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만의 인간혁명]영국 보수당이 300년 동안 지속한 이유
예를 들어 미국의 민주당은 19세기 남북전쟁 때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링컨의 공화당에 맞섰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민주당이 노예제를 옹호하거나 인종차별을 지지하진 않습니다. 세상이 변하면 보수·진보라는 그릇에 담기는 내용물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과거 우파의 자유방임에 맞서 좌파가 주장했던 복지국가 모델은 이제 보수·진보를 떠나 모든 민주 국가의 핵심 정체성이 됐습니다.
이를 명쾌하게 구분해 놓은 사람이 영국의 정치인·철학가 에드먼드 버크(1729~1797)입니다. 그에 따르면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소수의 엘리트가 미래를 설계하고 그들의 의지에 따라 세상을 바꿔갈 수 있다는 시각입니다. 인간이 상상해낸 유토피아를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다소 급진적 방법론이 동원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같은 성향을 진보라고 부릅니다.
버크가 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된 배경에는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790년 그가 쓴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에서 버크는 “급진적 사회변혁으로 오히려 갈등과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아울러 “혁명의 사상은 종교적 색체를 띠게 될 것이고 이런 광신적 믿음에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 정부가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다음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나폴레옹의 시대죠. 혁명군 사령관에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그는 잦은 침략전쟁을 벌이며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암울하고 혼란스러웠던 사회상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잘 묘사돼 있죠.
이처럼 버크가 주장했던 보수 정치는 영국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로 이끕니다. 산업혁명을 통해 경제를 부흥시키고 입헌군주제 아래 민주주의를 발전시킵니다. 19세기 영국은 영광의 ‘빅토리아 시대’를 구가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게 됐죠.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왕실의 철학을 다졌고 양당제를 중심으로 한 의회정치의 기반이 마련됐습니다.
이와 같이 보수는 과거의 유산과 전통, 문화를 지키면서도 점진적으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수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죠. 하지만 보수의 가치가 국민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때는 오직 지도층의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국민이 함께 지키고 싶은 가치와 신념이 있다면 건강한 보수가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일 뿐인 것이죠.
“간악한 도둑들이 백성들의 땅을 빼앗는 경우가 많았다. 그 규모는 한 주(州)보다 크기도 하고 산과 강을 경계로 삼았다. 남의 땅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이라고 우기며 주인을 내쫓았다. 빼앗은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해 각자 세금을 걷어가기도 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권문세족과 달리 당시 백성들에겐 ‘보수(保守·보전하여 지킴)’해야 할 전통과 문화, 가치가 ‘송곳’ 만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려의 체제를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은 오직 권문세족뿐이었죠. 그들은 수 백 년 간 촘촘하게 만들어 놓은 사회의 온갖 기득권을 고수했고, 이는 오로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데 쓰였습니다. 결국 고려는 멸망하고 신진사대부가 ‘민본(民本)’을 기치로 새로운 세상 조선을 건국했죠.
6·13 지방선거에서 보수정당이 몰락한 것도 이들이 ‘보수’하고 싶었던 것과 국민이 원했던 것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변해 보수라는 그릇에 담길 내용도 달라져야 하는데 보수 정치인들은 여전히 과거의 것에만 집착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국민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한 측면이 컸습니다. 그릇에 담을 콘텐트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이 오로지 ‘반공’, ‘종북’만 외쳐대며 국민의 상식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지금까지 보수가 시속 20㎞로 달렸다면 이젠 40㎞로 속도를 높여야 합니다. 그래야 80㎞로 달리는 진보를 견제하고 우리 사회를 안전속도(60㎞)에 맞출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영국의 보수당이 그 전신인 토리당으로부터 300년이 넘도록 살아남은 이유는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보수정당도 엄청난 대혁신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기득권 정당'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면, 그들이 주장하는 가치와 철학·이념이 국민 다수의 상식과 교양 '뉴노멀'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아울러 새로운 비전까지 제시할 수 있는 내용물을 그릇에 담아야내야만 국민으로부터 다시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 보수정당은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까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인간혁명’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백성이 등돌린 타락한 보수…고려는 결국 그렇게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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