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뉴스 속의 한국사] 용산 미군 기지 자리에 청나라·일본 군대도 주둔했죠

Shawn Chase 2017. 5. 30. 08:15

입력 : 2017.05.30 03:16

[용산 미군 기지]

110여년간 외국군 머문 용산 기지… 올해 말부터 용산공원으로 조성
고려 때에는 원나라 군대가 머물며 일본 원정 준비하는 병참기지 꾸려
조선 말 청나라·일본 군대 주둔… 6·25전쟁 후 미군 기지 되었어요


서울 용산 미군 기지는 8·15 광복 후부터 미군이 주둔한 곳으로 한·미 동맹과 두 나라의 군사 협력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 한가운데 넓은 지역이 미군 기지로 활용되면서 주변 지역의 발전과 강북과 강남을 잇는 교통을 방해한다는 지적이 있었지요.

이에 한·미 두 나라는 여러 차례 협의를 거쳐 올해 말까지 용산 미군 기지를 경기도 평택·오산으로 완전히 이전하기로 했습니다. 미군이 이전하고 빈 용산 미군 기지 자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여러 시설이 들어서게 되지요. 이에 용산공원을 어떻게 꾸릴지를 두고 여러 논의가 나오고 있습니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용산에는 미군이 주둔하기 전에도 외국 군대가 주둔했던 역사가 있어요. 오늘은 용산에 얽힌 역사 속 이야기를 함께 알아보도록 합시다.

◇'용을 닮은 산' 주변을 원나라 군대가 차지하다

"봉우리가 굽이굽이 서려서 형상이 푸른 이무기 같다."

[뉴스 속의 한국사] 용산 미군 기지 자리에 청나라·일본 군대도 주둔했죠
/그림=정서용
고려시대 학자 이인로가 용산(龍山)의 모습을 묘사한 글이에요. 오늘날 마포구와 용산구에 걸쳐 있던 산지의 봉우리와 산세가 마치 용, 이무기를 닮았다고 해서 용산이라고 불렀지요. 조선시대에는 집현전 학자들이 공부하는 독서당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일대에 주택가가 형성되면서 현재 산으로서의 풍경은 사라진 상태예요.

용산은 예부터 한강을 끼고 있어 경치가 뛰어나고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졌어요. 조선시대 초에는 조세로 거둬들인 곡식을 조운선이 운반해 용산에 있던 창고에 보관했고, 나라의 군수물자와 군량미를 보관하는 특별 창고도 오늘날 원효로3가인 용산 지역에 설치되었지요.

하지만 도성과 아주 가깝고 한강과 마주하고 있는 용산은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외국 군대의 주둔지가 되는 일이 잦았어요. 용산에 처음 외국 군대가 주둔한 것은 고려 때입니다. 13세기 말 중국에 원나라를 세운 몽골 황제 쿠빌라이 칸은 고려를 침략하고 고려의 왕을 자신의 사위로 삼았어요. 그리고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병참기지를 용산 일대에 두었습니다. 병참기지란 군사작전에 필요한 병사와 인력, 군수물자를 보급·지원하는 부대의 근거지를 말하지요. 원 간섭기에 용산은 원나라가 고려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고려의 물자를 약탈하는 중심지였던 것이죠.

◇조선 말기에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이 주둔

조선시대에도 용산은 외국 군대의 주둔지가 되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임진왜란 시기에는 왜군 장수 고니시가 평양 전투에서 패한 뒤 가토가 이끄는 군대와 합류해 오늘날 용산 원효로, 청파동 일대에 잠시 주둔하기도 했어요.

용산에 본격적으로 외국 군대가 주둔하게 된 건 조선 말기입니다. 1882년 신식 군대와의 차별을 견디지 못한 구식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 3000여 명이 용산에 주둔하게 되었어요. 구식 군대가 난을 일으키자 궁 밖으로 탈출한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구원 요청을 하였어요. 당시 청나라 황제는 명성황후의 구원 요청이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으로 만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용산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는 임오군란의 배후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을 강제로 납치해 청나라에 보내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면서 용산에 머물던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고 일본군이 용산 일대에 주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도 용산에 주둔하던 일본군들이 동원되었지요.

◇일제 강압 통치의 중심에서 미군 기지로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일본은 용산 일대에 일본군 수만 명이 주둔할 수 있는 병영을 지었어요. 일본은 친일파 이지용과 맺은 한일의정서를 내세워 용산 지역 땅 300만평을 헐값에 차지했고, 이 중 115만평을 군사기지로 사용하였어요. 이후 용산에는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와 조선총독부 관저, 일본 20사단 사령부가 설치됐고 약 2만명의 일본군이 주둔했습니다. 용산은 일제가 한반도를 무력 통치하고 만주를 침공하는 후방 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 제7사단이 용산 내 일본군의 주요 시설을 접수하고 잠시 머물렀어요. 7사단은 곧 용산에서 철수하였지만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미군이 다시 한반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그해 8월 15일부터 용산에는 주한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지요.

[한일의정서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제국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대한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한일의정서라는 조약을 강제로 맺도록 했습니다. 1904년 2월 23일 발표된 한일의정서에는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에 충분히 편의를 제공하고, 일본은 이 목적을 위해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일정 기간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어요. 일본은 이 조항을 앞세워 용산에 대규모 군사기지를 세우고 일본군사령부와 조선총독부의 총독이 머무는 관저 등을 세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