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강천석 칼럼] 김정은 위원장도 모르는 北韓

Shawn Chase 2015. 9. 11. 23:07

강천석 논설고문

입력 : 2015.09.11 22:31 | 수정 : 2015.09.11 22:52

김정은 위원장도 모르는 北韓
통일 대비는 정확한 북한 실태 파악에서 시작
分斷 고통은 책임 分擔으로만 극복 가능

강천석 논설고문
강천석 논설고문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북한 실정을 모른다. 우리도 깜깜하지만 김 위원장의 무지(無知)는 차원이 다르다. 정확한 쌀 수확량을 모른다. 혹독한 겨울을 나는 필수품인 속옷 생산량을 모른다. 주사약과 주삿바늘은 더 말할 게 없다. 처벌보다 당장 입에 풀칠하는 것이 급한 주민들은 가을걷이 양(量)을 줄이고 감춘다. 반대로 생산 목표를 할당(割當)받은 책임자와 감시 기관은 실적을 부풀려 상부에 보고한다. 보고 단계가 많아질수록 통계 조작은 심해진다. 김 위원장 책상 위 통계는 대부분 ‘고무줄 통계’다.

 독재국가에선 통치 수법이 한 단계 가혹해지면 통계 정확도는 한꺼번에 몇 단계 떨어진다. 2000만 소련 국민을 처형하거나 강제수용소에 몰아넣은 스탈린은 그 값을 밀 수확량을 정확히 보고받지 못하는 걸로 치렀다. 후임자 흐루쇼프는 당시 소련의 곡창(穀倉)지대인 우크라이나의 밀 수확 통계가 부정확하다며 자주 화를 냈다. 독재 고삐가 느슨해지면서 통계가 그만큼 정확해진 까닭이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은 모스크바 식품배급소의 감자·달걀·소시지 재고(在庫)가 통계 숫자와 무관(無關)하다는 걸 깨달은 데서 출발했다.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다. 시장의 수요-공급 자동 조절 기능이 없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선 정확한 통계가 생명이다. 통계가 부정확하면 생산과 소비가 엇박자를 낸다. 엇박자가 쌓이면 체제의 기둥이 부러진다. 얼마 전 북한 내각부총리 최영건이 김정은 위원장의 산림녹화 관련 정책 지시가 현실과 동떨어졌다며 불만을 나타내다 총살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현실과 동떨어진 지시’는 ‘고무줄 통계’를 믿고 잘못된 지시를 내렸다는 뜻이다. 독재국가에서 정확한 통계는 불온(不穩)사상 취급을 받는다.

독재국가 울타리 밖에선 안을 정확히 들여다볼 수 있을까. 서독은 통일 전 동독 실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을까. 동-서독 분단 이후 동독 주민 총 480만명이 크고 작은 정보를 지니고 서독으로 넘어왔다. 통일 당시 동독 인구가 1600만명이니 탈출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동독에선 가톨릭·개신교 신도 500만명이 성당과 교회 8000곳에서 매주 주일 예배를 드렸다. 서독 종교계는 30년 동안 53억마르크(한화 약 3조원)를 동독 교회와 성당에 지원했다. 지원금 절반은 서독 정부가 댔다. 정보는 돈이 흐르는 방향과 반대로 흐른다. 성당과 교회는 동독 인권 정보를 서독으로 보냈다.

 동독 주민은 1950-60대 매년 100만명 가까이 서독을 방문했고, 1988년에는 675만명으로 늘었다. 서독 국민 600만-700만명도 매년 동독을 찾아 가족·친지와 상봉했다. 동-서독을 오간 편지는 1970년대 매년 2억통에 달했고 소포 3600만건을 주고받았다. 1988년 서독 기자 19명과 동독 기자 6명이 상대방 지역에 상주(常駐)했다. 동독 주민 90%는 매일 서독 TV를 시청했다.

이런데도 장벽이 무너진 후 서독의 동독에 대한 각종 예측을 채점해보니 모두 낙제점(落第點) 이하였다. 경제의 좋은 지표는 서독 예측의 3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나쁜 지표는 예측을 몇 배 웃돌았다. 세계 10대 공업국이라던 동독 공장은 1960년대 지어진 고철(古鐵)더미였고, 일반 교량의 62%, 철교의 42%, 신호장치의 86%가 사용 기한을 넘긴 위험천만한 상태였다. 주택·의료·교육시설도 사정은 비슷했다. 세계은행(WORLD BANK) 같은 국제기구도 동독 경제가 1979년 영국을 제치고 세계 12위에 올랐다는 보고서를 냈다가 뒷날 망신을 샀다. 눈에 보이는 걸 못 보는데 동독 주민의 마음을 정확히 읽었을 리 없다. 서독과 유럽 좌파 언론은 장벽 붕괴 직전에도 동독 주민의 대부분이 현재 상태에 만족해 산다는 오보(誤報)를 찍어냈다.

예측 실패는 당초 예상을 몇십배 뛰어넘는 통일 비용이란 청구서로 날아들어 독일 경제를 한동안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분단 시절 서독 정부·정치인·국민 모두가 ‘통일은 실현 불가능한 꿈’이라며 ‘먼 훗날의 일’로 치부하고 산 결과다. 그러나 통일의 계기는 시대가 모퉁이를 꺾어돌자 낯선 손님처럼 불쑥 독일 국민 앞에 나타났다.

휴전선을 가른 남북 철책은 동서독을 갈랐던 장벽보다 몇 배나 높다. 우리가 품은 탈북 동포 숫자는 고작 2만5000명 남짓이고, 이산가족 상봉의 기쁨과 슬픔을 맛본 가족도 지난 35년 동안 겨우 4991가족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북한 실정을 모른다 해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통일 대비는 정확한 실태 파악에서 출발한다. 실태 파악에는 정부와 국민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 1990년 10월 2일 헬무트 콜 서독 총리 손을 잡고 통일을 선언했던 동독 마지막 총리 로타어 데메지에르는 “분단(分斷)은 분담(分擔)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했다. 기적만 기다리는 사람과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은 기적을 맞지 못한다. 우리는 기적을 믿으며 기적을 만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