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참모 무시한 히틀러, 군대 못믿는 文정부..결과는 추락 뿐이다

Shawn Chase 2018. 8. 3. 06:53

김민석 입력 2018.08.03. 00:03 수정 2018.08.03. 05:36



군 무너지면 나라도 망해
청과 독일군은 실패 사례
장성들 대통령에 '충성' 경례
군통수권자 인식 변화 절실
지휘권 추락, 군 조직 와해 우려
군 사기와 군비 증강 힘써야


[김민석의 Mr.밀리터리] 기무사 문건과 국방 개혁

송영무 국방부 장관(왼쪽)이 24일 국방위 전체회의에서 이석구 국군기무사령관의 답변을 듣고 있다. 이사령관은 계엄령 문건과 관련해 ’송영무 장관에게 위중한 상황으로 보고했다“고 말했다.
나라의 운명은 목숨을 던진 군인의 희생으로 구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군인 정신이 투철하지 않거나 군대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아 나라를 망가뜨린 역사도 있다. 군대는 국가가 안보 위기에 몰렸을 때를 대비해 전술·전략을 연마하고 훈련한다. 그래야 할 우리 군이 요즘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군에 대한 불신이 커서다. 기무사의 계엄령 문건에 관련된 쿠데타설과 방위사업 비리, 국방부 장관과 기무사 대령의 설전, 국방개혁에 따른 장성 대거 감축 등으로 군이 어디까지 추락할지 우려된다.

1894년 7월 29일 오전 3시 경기도 안성. 한성(서울)에서 출발한 일본군과 아산만에 상륙한 청나라군의 첫 지상 전투가 있었다. 일본군 오오시마 소장이 이끄는 3000명 병력과 청나라군 예즈차오와 네스청의 2500명은 안성천과 성환으로 이어가며 이틀간 전투를 계속했다. 전투는 청나라군이 오오시마 소장의 양동작전에 걸려 성환지역의 주요 진지를 모두 잃어버리면서 끝났다. 한반도 운명을 갈라놓은 청일전쟁의 전초전이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패한 청나라군 지휘관 예즈차오는 압도적인 승리로 포장해 허위 보고한 뒤 평양으로 철수했다. 청나라군은 9월 중순 평양에서 다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청나라의 근간이었던 팔기군의 군기가 와해되고 부패한 결과다.(『청일전쟁』 육군군사연구소)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해를 넘겨 1895년 1월 26일. 일본군은 청의 북양함대 주력이 머무르고 있는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공격했다. 그때 이 군항에는 청나라 최대 전함인 정원함 등 함정 20여척이 정박해 있었다. 일본군 오야마 이와오 제2군사령관이 지휘하는 2사단과 6사단의 공격이 시작되자 청나라 직예총독 리훙장은 “배를 보호하고 전쟁을 피하라”는 잘못된 명령을 내렸다. 북양함대사령관 띵루창 제독은 함정들을 군항에 묶어둔 채 방어전투를 했다. 그러나 보름쯤 뒤인 2월12일 일본 연합함대의 공격으로 옴짝달싹 못 한 정원함을 비롯한 대부분 함정이 파괴되고 군항은 점령됐다. 사령관 띵루창은 다량의 아편으로 목숨을 끊었다. 청나라는 이어진 요동전투에서도 패배하자 일본과 굴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청나라군 지휘관들의 허위보고, 잘못된 판단, 전투의지 결여로 청나라는 망국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패한 청나라로부터 받은 배상금으로 러일전쟁을 준비하는 한편, 한반도와 만주로 세력을 확장했다.

독일군은 보불전쟁(1870∼71년)에서 승리한 이후 정예군대의 표상이 됐지만 세계 2차대전 때 히틀러에 의해 무너졌다. 독일군의 무적신화는 일반참모부로부터 비롯됐다. 그 산파역이 몰트게, 쉴리펜, 한스 폰 젝트 등 독일군 선구자들이었다. 이들이 구축한 시스템에 의해 길러진 전문 군인들이 당시 독일군의 기반이었다. 그러나 참모부의 전문적인 의견을 무시한 히틀러의 독단적인 작전지휘와 사병(私兵)화로 독일군은 종말을 맞게 된다. 그 사례로 히틀러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참모부 의견을 묵살하고 기갑부대를 제때 투입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을 허용했고 전세는 독일이 크게 불리하게 기울어졌다. 군에 대한 군통수권자의 잘못된 인식과 독단이 낳은 응보다. 독일군 자신도 ‘명령에 절대복종’이 군인의 최대 명예라는 기계적인 규율로 새로운 시대의 이념과 신념에 부응하지 못한 책임이 있었다.(김희상의 『생동하는 군을 위하여』)

요즘 우리 군에 대해 떠오르는 단어는 하극상, 쿠데타, 비리, 성추행, 불신, 무소신, 방관, 자괴감 등이다. 그래서인지 안보 사안과 관련해 군의 존재감은 보이지 않는다. 장교들은 군복을 입고 거리로 나가는 것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오죽하면 지난달 청와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모든 장성이 대통령을 향해 이례적으로 ‘충성’ 경례를 했을까. 군을 믿어 달라는 몸부림에 가까운 호소였다. 군 간부들의 심정이 말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 군 자체 문제도 있지만 군대를 믿지 못하고 경시하는 현 정부의 책임이 크다. 경험 많은 고위 장성들을 불신해 내보내면서 몇 기수 뛰어넘은 육·해군 참모총장을 임명했고, 계엄령 문건을 작성한 기무사가 쿠데타를 음모했다고 보는 것이다. 청와대 대변인은 계엄령 문건 참고자료를 브리핑하면서 군을 ‘정권 도적’처럼 몰아붙였다. 하지만 계엄령 참고자료를 쿠데타 기획으로 보는 건 무리한 해석이다.

국민은 지난주 국회 국방위에서 이석구 기무사령관과 간부들이 계엄령 문건을 두고 송영무 국방부 장관에게 대드는 모습을 보았다. 다음 날에는 이 사령관과 참모진이 서로 다른 주장을 폈다. 국방부 장관과 기무사령관의 상호 불신은 군지휘권의 추락이고, 기무사령관과 그의 참모진의 다툼은 조직 와해 모양새다. 이를 지켜본 많은 현역 장교들은 자괴감을 느꼈다고 한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추태였다. 지휘관과 부하가 회의 석상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의견을 낼 수 있지만 국민 앞에서의 다툼은 하극상으로 비친다. 여기에다 지난 정부부터 방위사업 비리가 유행어가 되면서 군이 마치 비리 온상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실제 방위사업 비리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는 드물다. 그러나 이 여파로 방위사업청은 물론 군 내부에서도 부담이 되는 창의적인 방위사업을 피하려는 풍조가 퍼졌다.

북한 등의 군사 도발에 대비해 효율적이고 공세적인 방안을 내놓는 것도 꺼리는 분위기다. 국방부가 발표한 ‘국방개혁 2.0’엔 혁신적으로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병력 감축에 맞춘 전투방법과 군사조직 비전은 없었다. 현존하는 북한 위협 대비책도 두루뭉술하게 표현돼 있다. 대신 장성 수와 병력을 일방적으로 감축하는 내용은 명확하다. 일부 예비역들은 군을 무장해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비판했다. 또한 북한군은 하계군사훈련 중이지만 우린 연합훈련을 중단했다. 북한이 비핵화 약속은 이행하지 않으면서 핵물질을 계속 생산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개발 중인 상태인데도 남북 간 비무장지대(DMZ) 전방초소(GP) 철수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불균형한 군비축소는 평화를 해칠 수 있다는 게 오랜 경험이다. 온갖 비판에 주눅이 든 군이 올바른 의견을 내지도 않고 있어 더 걱정이다.

군통수권자는 안보위기 때 군이 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평소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게 국민을 위한 중요한 책무다. 그 가운데 군인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제복을 입은 시민’이라는 점을 국민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국민의 지지와 사랑을 받지 못하는 군대는 유명무실하다. 군 원로 격인 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은 “군의 사기를 꺾고 군비를 소홀히 하는 것은 유사시 국민의 자유와 생명의 희생을 예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군이 19세기 말 청나라군이나 히틀러 시대 독일군처럼 추락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김민석 군사안보연구소장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