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독일인에게 배운 것들

Shawn Chase 2017. 7. 16. 22:31

[중앙선데이] 입력 2017.07.16 00:07


일상 프리즘

5분 전 도착. 퇴직 후에도 바뀌지 않는 습관 중 하나가 약속시간을 지키는 일이다. 예전엔 운전기사가 시간에 맞춰 자동차로 데려다줬지만 요즘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약속 장소와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을 인터넷으로 검색한 뒤 집에서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꼼꼼하게 계산한다. 초행길엔 20분 더 서둘러서 나온다.
 
10년 넘게 밀레의 한국 법인을 운영하며 독일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듯하다.
 
세계에서 약속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이 독일이다. 독일에선 공기업은 물론 동네 병원을 가더라도 사전에 약속을 해야만 진찰을 받을 수 있다. 또 약속시간을 지킬 때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기업과의 미팅 시간보다 20~30분 일찍 도착하면 근처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내다 5분 전쯤 방문한다. 약속시간보다 20분 이상 일찍 도착하면 상대방 일정이 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직장 내 상하관계에서도 약속문화를 중시한다. 상사가 직원들과 모임을 잡을 때도 사전에 약속 날짜를 정한다. 약속 장소에도 직원들이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제시간에 맞춰서 참석하는 게 상례다.
 
반대로 상식과 다른 독일 문화에 놀라기도 했다. 상당수가 외국회사라고 하면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떠올릴 것이다. 직급을 중시하는 한국과 달리 상사와 직원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편안하게 얘기하는 모습을 언론매체를 통해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처음 독일 본사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먼저 부사장을 만난 뒤 회의실에서 사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사장이 여러 차례 앉으라고 권유하기에 소파에 앉았다. 정작 부사장은 앉지 않았다. 그는 사장이 들어와 앉은 후에야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그 뒤에도 부사장을 유심히 봤더니 호칭은 이름을 부르지만 깍듯이 사장을 대한 것을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았다. 그 후 회사 생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유의할 점이 하나 더 있다. 독일 사람들은 딱딱하고 엄격할 것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유머를 즐긴다. 국내에선 정재계 인사가 참석하는 회의에선 격식있고 품위있는 분위기를 중시한다. 이와 달리 독일사람들은 공식적인 모임에서도 유머를 섞어가면서 얘기를 한다.  
 
유머가 없으면 굉장히 딱딱한 얘기를 듣고 왔다고 말한다. 독일사람과 일을 할 때도 유머를 적절히 구사하는 게 도움이 된다. 과거 독일 본사에서 세운 판매전략이 한국 시장과 맞지 않아 마음 고생한 적이 있다. 결국 독일로 가서 사장과 면담을 했다. 하지만 본사에서 오랜 기간 공들여 세운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쉽지 않았다.  
 
빙빙 말을 돌리다 사소한 유머를 얘기했더니 사장이 즐거운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이때 고민을 털어놨더니 흔쾌히 판매 전략을 바꿔도 좋다고 했다. 끝무렵엔 다음에도 재미있는 얘기를 해 달라는 당부가 있었다. 사실 박장대소할 만큼 웃긴 얘기도 아닌데 사장처럼 독일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호응이 큰 것을 보면 독일 사람들이 유머를 즐기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도 난 시간약속만큼이나 유머를 챙긴다. 매일 한번씩 웃으며 살기엔 유머만큼 좋은 게 없는 듯하다. 
 
 

안규문

DA 300


전 밀레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