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인사이트] 루쉰은 “한자가 사라지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 했는데 …
중앙일보 2018.07.10 00:13 종합 24면 지면보기
오늘의 중국을 이끌어온 힘은 무언가? ‘중화(中華)’란 말에 답이 있다. 중화는 세계의 ‘중심적 문명’이란 의미다. 그러면 이 중화를 이끄는 힘은 무언가? 필자는 한자(漢字)와 그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한자문화라고 생각한다. 1930년대 중국의 문예대중화 시기에 루쉰(魯迅)과 취추바이(瞿秋白) 등이 중심이 돼 “한자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중국은 반드시 망한다(漢字不滅 中國必亡)”라며 라틴문자화를 주장했을 만큼 맹렬히 비판했던 그 한자 말이다.
우아한 문자 놀이의 한자 문화가
시로 사회 계몽하는 중국 만들어
이민족 포섭도 한자의 힘이 작용
중화 이끄는 힘은 한자에서 나와
한자 문화 토대로 인격 형성 후
정치와 무역을 논하는 게 중국인
세계 언어의 대부분이 발음을 표기하는 표음문자인 데 비해 한자는 독특하게도 표의문자(表意文字)다. 표의문자는 형상에 대한 회화적 표상에 기초한다. 구어(口語)가 아니라 문언(文言)인 까닭에 말하기보다는 쓰기에 적합하다. 또 글자 간 의미 접합성이 강해 한 번 배워두면 다른 글자와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힘이 크다. 단음절어인 까닭에 각 글자가 하나의 음절과 동일한 시공간적 크기를 점유하고 있어 말하고 쓸 때 길이가 일정하며 성조(聲調)적 심미성도 지닌다.
성음면에서 보면 거의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는 한글과 달리 한자 기반의 중국어는 표기할 수 있는 발음의 제한이 커서 21개 성모(초성)와 39개 운모(중종성)를 결합해 402개의 소리밖에 낼 수 없다. 이를 갖고 8만 개 한자를 발음해야 한다. 하나의 ‘ma’란 소리에 200개의 한자가 맴돌게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중국어는 유사음을 이용하는 강력한 의미 연접성을 갖게 됐다. 예로부터 장안 파릉교(灞陵橋)에서 송별시에 버들가지(柳絲)를 꺾어 주었는데 이는 ‘가지 말아요, 그리워요’라는 뜻인 ‘留思’와 음이 중첩돼 이별의 아쉬움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한자는 또 구문상 각 글자가 독자성을 지니는 가운데 어순에 의해 의미가 형성되는 고립어적 성격을 갖는다. 한자의 이와 같은 표의성, 단음절어, 성조어, 고립어적 특징은 비명료한 여백미를 중시하는 시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공자 이래 시의 사회적 효용이 커지고 중국 문인들이 우아한 문자놀이로서의 한자문화를 만들며 결과적으로 중국은 명실상부하게 과거를 통과한 시인이 다스리는 시국(詩國)이 될 수 있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공자는 한자의 심미적 특성과 음악적 이해에 정통해 “시에서 (정감을) 일으키고, 예에서 (바로) 서며, 음악에서 (인격을) 완성한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며 시가의 자기수양적 혹은 사회문화적 효용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그가 시경을 편집하고 시로써 사회를 계몽할 것을 주장한 시교(詩敎)를 내세운 이유다. 이와 같은 공자의 가르침에 힘입어 당송 진사 과거제가 시행돼 시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수준 높은 동아시아 문인 사대부 문화가 구축된 것이다.
중국에서 문학예술과 정치와의 상관성은 고전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중국이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 속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며 오히려 그들을 문화적으로 포섭할 수 있었던 것 역시 한자문화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흉노, 거란, 몽골, 만주족은 들어올 때는 힘 센 지배자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점차 ‘중화(中華)’의 일원으로 편입된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위진남북조시대 북방 선비족 탁발씨의 북위(北魏, 386-534)는 유교를 적극 수용해 성명과 관직, 제도를 중국식으로 바꾸고 한족과의 통혼을 장려했다. 나아가 자신들의 언어와 복식을 금지하는 등 중국 문화에 심취한 끝에 전투력 대신 중원문화를 수용하며 결국 중화에 동화되고 말았다. 이와 흡사한 예가 중국 마지막 왕조였던 만주족의 청(淸)이다. 만주족도 중원에 진출해 유학을 받아들이고 한족의 관습과 언어를 수용하면서 그들의 언어인 만주어와 강력한 상무 정신을 잃고 결국 한족 문화에 동화됐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유태인이 2000년간의 유랑 생활 끝에 이스라엘을 건국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문화 정신을 보존한 결과이며 중국이 수많은 외족의 침입과 지배 속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확장해나갈 수 있었던 것 역시 모두 문화적 구심력 덕분이며 그 중심에 바로 한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자가 만들어낸 두터운 문화 베이스 위에서 먼저 인격과 품성의 교유, 즉 ‘꽌시(關係)’를 타진한 후에 비로소 본론인 정치와 무역을 조율하는 오늘날 중국인의 자세는 바로 그들의 역사가 남겨준 최고의 문화전략이 아닐까 싶다.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 정책으로 강력한 중화제국의 부흥을 꿈꾸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도 “우수한 전통문화를 세계에 널리 드날리자”는 기치를 내걸고 있다. ‘문화로 정치를 관철한다(以文治國)’는 중국특색의 문치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유효한 것이다.
문화란 물과 같아서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처음에는 근원과 지류가 분명하나 나중에는 그 경계가 불분명해지며 나름의 자기 발전을 하게 마련임을 우리는 서구문명의 역사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한자 역시 그렇다. 중국은 한자의 종주국이지만 한자는 이미 한국, 일본,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쳐 각국의 언어에 녹아 있고, 우리말의 경우 80% 이상이 한자어로 구성돼 있다.
한자는 사물을 그려낸 자형이 변하지 않는 독립적 글자다. 그러나 이 불변의 개별적 독립체들이 서로 맞붙으면 새로운 의미를 산출해낸다. 글자들 사이에 연상과 함축, 음운의 심미들이 내재해 있는 까닭에, 운용하는 사람들은 한자와 한자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의미와 성운의 즐거움을 찾아 기꺼이 노닌다. 개별 글자가 자형의 변함이 없고 자기 고유의 뜻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을 넘어서서 새로운 글의 세계를 엮어나가는 세계창출의 추동력, 이것이 개별 한자와 한자가 서로 연접해 만들어 가는 구문과 텍스트가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숨은 뜻이 아닐까 싶다.
언어는 사유를 형성하는 가장 큰 힘이요 자산이다. 우리는 세계에서도 이미 검증된 가장 과학적 문자인 한글을 창제한 민족이다. 여기에 이제는 우리의 언어 문화자산이 된 한자를 얹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주체적 창의융합 세계를 향해 자유롭게 질주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옛것을 숙성시켜 오늘을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창의 어린 문화 저력 위에서 정치, 경제, 외교를 운용하는 수준 높은 동방의 빛을 회복하는 일, 그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부과된 역사적 과제가 아닐까 싶다.
◆오태석
한국동아시아과학철학회 회장. 서울대 문학박사. 한국중국어문학회 회장 역임. 저서로 『노장선역(老莊禪易), 동아시아 근원사유』 등이 있다. 현대물리학과 동아시아 사유의 접목을 통한 인문사유의 과학철학적 재해석·재발굴에 힘을 쏟고 있다.
중앙일보 2018.07.10 00:13 종합 24면 지면보기
오늘의 중국을 이끌어온 힘은 무언가? ‘중화(中華)’란 말에 답이 있다. 중화는 세계의 ‘중심적 문명’이란 의미다. 그러면 이 중화를 이끄는 힘은 무언가? 필자는 한자(漢字)와 그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한자문화라고 생각한다. 1930년대 중국의 문예대중화 시기에 루쉰(魯迅)과 취추바이(瞿秋白) 등이 중심이 돼 “한자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중국은 반드시 망한다(漢字不滅 中國必亡)”라며 라틴문자화를 주장했을 만큼 맹렬히 비판했던 그 한자 말이다.
우아한 문자 놀이의 한자 문화가
시로 사회 계몽하는 중국 만들어
이민족 포섭도 한자의 힘이 작용
중화 이끄는 힘은 한자에서 나와
한자 문화 토대로 인격 형성 후
정치와 무역을 논하는 게 중국인
세계 언어의 대부분이 발음을 표기하는 표음문자인 데 비해 한자는 독특하게도 표의문자(表意文字)다. 표의문자는 형상에 대한 회화적 표상에 기초한다. 구어(口語)가 아니라 문언(文言)인 까닭에 말하기보다는 쓰기에 적합하다. 또 글자 간 의미 접합성이 강해 한 번 배워두면 다른 글자와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힘이 크다. 단음절어인 까닭에 각 글자가 하나의 음절과 동일한 시공간적 크기를 점유하고 있어 말하고 쓸 때 길이가 일정하며 성조(聲調)적 심미성도 지닌다.
성음면에서 보면 거의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는 한글과 달리 한자 기반의 중국어는 표기할 수 있는 발음의 제한이 커서 21개 성모(초성)와 39개 운모(중종성)를 결합해 402개의 소리밖에 낼 수 없다. 이를 갖고 8만 개 한자를 발음해야 한다. 하나의 ‘ma’란 소리에 200개의 한자가 맴돌게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중국어는 유사음을 이용하는 강력한 의미 연접성을 갖게 됐다. 예로부터 장안 파릉교(灞陵橋)에서 송별시에 버들가지(柳絲)를 꺾어 주었는데 이는 ‘가지 말아요, 그리워요’라는 뜻인 ‘留思’와 음이 중첩돼 이별의 아쉬움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한자는 또 구문상 각 글자가 독자성을 지니는 가운데 어순에 의해 의미가 형성되는 고립어적 성격을 갖는다. 한자의 이와 같은 표의성, 단음절어, 성조어, 고립어적 특징은 비명료한 여백미를 중시하는 시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공자 이래 시의 사회적 효용이 커지고 중국 문인들이 우아한 문자놀이로서의 한자문화를 만들며 결과적으로 중국은 명실상부하게 과거를 통과한 시인이 다스리는 시국(詩國)이 될 수 있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공자는 한자의 심미적 특성과 음악적 이해에 정통해 “시에서 (정감을) 일으키고, 예에서 (바로) 서며, 음악에서 (인격을) 완성한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며 시가의 자기수양적 혹은 사회문화적 효용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그가 시경을 편집하고 시로써 사회를 계몽할 것을 주장한 시교(詩敎)를 내세운 이유다. 이와 같은 공자의 가르침에 힘입어 당송 진사 과거제가 시행돼 시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수준 높은 동아시아 문인 사대부 문화가 구축된 것이다.
중국에서 문학예술과 정치와의 상관성은 고전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중국이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 속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며 오히려 그들을 문화적으로 포섭할 수 있었던 것 역시 한자문화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흉노, 거란, 몽골, 만주족은 들어올 때는 힘 센 지배자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점차 ‘중화(中華)’의 일원으로 편입된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위진남북조시대 북방 선비족 탁발씨의 북위(北魏, 386-534)는 유교를 적극 수용해 성명과 관직, 제도를 중국식으로 바꾸고 한족과의 통혼을 장려했다. 나아가 자신들의 언어와 복식을 금지하는 등 중국 문화에 심취한 끝에 전투력 대신 중원문화를 수용하며 결국 중화에 동화되고 말았다. 이와 흡사한 예가 중국 마지막 왕조였던 만주족의 청(淸)이다. 만주족도 중원에 진출해 유학을 받아들이고 한족의 관습과 언어를 수용하면서 그들의 언어인 만주어와 강력한 상무 정신을 잃고 결국 한족 문화에 동화됐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유태인이 2000년간의 유랑 생활 끝에 이스라엘을 건국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문화 정신을 보존한 결과이며 중국이 수많은 외족의 침입과 지배 속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확장해나갈 수 있었던 것 역시 모두 문화적 구심력 덕분이며 그 중심에 바로 한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자가 만들어낸 두터운 문화 베이스 위에서 먼저 인격과 품성의 교유, 즉 ‘꽌시(關係)’를 타진한 후에 비로소 본론인 정치와 무역을 조율하는 오늘날 중국인의 자세는 바로 그들의 역사가 남겨준 최고의 문화전략이 아닐까 싶다.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 정책으로 강력한 중화제국의 부흥을 꿈꾸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도 “우수한 전통문화를 세계에 널리 드날리자”는 기치를 내걸고 있다. ‘문화로 정치를 관철한다(以文治國)’는 중국특색의 문치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유효한 것이다.
문화란 물과 같아서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처음에는 근원과 지류가 분명하나 나중에는 그 경계가 불분명해지며 나름의 자기 발전을 하게 마련임을 우리는 서구문명의 역사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한자 역시 그렇다. 중국은 한자의 종주국이지만 한자는 이미 한국, 일본,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쳐 각국의 언어에 녹아 있고, 우리말의 경우 80% 이상이 한자어로 구성돼 있다.
한자는 사물을 그려낸 자형이 변하지 않는 독립적 글자다. 그러나 이 불변의 개별적 독립체들이 서로 맞붙으면 새로운 의미를 산출해낸다. 글자들 사이에 연상과 함축, 음운의 심미들이 내재해 있는 까닭에, 운용하는 사람들은 한자와 한자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의미와 성운의 즐거움을 찾아 기꺼이 노닌다. 개별 글자가 자형의 변함이 없고 자기 고유의 뜻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을 넘어서서 새로운 글의 세계를 엮어나가는 세계창출의 추동력, 이것이 개별 한자와 한자가 서로 연접해 만들어 가는 구문과 텍스트가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숨은 뜻이 아닐까 싶다.
언어는 사유를 형성하는 가장 큰 힘이요 자산이다. 우리는 세계에서도 이미 검증된 가장 과학적 문자인 한글을 창제한 민족이다. 여기에 이제는 우리의 언어 문화자산이 된 한자를 얹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주체적 창의융합 세계를 향해 자유롭게 질주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옛것을 숙성시켜 오늘을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창의 어린 문화 저력 위에서 정치, 경제, 외교를 운용하는 수준 높은 동방의 빛을 회복하는 일, 그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부과된 역사적 과제가 아닐까 싶다.
◆오태석
한국동아시아과학철학회 회장. 서울대 문학박사. 한국중국어문학회 회장 역임. 저서로 『노장선역(老莊禪易), 동아시아 근원사유』 등이 있다. 현대물리학과 동아시아 사유의 접목을 통한 인문사유의 과학철학적 재해석·재발굴에 힘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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