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학

만리장성이 달에서 눈에 보이는가?

Shawn Chase 2015. 9. 8. 17:11

출처: http://www.imagediet.co.kr/bbs/board.php?bo_table=m87&wr_id=2079&page=1295


 

중국 만리장성이 달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지구의 유일한 인공 구조물이라는 얘기는 거짓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거짓말에 속아 산 세월을 한탄할 일이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38만 4400km이다. 달에서 보이는 지구는 우리가 보는 달보다 지름이 3.7배쯤 큰 둥그런 공이다. 알렌 빈이라는 우주 비행사가 써 놓은 지구 감상기에 따르면 "지구는 대부분 하얗고(구름), 일부는 푸르며(바다), 군데군데 노란 덩어리가 있고(사막), 또 얼마간은 초록색(산야)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구"일 뿐이다. 그는 덧붙여 "육안으로는 지구의 어떤 인공 구조물도 볼 수 없다."고 썼다.

과학적으로 계산하면, 이 거리에서 최고의 시력을 가진 사람이 식별할 수 있는 이상적인 한계는 새하얀 배경에 두께 700m 이상으로 선명하게 그려놓은 검은 직선 정도이다. 만리장성의 폭은 4m에서 기껏해야 12m를 넘지 않는다. 사실, 만리장성은 달은 고사하고 지구로부터 몇천 km만 멀어져도 보이지 않는다. 만리장성이 보일 정도의 상공이라면 만리장성뿐만 아니라 고속도로, 철도, 운하 같은 다른 인공 구조물도 모두 관측할 수 있다.

NASA(미항공우주국) 관계자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 질문을 해대는 통에 골치가 아플 지경이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1932년 만화가이자 작가이며 중국 애호가인 로버트 리플리는 만리장성이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건조물이라고 했지만 지구표면에서 23.3km이상 올라가면 보이지 않는다. 중국 최초의 우주인 양이위는 2003년 10월 첫 유인우주선 선저우 5호를 타고 우주로 나가 지구 궤도를 선회할 때 만리장성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상철의 중국 읽기] 만리장성은 달에서도 보이는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4.03.03 15:14 / 수정 2014.03.06 10:24

 

 


♣ 둔필승총(鈍筆勝聰)이란 말이 있다. 무딘 붓이 총명함보다 낫다는 이야기다. 책을 보고 며칠 지나면 알갱이는 흩어지고 잔상(殘像)만 남는다. 그래서 몇 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 내용을 공유하고자 한다.

<제6화>『장성의 중국사』 (2008년 2월, 사카쿠라 아츠히데 지음, 강원대학교 출판부)

♨ 중국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만리장성이다. 장성은 흔히 ‘문명과 야만을 가르고, 유목과 농경을 구분’하는 상징으로 표현된다. 장성이라는 용어는 명(明)대 중·후반 일선으로 연결된 변장 곧 성벽이 출현하기 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전엔 주로 요새, 성벽, 변진, 변경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그리고 연결된 벽돌장성은 명 후기에 본격적으로 축조됐다. 한중 관계와 관련해 최근 우려되는 것은 고구려 성곽까지 이 장성에 포함시키려는 중국 일각의 ‘장성 민족주의’라 할 수 있다. 일본 관서학원대학(關西學院大學)에서 명대사(明代史)를 전공한 사카쿠라 아츠히데(阪倉篤秀) 교수의 이 책은 장성의 출생과 변천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장성은 주로 한인(漢人)이 쌓았지만 북위(北魏) 등 많은 북방민족이 중원을 점령한 이후 또 다른 북방민족을 막기 위해 장성을 수축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장성은 어찌 보면 한족(漢族)을 넘어선 동아시아인의 유물이기도 할 것이다. 주요 대목을 정리했다.

☞ “일설에는 (만리장성을) ‘달에서 보이는 인공구조물 중 하나’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속설에 지나지 않는다. 높게 흙을 다진 위에 벽돌로 덮은 명대의 장성이라고 하더라도 그 폭이 단지 10m, 높이도 장소에 따라서 10m 이상인 곳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 이하에 불과하고, 그것이 계속되어 선으로써 연결된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한 곳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달로부터 보이려면 적어도 더 큰 축조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쪽) (촌평: 만리장성이 우주에서도 보인다는 이야기는 2001년 중국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중국인의 자부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2003년 중국의 첫 우주인 양리웨이(楊利偉)가 지구로 귀환한 후 ‘우주에서 장성은 보이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장성이 갖고 있는 여러 신화 중 하나가 깨지고 말았다)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도 진시황조 시대의 장성을 ‘임조로부터 요동까지 연결된 것이 만여 리’라고 하여 처음으로 만리라는 용어를 썼는데, 이것은 정식으로 측량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만리’의 ‘만’은 ‘매우 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시험 삼아 만리를 계산해 보면, 진·한 시대의 단위로는 약 4000Km, 명대의 단위로 계산하면 5600Km가 된다. 리(里)의 길이는 시대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기준을 어느 시대에 두느냐에 따라 1600Km의 차이가 생기기도 한다” (20~21쪽)

☞ “진의 장성은 5000㎞, 한의 장성은 1만㎞, 명나라는 6000㎞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도 개념적인 수치에 불과하며 또한 의견이 통일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역대의 장성 모두를 합산해 보면 5만㎞에 이른다는 설도 있다” (21쪽)

☞ “장성은 1961년 국무원에 의해 제1급 국가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중국의 옥’ ‘역사적 기념비’ ‘세계의 기관(奇觀)‘ ‘중화민족의 유구한 역사문화를 빛내고 중외문화교류를 촉진한다’고 표현되었다. 현재 중국 최대의 신용카드는 ‘장성카드’라고 불리며, 조금 의미가 다르기는 하지만 중국의 남극기지 역시 ‘장성’이라 명명하고 있다” (21~22쪽)

☞ “진에 의한 중국통일 전단계인 전국시대 각국의 기록에 그러한 내용이 나타나는데, 각국은 필요에 따라 국경방어를 위해 장성을 만들었고 통일을 이룬 진나라는 북방방어에 유용한 장성을 교묘하게 이용하였으며, 그것에 새로운 공사를 가하여 새롭게 장성을 수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3쪽)

☞ “중국에서는 벽으로 생활권을 둘러싸는 전통이 매우 오래 전부터 있었다…벽을 ‘성(城)’이라고 하는데, 장성의 ‘성’의 본뜻이 여기에 있다. 상(商)·주(周) 시대가 되면 이것이 발전해서 ‘국(國)’이라는 글자모양 그대로 벽으로 생활권을 둘러싸게 되는데, 곧 도시국가의 출현이다. 더구나 생활권이 확대되어 그 외연부에도 벽이 만들어지자 이중의 벽으로 구성되는 중국 도시의 기본형태가 나타났다. 이때 내측은 ‘성(城)’ 외측은 ‘곽(郭)’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바로 ‘내성외곽(內城外郭)’이다” (23~24쪽)

☞ “장성은 각 시대의 위정자들이 자기가 영유하고 있는 지역을 지키기 위하여 가능한 한 효율성을 고려하면서 군사와 민중을 징발하여 축조한 것이다. 그 출발점은 집단 주거지를 지키기 위한 방호벽인데, 그것이 전국시대에는 국가의 영역을 지키는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진시황제는 이것을 북방 방어라인으로서 구축했다. 이 단계에서 비로소 ‘중국의 장성’이 되었으며, 이것이 다음 왕조 한(漢)에서는 더 먼 서쪽까지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 후의 왕조들 역시 화북을 북방세력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장성을 구축했다” (25~26쪽)

☞ “’점’을 기본으로 하면 그 ‘점’은 계속해서 늘어나 연결되고, 벽을 기본으로 하면 ‘선’이 계속 늘어나 연결된다…청나라의 건륭제는 장성의 장대함을 칭송하고 역대의 노고를 칭찬하면서도 ‘내외일가(內外一家)’라는 한마디로 장성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않았다” (27쪽)

☞ “진왕 정(政) 곧 시황제에 의한 중국통일과 그 후의 정치실행은 2개의 키워드로 설정할 수 있다. 하나는 집권으로, 중앙으로부터의 통제를 확실하게 하는 ‘통일성’이며, 다른 하나는 과거를 넘는 일 곧 새로운 시대의 창조를 계획하는 ‘지금까지 없었던 일(未曾有性)’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41쪽)

☞ “장성수축사업은 노역형에 처해 있던 죄수들에게 부가되었고, 전국적으로 ‘연경체장(年輕體壯)’ 곧 젊고 건장한 사람들이 징발되었다. 그 수는 30만~100만으로 추산된다. 당시 진나라 전체의 인구는 약 2천만으로, 그 중 남자 장정 노동력 인구를 500만으로 계산한다면 대략 50만이 징발된 것으로써, 이것만으로도 전 노동인구의 10분의1이 징발된 것이다. 여기에 장성수축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식량보급 등에 동원된 수를 더한다면 그 수는 더욱 많을 것이다. 게다가 장성 이외의 사업, 예를 들면 아방궁(阿房宮) 건축 공사에 70만~150만, 중국 남부 영남(嶺南)으로의 원정군에 50만이 투입된 것을 합해보면 당시 진은 노동인구의 반수 이상을 국가사업에 투입한 셈이다. 이들 대다수가 농민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농촌은 그 노동력의 반수를 국가에 빼앗겼다는 계산이 나올 수 있다. 이러한 사업들이 다년간에 걸쳐 시행되었다면 농촌의 피폐, 농민의 고초가 컸을 것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45~46쪽) (촌평: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이 왜 이렇게 빨리 망하게 됐는지 이해가 된다)

☞ “장성의 건축은 기본적으로는 ‘판축(版築)’이라는 공법에 의존한다. 판축에서는 황토를 철저하게 저(杵, 흙을 다질 때 쓰는 방망이 같은 도구)로 두드려 단단히 다지고 높이를 확보해 나간다. 그 단단한 정도를 감시하는 역인(役人)이 송곳으로 찔러 확인하였을 정도이며, 호미로 내려찍어도 파손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때와 장소에 따라서 작은 돌과 짚, 또는 붉은 버드나무 가지 등을 섞어 만들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흙을 고정시켜 내구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으며, 어디까지나 굳고 단단한 것이 요구되었다” (49~50쪽)

☞ “주나라의 지배권이 약화되면서 중화세계는 분립의 시대로 들어갔으며 타국과의 싸움을 위한 전술도 종래의 전차(兵車) 중심으로부터 보병과 기마부대로 전환되었다. ‘전차는 천자는 만승, 제후는 천승’이라고 하듯이 ‘승’으로 계산하였다. 전차 한 대는 2~4마리의 말이 끌고 갑사가 10명 배치되는데 3명은 수레 위에, 나머지 7명은 그 곁에 위치하며 뒤에는 보병 15명 정도가 추가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전차를 중심으로 하는 총 25명의 소군단은 평지에서는 위력을 발휘하지만 산과 계곡, 하천 등 변화가 많은 지형에서는…특히 하천 등 수로가 많은 남방에서는 보병이 유효하였기 때문에, 오(吳)·월(越) 두 나라는 신속하게 보병으로 전술을 교체하였다. 북방에 있어서도 산과 계곡에서의 싸움은 보병이 중시되기 시작하였는데, 춘추시대 말기가 되면 여기에 기병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경향에 결정적 계기를 가져왔던 것은 전국시대 북방의 강국인 조나라에 의한 적극적인 기병의 도입이었다. 조나라의 무영왕(武靈王, 재위 기원전 326~299)은 대치하고 있던 동북방의 동호(東胡)와 서방의 임호(林胡), 누번(樓煩) 등의 유목계 민족으로부터 기마와 거기에 상응하는 복장을 도입하고, 기병의 근본적인 개혁을 꾀하였다. 이것을 ‘호복기사(胡服騎射)’라고 한다. 이로써 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군대 구성이 중국에서 행해졌는데 이것은 전술과 복식의 변화뿐만 아니라 방어수법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전국시대 들어서면 제국(諸國)이 종래의 도시국가 형태를 벗어나며, 각국은 국경을 경계로 하는 공방에 힘을 다하였다. 기동력 있는 기마에 대한 유효한 방어수법은 경계선상에서 말이 용이하게 넘어 들어 올 수 없는 높이를 유지하고 있는 견고한 방어벽 곧 장성의 수축이었다” (52~53쪽) (촌평: 장성의 탄생이 중국의 전투 방법의 변천에 따라 이뤄지게 됐다는 설명이 매우 인상적이다)

☞ “진나라 시대 성벽의 대부분은 벽돌이 아닌 해당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일반적인 흙을 이용해 판축공법으로 축조하였기 때문에 세월 속에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61쪽)

☞ “당나라는 중국 대통일의 왕조로 그 영토의 넓이는 한나라를 훨씬 능가하였다…이미 역대의 장성 선은 완전하게 내지가 되었고 영토의 방어를 위해 장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새롭게 포함된 영역에는 도호부를 설치하여 이민족 통치를 시행하였다. 이른바 ‘기미(羈?)정책’이다…당나라는 진·한과 나란히 중화를 대표하는 통일왕조이면서도 장성수축에서 보면 공백의 시대였다” (82~83쪽)

☞ “전국시대로부터 진·한에 이르는 장성은 말할 것도 없이 북방민족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하여 중화를 지배하는 한인(漢人)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이에 대하여 북위의 장성은 본래 방어의 대상이었던 북방민족 선비가 중화에 들어와 왕조를 열고 북으로는 유연, 남으로는 오호의 잔존 세력으로부터 수도 평성을 핵으로 하는 국가의 중심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장성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북위의 경우는 바로 ‘중화는 확대된다’는 말을 체현시킨 것이다” (102~103쪽) (촌평: 장성은 주로 한인이 쌓았지만 북방민족 역시 장성을 수축했다는 대목이 적지 않은 상념을 일으킨다)

☞ “금나라의 북방 방어선은 땅을 판 참호를 중심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판축에 의해 토벽과 고대(高臺)를 갖춘 보(堡)가 부가적인 형태를 구성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계호(界壕)라고 불렸다…청나라는 그 옛 땅이었던 동북지방을 몽골, 나아가 한인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유조변장(柳條邊墻)이라는 경계선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그 규모와 형태로부터 장성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127~128쪽)

☞ “진나라 이래 중화세계의 주축을 담당한 한민족은 영역을 지키기 위하여, 또는 좋게 말하면 그 이상 북방으로 진출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신의 한계선으로써 장성을 수축해왔다. 그러나 내부의 세력이 성장하면 자신들이 그 한계선을 넘어서 북방세계로 진출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확대정책은 주변민족의 각성을 낳고 긴 안목에서 보자면 중화세계에 피해를 가져왔다. 그 의미로 말하면 시대에 따라 그 위치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장성 라인이 중화세계의 구분을 알리는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129쪽)

☞ “명의 위환(魏煥)은 변장의 중요성을 지적했다…유목민은 이동을 싫어하지 않아서 그들이 집단을 이루어 침공한다면 이미 그들에 대한 대응책은 없었다. 그러므로 중국은 늘 열세 속에서 재물을 보내 평화를 유지하였다…위환은 중화세력이 공세를 가하여 멀리 북방민의 본거지를 공격하였으나 그다지 효과가 없었으며, 국내가 피폐해지고 결국은 멸망에 이르렀으므로, 진(秦)과 수(隋)의 북방대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융적을 막는 것을 상책으로 한다’며…산천구릉 등 지형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변장을 수축하는 일의 효용성을 지적하였다” (134~135쪽) (촌평: 북방민족의 침입에 늘 대비해야 했던 중국의 고민이 읽힌다)

☞ “(15세기 중반 명나라에 여자준이 등장하며 장성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과거 변장은 보와 돈대를 보조하는 역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높이가 낮고 또한 견고하지 못했으며 몽골세력이 그것을 무너뜨리고 침입하는 일은 쉬웠다…그러나 여자준(余子俊)의 제안은 전혀 다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곧 변장을 종래와 같이 보조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변장 그 자체를 방어의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보와 돈대라고 하는 ‘점(点)’을 각 요소에 설치하고 그곳에 대량의 군사를 배치하는 일을 중심으로 하는, 즉 변장이 그들을 보조한다는 생각방식을 완전히 역전시켜, 변장이라는 ‘선(線)’을 중심으로 하고 점을 보조로 함으로써 배치되는 병력 수를 대폭 삭감시킨다는 점에 중요한 특징이 있었다. 여기에 여자준의 독자성과 획기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206~207쪽) (촌평: 장성이 과거 보(堡)와 돈(墩)이라는 점에서 변장(邊 牆)이라는 선으로 변하며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설명돼 있다)

☞ “장성 수축의 기본은 ‘인지제의(因地制宜,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하여 적절히 제어한다)’의 말로 집약된다. 즉 땅마다 이용 가능한 지형은 최대한 이용하고 산지 등 일부는 깎아서 벽으로 막았으며 저지대 등은 깊게 파 내려가서 진입을 방해하였다. 또한 이용 가능한 지형이 적은 평지에서는 그 지역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재료를 사용해서 벽을 만들었다” (241쪽)

☞ “북방민족에게 장성은 큰 방해물이었으며 그것을 돌파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중국측은 경제적 부담과 대량의 인력투입을 각오하면서 그 수축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장대한 벽과 그 부속설비인 적대 등이 정비되었다고 하더라고 그것으로 방어체제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방어 기능을 살리는 것도 또 죽이는 것도 모두 거기에 상주하는 수비병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마지막은 ‘사람’인 것이다” (247쪽) (촌평: 세상 모든 일이 사람에 달려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아무리 시스템이 잘 돼 있으면 뭐 하나. 결국엔 사람이 하기에 달려 있는 것을)

☞ “’왜 장성이 만들어졌는가’라고 하는 소박한 의문에 간단하게 답한다면, 그것은 ‘중화세계를 방어하기 위해서’가 될 것이다…진나라의 장성선은 확실히 중국 통일과 안정을 유지하면서 가능한 한계의 영역을 확보한 북쪽 한계의 설정이었다…중국 측에서 보면 이 장성 라인은 양보할 수 없는, 동시에 스스로 정한 북쪽 한계선이다…유목측에서 보면…중화세계와의 통로, 특히 중국의 상품을 확보하려는 욕구는 지속되었다. 이것을 안정적으로 충족시킨 것이 ‘호시(互市)’라 불리는 평화적 교역이었다. 명대에는 그 대표적 교역품을 취해서 ‘다마무역(茶馬貿易)’이라 불렀지만, 차와 말이라는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보충한다는 점에서 서로를 유지시켜주는 관계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균형관계가 무너지면 상황은 일변하여 북방으로부터의 군사행동 또는 중국 영내에서의 약탈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장성에는 또 하나의 측면, 즉 북방 방어선의 최전선이라고 하는 기능이 부가되었다. 다만 처음에는 북방민족의 동향을 재빠르게 감지하고 그 정보를 후방의 주둔기지로 전하여 신속하게 대응 조치를 강구하는 파수대가 설치되었다…(이후) 파수대의 방어 기능을 더욱 높이지 않으면 안되었고, 목표가 되기 쉬운 벽의 양쪽 날개 부분도 증축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주둔기지이기도 한 파수대라고 하는 ‘점(点)’을 기폭으로 그 사이를 벽으로 연결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것은 명대에 발상을 전환해서 벽(변장)이라고 하는 ‘선(線)’을 주체로 하고, 그 주위에 주둔 기지를 존재시키는 수법으로 변화되어 현재 우리가 보는 장성의 모양이 되었다. 최소한의 필요로 했던 벽을 만든 일이 벽을 연결할 필요를 낳았고, 그것이 또 높이나 폭을 포함한 벽의 대형화와 견고화로 나아갔다. 그 결과가 확실히 장성의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는 명대의 변장을 출현시켰던 것이다…(그러나) 명나라가 붕괴하고 청(淸)의 시대가 되면, 장성은 유물의 시대로 들어간다” (259~261쪽) (촌평: 장성의 역사가 간단 명료하게 정리돼 있다)

유상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