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치

백성이 등돌린 타락한 보수…고려는 결국 그렇게 망했다

Shawn Chase 2018. 6. 17. 11:46
[윤석만의 인간혁명]영국 보수당이 300년 동안 지속한 이유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마주 앉아 있는 최후의 고려인 정몽주와 최초의 조선인 정도전. 두 사람 모두 성리학을 받아들여 부패한 고려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신진사대부다. 하지만 방법론을 두고 두 사람의 길은 엇갈렸다.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마주 앉아 있는 최후의 고려인 정몽주와 최초의 조선인 정도전. 두 사람 모두 성리학을 받아들여 부패한 고려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신진사대부다. 하지만 방법론을 두고 두 사람의 길은 엇갈렸다. [SBS]

인간의 모든 문명사에는 언제나 보수와 진보라는 역사 발전의 수레바퀴가 있었습니다. 사회를 급진적으로 개혁할 것이냐, 아니면 안정적이고 점진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냐 하는 논쟁은 끊이지 않았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이 그 자체로서 만고불변의 철학과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진 않다는 겁니다. 오히려 어떤 내용물 자체이기보다는 그 시대에 필요한 이념과 가치를 담는 그릇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민주당은 19세기 남북전쟁 때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링컨의 공화당에 맞섰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민주당이 노예제를 옹호하거나 인종차별을 지지하진 않습니다. 세상이 변하면 보수·진보라는 그릇에 담기는 내용물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과거 우파의 자유방임에 맞서 좌파가 주장했던 복지국가 모델은 이제 보수·진보를 떠나 모든 민주 국가의 핵심 정체성이 됐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공화당 대통령 링컨의 노예해방선언문. J S 스미스 & Co의 1890년 10월 인쇄본.   [위키피디아]

미국 남북전쟁. 공화당 대통령 링컨의 노예해방선언문. J S 스미스 & Co의 1890년 10월 인쇄본. [위키피디아]

 그렇다면 보수와 진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한국정치학회장을 맡고 있는 김의영 서울대 교수는 보수·진보를 일종의 ‘성향과 태도(attitude)’라고 정의합니다. 김 교수는 “보수·진보는 그 자체가 내용이 아니라 특정한 내용물을 담는 그릇”이라며 “시대가 변하면 보수·진보의 의미도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이를 명쾌하게 구분해 놓은 사람이 영국의 정치인·철학가 에드먼드 버크(1729~1797)입니다. 그에 따르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소수의 엘리트가 미래를 설계하고 그들의 의지에 따라 세상을 바꿔갈 수 있다는 시각입니다. 인간이 상상해낸 유토피아를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다소 급진적 방법론이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같은 성향을 진보라고 부릅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1518년 판에 실린 유토피아 섬의 목판화. 진보는 인간이 설계한 유토피아를 현실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믿는다. [중앙포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1518년 판에 실린 유토피아 섬의 목판화. 진보는 인간이 설계한 유토피아를 현실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믿는다. [중앙포토]

 두 번째는 이와는 반대로 세상은 설계도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그 어떤 유능한 개인도 인류의 집단 유산인 전통과 문화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회 변화는 점진적인 개선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오랜 시간 인류가 그러한 방식을 사용해 온 것은 그 만큼 타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이에 대해 영국 정치철학자 로저 스크러튼은 “보수는 훌륭한 유산은 쉽사리 창조되지 않는다는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  

 
 버크가 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된 배경에는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790년 그가 쓴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에서 버크는 “급진적 사회변혁으로 오히려 갈등과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아울러 “혁명의 사상은 종교적 색체를 띠게 될 것이고 이런 광신적 믿음에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 정부가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보수주의의 파운더스로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 [중앙포토]

보수주의의 파운더스로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 [중앙포토]

 실제로 버크의 책이 출간되고 3년 후인 1793년 혁명 세력은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며 부르봉 왕조를 몰락시키죠. 그러면서 혁명의 주동자였던 로베스피에르가 집권해 ‘공포정치’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 역시 얼마 못가 자신이 세운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그 다음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나폴레옹의 시대죠. 혁명군 사령관에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그는 잦은 침략전쟁을 벌이며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암울하고 혼란스러웠던 사회상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잘 묘사돼 있죠. 
공포정치의 주역이었던 로베스피에르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위키피디아]

공포정치의 주역이었던 로베스피에르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위키피디아]

 이처럼 프랑스혁명에 대한 버크의 ‘예언’은 대부분 적중합니다. 보수주의자였던 그는 부르주아가 주축이 돼 안정적이며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영국의 전통을 중시했습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시민의 권리를 명문화 한 명예혁명 같은 사례가 사회 발전의 롤 모델이라고 봤죠. 즉, 혁명 이후 혼란과 갈등이 커진 프랑스 사회를 보면서 진보가 아닌 보수의 방법론으로 사회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버크가 주장했던 보수 정치는 영국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로 이끕니다. 산업혁명을 통해 경제를 부흥시키고 입헌군주제 아래 민주주의를 발전시킵니다. 19세기 영국은 영광의 ‘빅토리아 시대’를 구가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게 됐죠.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왕실의 철학을 다졌고 양당제를 중심으로 한 의회정치의 기반이 마련됐습니다.

명예혁명(1688) 이후 영국 의회의 모습. 혁명 이후 영국은 입헌군주국으로서 의원내각제를 확립한다. [비상학습백과]

명예혁명(1688) 이후 영국 의회의 모습. 혁명 이후 영국은 입헌군주국으로서 의원내각제를 확립한다. [비상학습백과]

 이렇게 눈부신 발전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지도층인 보수의 가치적 지향점이 명확했고 이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두터웠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보수는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지켰습니다. 오랜 문화적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영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키웠고요. 위기 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헌신과 희생을 통해 국민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보수는 과거의 유산과 전통, 문화를 지키면서도 점진적으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수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죠. 하지만 보수의 가치가 국민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때는 오직 지도층의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국민이 함께 지키고 싶은 가치와 신념이 있다면 건강한 보수가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일 뿐인 것이죠.

영국의 최대 전성기를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 [중앙포토]

영국의 최대 전성기를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 [중앙포토]

 14세기 말 고려의 집권세력이 그랬습니다. 보수층엔 원나라를 등에 업고 권력과 부를 독차지한 권문세족이, 진보 진영엔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신진사대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권문세족은 과거(科擧)가 아닌 음서(蔭敍)로 벼슬을 대물림 하고,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거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이들은 권력과 부, 명예를 모두 손아귀에 넣었죠. 1452년 조선 문종 때 편찬된 『고려사(高麗史)』는 권문세족을 아래와 같이 ‘도둑’으로 묘사합니다.  
 

 “간악한 도둑들이 백성들의 땅을 빼앗는 경우가 많았다. 그 규모는 한 주(州)보다 크기도 하고 산과 강을 경계로 삼았다. 남의 땅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이라고 우기며 주인을 내쫓았다. 빼앗은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해 각자 세금을 걷어가기도 했다.”

조선 문종 때 간행된 '고려사' 표지. [중앙포토]

조선 문종 때 간행된 '고려사' 표지. [중앙포토]

 백성들이 너무 가난해 ‘송곳 하나 꽂을 땅(立錐之地·입추지지)’이 없다는 말도 이 때 나왔습니다. 하지만 권세와 부귀가 영원할 것만 같던 권문세족도 신진사대부의 등장과 함께 맥없이 무너집니다. 견고한 기득권의 성을 쌓기까진 수 백 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권문세족과 달리 당시 백성들에겐 ‘보수(保守·보전하여 지킴)’해야 할 전통과 문화, 가치가 ‘송곳’ 만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려의 체제를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은 오직 권문세족뿐이었죠. 그들은 수 백 년 간 촘촘하게 만들어 놓은 사회의 온갖 기득권을 고수했고, 이는 오로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데 쓰였습니다. 결국 고려는 멸망하고 신진사대부가 ‘민본(民本)’을 기치로 새로운 세상 조선을 건국했죠.  
영국의 앤드루 왕자, 포클랜드 전투에서 전투기조종사로 활약하며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선보였다. [중앙포토]

영국의 앤드루 왕자, 포클랜드 전투에서 전투기조종사로 활약하며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선보였다. [중앙포토]

 국가의 흥망사를 살펴보면 대부분 집권세력이 자멸하면서 한 시대가 저뭅니다. 물론 다른 나라의 침략과 같은 외부적 요인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그 시작은 집권층의 부패와 타락입니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그의 책 《특혜와 책임》에서 백제가 망한 이유를 귀족들의 향락과 사치에서 찾았습니다. 송 교수는 “백제 멸망 시 나라를 위해 제대로 싸웠던 귀족은 계백 혼자뿐이었다”며 “군림만 하는 귀족들을 증오했던 백성들은 오히려 새로운 나라를 원했다”고 말합니다.  
 
 6·13 지방선거에서 보수정당이 몰락한 것도 이들이 ‘보수’하고 싶었던 것과 국민이 원했던 것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변해 보수라는 그릇에 담길 내용도 달라져야 하는데 보수 정치인들은 여전히 과거의 것에만 집착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국민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한 측면이 컸습니다. 그릇에 담을 콘텐트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이 오로지 ‘반공’, ‘종북’만 외쳐대며 국민의 상식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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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차 혁명으로 불리는 현대 사회는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빠르고 진폭도 큽니다. 그런 탓에 ‘보수’, 즉 지켜야할 것이 과거에 비해 적어진 게 사실입니다. 또 우리는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역사적 단절의 시기가 있었고, 그로 인해 유럽 국가와 같은 보수적 가치의 터전이 빈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보수는 시대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더욱 빨리 변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보수가 시속 20㎞로 달렸다면 이젠 40㎞로 속도를 높여야 합니다. 그래야 80㎞로 달리는 진보를 견제하고 우리 사회를 안전속도(60㎞)에 맞출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영국의 보수당이 그 전신인 토리당으로부터 300년이 넘도록 살아남은 이유는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보수당은 1834년 창당했다. 그 전신인 토리당부터 연원을 찾아 올라가면 3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영국의 보수당은 1834년 창당했다. 그 전신인 토리당부터 연원을 찾아 올라가면 3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보수당은 부르주아의 계급을 대변하는 정당이었지만 19세기 선거권 확대를 주장하며 국민정당으로 탈바꿈 했고, 20세기 초 노조를 끌어안으며 좌우를 모두 품는 넓은 스펙트럼을 갖게 됐습니다. 위기 때마다 이념과 기득권 대신 실용과 개혁을 내세우며 지금까지 살아남았습니다.  
 
  한국의 보수정당도 엄청난 대혁신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기득권 정당'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면, 그들이 주장하는 가치와 철학·이념이 국민 다수의 상식과 교양 '뉴노멀'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아울러 새로운 비전까지 제시할 수 있는 내용물을 그릇에 담아야내야만 국민으로부터 다시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 보수정당은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까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인간혁명’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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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일보] 백성이 등돌린 타락한 보수…고려는 결국 그렇게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