인가 도전하고 긴장하고 극복하고 그래야 살아있다고 느끼는구나. 그렇다면 이런 충동적인 나를 접수하자.”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북한의 꽃제비들을 취재했는데 당시의 행적은 일종의 사명감 때문이었나?

    “그때 차를 타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훑으면서 다녔다. 정치적인 사명감은 아니고, 다큐멘터리 제작자로서의 사명감이었다. 2003년 중국 공안 경찰에 잡혔다. 다행히 사전에 함께 일하는 파트너에게 잡힐 경우 국경 없는 기자단, CNN 에 연락해 달라고 했다. 한국, 일본, 프랑스, 뉴질랜드 등 각국에서 뉴스가 다 터져서 3주만에 나올 수 있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얻었나?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어졌다. 내가 궁금했던 건 북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다. 다른 체제에서 살았는데 다시 합쳐질 수 있을까? 취재를 해보니 북한 사람들도 똑같았다. 한국에 자식 데려다가 좋은 교육 시키고 싶어 하고, 중국에 나와서 장사해서 돈 벌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취재진에게는 기아 난민이라고 과장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람들을 사랑했던 것 같다. 같이 한국까지 온 사람들도 있고, 지금도 연락하고 지낸다.

    -딸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나?

    “딸 아이는 내 인터뷰를 다 스크랩한다. 친구들이 “우리 아빠는 슈퍼 해.” “우리 아빠는 초콜렛 가게 해.” “재네 아빠는 PD래. 그러다 이번에 요트 타고 세계 일주도 했대.” 그럴 때 실속 없는 아빠지만 딸 아이는 으쓱해한다. 딸 아이는 늘 나를 궁금해 한다.

    -그래도 가족은 모험가 남편을 인정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뉴질랜드는 학비도 들지 않기 때문에 가족이 생활하는 데 문제는 없다. 굉장히 서로 독립적이라 요트를 살 때도 상의한 적이 없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뉴질랜드에서 빚을 내서 구입한 부동산을 모두 헐값에 팔아야 했다. 재산을 정리해서 남은 돈 3억을 가지고 크로아티아에 가서 요트를 사서 몰고 돌아왔다./사진 제공=김승진

    -1962년생들은 머지 않아 직장에서 은퇴를 앞두고 있고, 부모 부양과 사교육비 때문에 노후 준비도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단어들이 당신에게는 상당히 생소하게 들릴 것 같다.

    “일단 사교육은 안 시키면 된다. 나는 유치원도 보내지 않았다. 공부를 강요해 본 적도 없다. 아버지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아이를 친구처럼 대하고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했다. 심지어 언어도 어른 용어를 그대로 썼다. ‘아, 저런 물건은 물리적으로 저항력이 심해서.’ 그러면 아이가 물어본다. ‘저항력이 뭐야?’ 그러면 ‘손 내밀어봐.’ 행동으로 저항력을 가르쳤다.

    사교육은 주식하고 똑같다. 거짓 교육 정보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잃는다. 부모 입장에서 너희들을 가르치기 위해 나를 다 희생했다, 그러면 듣는 자식은 기분이 나쁘다. 적어도 자식 핑계 대는 인생은 안 살아야 한다.

    부모님은 연금을 받으시니까 내가 부양할 필요가 없고. 나의 노후는 걱정 안한다.”

    -돈 걱정은 안하고 산 것 같다.

    “거의 안했다. 고도 성장기에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 어머니가 친구분들과 계를 붓고, 그걸 모아 강남의 아파트를 몇 채(올림픽 선수촌 아파트) 사두셔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80년대 당시 어머니들은 다 그렇게 해서 집안 살림을 불리셨다.

    일본 후지 TV에 취직해서도 연봉을 후하게 받았다. 2000년대 초엔 뉴질랜드 집 농장에서 양도 말도 기르고, 승마, 테니스를 할 정도로 괜찮았다. 그러다 2008년에 무리하게 빚으로 부동산을 좀 사놓았다가 금융 위기 맞아 폭삭했다. 그때 정리하고 나니 전 재산이 딱 3억이 남았다. 이걸 가지고 뭘할까 하다가 요트를 샀다.”

    -요트가 가진 것의 전부인데, 노후에 대한 걱정이 없다는 말인가?

    “굶어 죽을 걱정은 없을 거라고 본다. 다들 너무 풍족한 삶을 기대하는 거 아닌가? 자기 미래는 대충 훤히 보인다. 그런데 다들 안 보는 거다. 애써 거부하는 거지. 어차피 늙는 건데. 기우라는 말이 괜히 생겼겠나?

    다큐멘터리 촬영할 때 바닷가에서 굴 캐는 노인을 취재한 적이 있다. 굴 따서 얼마 버냐고 물어보니 3~5만원은 번다고 하시더라. 걱정할 시간이 있으면 그냥 움직이는 게 낫다.”

    김승진 선장이 200여일 동안의 항로를 하면서 기록한 수제 달력./사진 제공=김승진

    -상당히 낙천적이다. 뭔가 큰 ‘빽’이 있어보인다(웃음). 해외 생활을 많이 해서 한국인의 삶을 한 발짝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다 보니 위험에 단련되서 초월적인 마인드가 엿보이기도 한다.

    “62년생이 대거 해외로 나가 유학의 포문을 열었던 세대다. 일본으로 미국으로 유럽으로 많이들 떠났다. 이들이 돌아와 영화, 음악 등 문화예술을 많이 부흥시켰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러나라, 국경, 바다를 돌아다니다 보니 한국의 경제, 의료 시스템이 아주 나쁘지 않다고 본다.

    국가 시스템은 좀더 정비하고 개인의 욕심은 줄이고, 다들 걱정만 좀 덜하고 살면 된다.”

    -어쩌면 노후 걱정을 하지 않는 것도 상당히 모험가적인 마인드다. 예측 불허의 상태 그대로 미래를 대면하겠다는 건가?

    “나는 편하게 살고 싶다(웃음). 바다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바다가 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어차피 인생이 안전한 길을 골라서 살 수는 없다.”

    혹자는 김승진을 일컬어 요트 위의 로빈슨 크루소라고 했고, 21세기 이순신이라고도 했다. 그를 보면서 두 편의 영화가 동시에 떠올랐다. 태평양 한가운데 작은 배에 벵갈 호랑이와 남겨진 소년의 모험을 그린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그리고 인도양에서 화물선과 부딪혀서 난파한 요트를 탄 노인(로버트 레드포드)의 사투를 그린 영화 ‘올 이즈 로스트’. 바다는 아름답고도 섬뜩했고, 소년이든 노인이든 조난에 대처하는 인간의 생존 능력은 위대했다.

    200일이 넘는 항해 동안 김승진 선장도 바다에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포틀랜드 제도에 있는 사우스조지아섬 인근을 지날 때는 폭 30m 정도의 집채만 한 빙하에 부딪힐 뻔 하기도 했다. 남미 최남단의 케이프 혼에서는 최대풍속 50노트(kn)의 돌풍과 파고 7m의 높은 파도와 싸워야 했다.

    그러나 폭풍 못지않게 무서운 것은 적도 인근의 무풍(無風)지대였다. 바람에만 의지해 항해하는 배에 무풍지대는 지옥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인생 항해도 마찬가지다. 적당한 파도와 바람이 있어야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공들여 수염을 다듬는 김승진 선장. 혹자는 그를 일컬어 요트 위의 로빈슨 크루소라고 했고, 21세기 이순신이라고도 했다./사진 제공=김승진

    ▶김승진 선장은
    1962년에 태어난 김승진은 한성대학교를 나와 일본에서 비주얼아트를 공부하고, 산케이 그룹에 속한 일본 후지 TV에서 첫 직장 생활을 했다. 95년부터 독립 다큐멘터리 PD로 일하면서 KBS '도전지구 탐험대', '환경스페셜'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등을 만들었다. 중국 양쯔강 탐사 다큐, 장수 풍뎅이 다큐 등 자연에 집중하다가도 일본 고베 대지진 사건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달려갔다. 자연과 재난과 사람이 있는 곳에 어김없이 김승진이 출몰한다. 그는 앞으로 요트를 생활 문화로 만들기 위한 많은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