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이야기들

“아이 같은 남편, 내가 보호해줘야죠”

Shawn Chase 2016. 11. 13. 10:12

캐나다에서 나고 자란 강주은 씨는 사고뭉치로 유명한 배우 최민수와 결혼해 한국에서 산 지 어느덧 23년이다.
그는 오랫동안 ‘최민수 아내’로 불렸다. TV조선 ‘엄마가 뭐길래’에 가족과 출연하면서 ‘갓주은’‘우먼크러시’
‘깡주은’ 등으로 시청자에게 사랑받으며 요즘은 최민수를 '강주은 남편'이라 불리게 할 만큼 유명해졌다.

입력 : 2016.10.08 07:56

[WHY: 송혜진 기자의 느낌]
 

방송활동 1년만에 ‘갓주은’ 별명
최민수만큼 유명해진 아내 강주은


“네! 초끔 바빴어요. 강연 요청도 좀 많았고요. 만나면 다들 눈을 빛내면서 물어보셔요. ‘어떻게 그런 남편하고 그렇게 잘 사냐’고요. 롸잇(right·알만 하죠)?” 강주은(45)이 우리말 ‘ㅈ’을 발음할 때면 여전히 [j]나 [ch]에 가까운 소리가 났다. 그게 휘파람처럼 들렸다.

캐나다에서 나고 자란 그가 사고뭉치로 유명한 배우 최민수와 결혼해 한국에서 산 지 어느덧 23년이다. 그는 오랫동안 ‘최민수 아내’로 불렸다. 그런데 요새는 반대다. 3일 서울 방배동 서래마을에서 만난 강주은은 “맞아요. 사람들이 이젠 남편을 보면 ‘강주은 남편이다!’라고 해요”라면서 웃었다.

TV조선 ‘엄마가 뭐길래’에 가족들과 다 같이 출연한 지도 1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방송에서 강주은은 남편 최민수를 비롯해 큰아들 유성(20)과 둘째아들 유진(15)을 말 한 마디, 표정 하나로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서 얻은 별명도 ‘깡주은’ ‘우먼 크러시’다. 그렇다고 그가 소리를 치거나 화를 내는 것도 아니다. 아들이 고민을 털어놓으면 걱정 섞인 표정을 짓거나 잔소리를 늘어놓는 대신, “말해줘서 고맙다”면서 일단 아들의 손부터 잡는 게 강주은식 화법이다.

강주은은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매로도 웃고, 큼직한 입으로도 웃고, 구김살 없는 표정으로도 웃었다. 서울 방배동 서래마을에서 만난 강주은은 화장기 없는 얼굴로 환하게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저는 어떻게 찍어도 사진이 잘 안 나와요. 그래도 정말 열심히 찍어요. 뭐든 그러면 된 거죠, 롸잇(right)?” /김지호 기자

결혼 23년간 내가 더 성숙
세상 가식이라는 건 모르는
남자와 맞춰 살다보니
어느 순간 자유로워져

99명의 엄마가 가지 않는 길
큰아들이 학교 안가겠다 하자
“힘든 얘기 해줘서 고마워” 답해
천번은 절 죽이고 꺼낸 말이죠

그래서일까. 요즘 강주은은 ‘관계 전문가’로 제2의 인생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최민수의 사생활을 묻지 않는다. 가족과 터놓고 대화하는 법, 아이를 열린 마음으로 키우는 법, 남편을 이해하는 법에 대해 묻는다. 강연 부탁이 늘어간다. 책을 써달라는 요청도 있다고 했다. 강주은은 “제가 완벽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더 현실에 가까운 답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모양이에요”라고 말했다. “아시다시피 정말 알 수 없는 게 결혼생활이니까요. 그렇죠?” 다시 휘파람 소리가 났다.

결혼, 그 전쟁과 평화

―저도 그럼 물어보죠. 어떻게 그런 남편과 그렇게 잘 사십니까(웃음).

“(두 손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이렇게 완벽하게 내려놨으니까요(웃음)! 모든 면에서 특별한 이 남자를 내가 보호해주자고 결심했거든요. 사회생활을 너무 모르고, 가식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이 남자, 남들에게 예의상 하는 말을 할 줄 모르는, 그만큼 순수한 이 남자를 내가 돕지 않으면 누가 도와줄까, 그렇게 생각한 거죠.”

―순수하다는 게 결국 아직도 어른이 아니라는 얘기 아닌가요.

“이그잭틀리(exactly·정확히) 맞아요. 결혼 초기엔 제가 맨날 남편에게 그랬어요. ‘아니 왜 맨날 나만 세상 가식 다 떠안고 살아야 하는 거야? 누군 맘대로 살고 싶지 않아서 이러고 살아? 나까지 오빠처럼 살면 세상 사람들이 다들 없어지라고 그래.’ 그런데 어느 순간 알아차렸어요. 이 남자는 못 바꾼다는 걸요. 제가 적응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부딪히면서 살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선택은 둘 중 하나뿐이었어요. 죽도록 싸울 것이냐, 아니면 이 남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제가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이 남자가 저를 정말 끔찍하게 사랑한다는 사실이었어요. 결국 항복했죠. ‘받아들이자.’ 그렇게 이 남자가 세상의 기준과 반대로 가는 사람이라는 걸 온전하게 이해하고 나니 그 후론 다 편해지더라고요.”

/강주은 제공

강주은이 최민수와 만난 건 1993년 미스코리아 캐나다 진에 뽑히면서다. 당시 웨스턴온타리오대학교 생물학과 학생이었던 그는 치의학 전문대학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성적만큼이나 다양한 활동 경력을 중시하는 외국 대학원 면접에 대비하기 위해 미스코리아 지원서를 넣었는데 덜컥 진이 돼버렸다고 했다. 엉겁결에 서울 본선까지 나와 남들처럼 가발을 쓰고 무대에 올랐다. 그곳에서 최민수와 마주쳤다. 강주은이 캐나다로 떠나기 하루 전날, 최민수가 “방송국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전화를 걸어왔고, 만난 지 세 시간 만에 강주은에게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그러니까 그게 첫사랑이었던 거죠.

“아, 첫사랑이라는 표현보다는 납치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요! 민수씨는 그때부터 거의 매주 캐나다 우리 집에 찾아왔어요. 비행기 타고 날아와서 점심만 먹고 다시 돌아가고(웃음). 처음부터 넙죽넙죽 우리 엄마 아빠에게 ‘어머니’ ‘아버지’ 하면서 애교 부리고(웃음). 사실 저는 워낙 경쟁심도 강했고 빨리 성공하고 싶었던 여학생이었거든요. 그런데 정말 생각지도 않게 한국 남자를 만나서 22세에 결혼하게 된 거죠. 그때부터 인생이 하루도 드라마틱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요(웃음).”

―신혼 때는 다들 많이들 싸우지 않나요. 뭐로 싸웠죠.

“남편은 스스로 남자라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이 큰 사람이었어요. 저는 한 번도 경쟁에서 지고 살아본 적이 없으니 솔직히 그게 보기 싫었고요. 막 혼내주고 싶은 거예요. ‘웃겨, 남자가 뭐라고’ 그랬죠. 그런데도 사람들은 저를 미스코리아로만 보니 답답하더라고요. 그래서 한번은 남편과 같이 방송 프로그램에 나갔는데, 일부러 머리를 싹둑 자르고 남자처럼 정장을 입고 나갔어요. 미스코리아처럼 안 보이려고요. 또 어떤 날은 남편이 저를 오토바이 뒷좌석에 태워주겠다고 했는데, 제가 엄청 화를 냈어요. ‘뭐야, 내가 미스코리아니까 뒤에 타라 이거야? 나보고 매달려 있으라고? 싫어! 나중에 내가 직접 탈 거야!’ 했죠.” 실제로 강주은은 6년 전 오토바이 운전면허를 땄고 지금도 종종 오토바이를 몰고 다닌다.

“내가 민수씨 길들였다고요?…
천만에, 내가 길들여졌죠”
1993년 캐나다에서 결혼을 준비하던 최민수와 강주은의 모습(왼쪽). 2015년 겨울 두 아들과 함께 전시회에 들러 그림을 둘러보고 있는 강주은(오른쪽). /강주은 제공·이진한 기자

남편과 달랐던 가족관
불행한 가정서 자란 남편
완벽한 가장 역할 꿈꿔
난 부모님과 자주 토론
화목함에 익숙하지만…

속마음 만화로 그리다
대화 내용·내 생각 그려
남편에 보여줬더니
그러한 과정 겪으면서
민수씨도 점차 달라져

방송에 나온 이유
‘내가 남편에 맞고 산다’
하도 이상한 소문 많아
그런 부분 불식시키려
적극 출연하게 된 것

―가족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달라 힘들었던 적은 없나요.

“많죠. 남편은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만큼이나 완벽한 가정의 그림을 머릿속에 넣고 그대로 실천하고 싶어했어요. (최민수의 아버지는 배우 故최무룡, 어머니는 배우 故강효실이다. 두 사람은 최민수가 태어난 이듬해 헤어졌다.) 가령 아버지는 거실에 앉아 멋진 말을 하고, 어머니는 그 말을 들으면서 요리를 하는 그런 그림 있잖아요. 반면 저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부모님이 자주 토론하고 말다툼하고 또 화해하는 진짜 가족의 모습을 보고 자랐거든요. 그러니 남편의 꿈을 들으면서 옆에서 ‘이건 정말 아닌데…’ 싶었던 거죠. 한국말이 짧으니 도저히 다 말로는 못 하겠고, 결국 속마음을 만화로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걸 남편에게 보여줬더니 남편이 깜짝 놀라면서 ‘아니, 당신 이런 생각을 했었어?’라고 하더라고요. 그 과정을 겪으면서 남편이 천천히 달라졌고요. 지금은 그야말로 온전히 제게 결정권을 내주고 살죠(웃음).”

―결국 비결은 속마음을 제대로 전한 데 있다는 건가요?

“백퍼센트 그거예요. ‘혹시 속상해? 그거 다른 데서 풀 것 없어. 나한테 와서 풀어’ ‘혹시 욕하고 싶어? 내 앞에서는 마음껏 속 시원하게 욕해도 돼. 다른 데서 못하는 욕 여기서 실컷 해.’ 우리는 이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이가 됐어요. 세상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끼리만큼은 다 내려놓고 다 풀어놓을 수 있어요. 가족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안전지대가 된 거죠. 결코 하루아침에 가능했던 건 아니었지만요.”

99명의 엄마가 가지 않는 길

지난 6월 인터넷 게시판과 블로그엔 ‘갓주은의 대화법’이라는 제목으로 강주은의 화법이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다. 캐나다 토론토대 정치학과 2학년으로 재학 중인 큰아들 유성군이 갑자기 엄마에게 “여름방학이 끝나면 학교로 돌아가지 않겠다. 휴학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이 방송을 탔기 때문이다. 당시 강주은은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묻는 대신 아들의 손을 잡고 “힘든 얘기를 엄마에게 해줘서 고마워”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럼요. 천 번은 절 죽이고 억누르고 꺼내는 말이죠. 솔직히 저도 ‘유성아, 엄마가 네 인생의 선배잖아?’라는 말부터 불쑥 꺼내고 싶죠. 왜 아니겠어요. 그런데 제겐 늘 그런 마음이 있어요. 만약 엄마 100명이 있다면, 그런데 99명의 엄마가 모두 자식에게 같은 방향으로 가라고 얘기한다면, 나는 혼자 ‘다른 길로 가라’고 말하는 용기를 내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그런 마음요. 게다가 요새는 보증이라는 게 없잖아요. 학교, 직업, 뭘 어떻게 골라도 삶이 제대로 굴러갈 거라는 보증 말이에요. 만약 내 아이가 ‘엄마 아빠가 원하는 걸 다 해냈는데도 왜 나는 불행하지?’라고 묻는다면 제가 뭐라고 답할 수 있겠어요. 항상 그것부터 생각해요. ‘나는 그 답을 줄 수 없다. 그 답은 내 아이가 찾는 거다’라는 사실을요. 제 부모님이 저를 또 그런 방식으로 키워주셨고요.”

/정재근 기자

강주은의 아버지는 화학자였고 어머니는 한국 대기업 캐나다지사 간부였다. 50년 전 캐나다로 이민 간 부부는 외동딸인 강주은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줬다고 했다. 매일 저녁 세 가족이 함께 모여 저녁을 먹었고, 밥상에선 항상 강주은에게 “네가 한국말을 잘 못할지라도 한국 사람임을 잊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했다. 강주은은 “다 가진 환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배고픔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남에게 사랑을 줄 줄 아는 사람으로 커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네가 사랑을 조건 없이 준다고 해서 상대방이 그 사랑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실망하지 말라’는 말씀도 항상 해주셨다”고 말했다.

―그럼 유성이와 유진에게도 그런 걸 가르칩니까.

“다른 아이를 돌아보라고 가르쳐요. 아이가 학교 끝나고 돌아오면 물어봐요. ‘오늘 학교 어땠어? 오늘 힘들어하는 아이 있었니? 왕따는 없었니?’ ‘없었다’고 하면 ‘만약 있으면 네가 가서 꼭 도와주라’고 말하고요. 그래서인지 언젠가 학교에 갔더니 상담선생님이 제게 그러더라고요. 아이들이 유독 유성이와 유진이에게 의지하고 따른다고요. 그 말만큼 절 가슴 벅차게 한 말도 없었죠.”

―유성이가 고3일 때도 연극 활동을 계속 하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서울외국인학교에 다녔는데, 아무리 외국인학교지만 고3 때는 다들 입시학원을 보내거든요. 저는 학원 안 보내고 그냥 계속 동아리활동을 하게 했어요. 졸업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유성이가 로미오를 맡았는데, 주위 학부모들이 엄청 걱정했어요. 누가 고3 때 주인공을 해요. 다들 아이 붙들고 ‘너 정말 학원 안 가고 연극이나 하고 있어도 되겠니’ 했나 보더라고요. 유성이가 ‘엄마, 나 괜찮은 거야?’라고 묻길래, 제가 ‘걱정 마. 대학보다 경험이 더 중요한 거야’라고 했죠. 다행히 그해 겨울에 유성이는 지원했던 대학을 다 붙었고요. 그때 유성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맘! 엄마 덕분에 나는 정말 아이답게 즐겁게 학교 다녔고 하고 싶은 것 원 없이 다 해볼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마워요!’라고요.”

나는 오늘도 당신이 새롭다

강주은은 최근 남편 최민수와 함께 열흘 동안 캐나다 친정에 다녀왔다. 강주은은 그곳에서 지난 23년 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최민수의 또 다른 모습을 봤다고 했다.

―23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새로운 모습을 볼 게 있습니까.

“그러니까 말이에요(웃음)! 사실 제겐 이루지 못한 로망이 하나 있었거든요. 남편과 원 없이 정치토론을 한 번 해보는 거였어요. 외국에선 다들 그런 토론을 열심히 배우고 크는데 한국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남편은 제게 한 번도 ‘내가 이런 걸 안다’고 뻐기거나 잘난 척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이번 생엔 그런 남편과 사는 건 힘든가 보다, 그렇게 체념하고 살았단 말이죠. 그런데 이번에 캐나다에서 남편이 저희 이모부님과 미국 TV 대선 토론 프로그램을 보면서 정치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2시간 내내 막힘없이 토론을 하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정말 깜짝 놀랐어요. ‘23년을 살았는데도 내가 모르는 모습이 있다니!’ 했죠.”

―결혼이란 참 오묘한 거네요.

/김지호 기자

“사실 방송을 시작한 이유는 주위에서 하도 ‘강주은이 최민수에서 맞고 산다’는 소문이 많아서였어요(웃음). 우리 그런 부부 아니라는 것 보여주려고요! 이젠 다들 저희 부부의 모습을 어느 정도 알게 됐지만, 여전히 전부 다 알 순 없을 거예요. 여전히 다들 그래요. ‘그렇게 천방지축 어디로 튈 줄 모르는 남자를 어떻게 잘 다스리며 살아왔느냐’고요. 사실 지난 23년 동안 성숙해진 건 오히려 남편이 아니라 저였는데 말이죠. 저는 남의 시선과 체면을 굉장히 신경 쓰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제멋대로 사는 남자와 살다 보니 오히려 어느 순간 제가 자유로워졌다는 걸 알게 됐어요. 가령 저는 이제 화장을 거의 안 해요. 남편이 못 하게 해서요. ‘준, 화장하지 마. 어때? 세상 사람들이 다 한다고 당신까지 할 필요 없어. 자유로워져.’ 그런다고요. 이런 일에 익숙해지면서 내가 소위 체면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걸 알았어요. 뜻밖에도 이 남자 철학이 제 삶에 잘 맞았던 거죠. 인정하기 싫지만요(웃음).”

―강주은을 만든 건 결국 최민수였다는 건가요.

“네. 남들은 강주은이 최민수를 길들였다고 생각하겠지만 알고 보면 그 반대인 거죠(웃음). 사실 남편은 콤플렉스가 굉장히 많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사랑을 받고 주는 법을 배우지 못했죠. 그럼에도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이걸 솔직히 다 인정하고 내려놓고 제게 모든 것을 맡겨왔어요. 이제 우리 부부는 싸우는 게 더 힘들어요. 남편은 웬만하면 제게 발톱을 세우려 들질 않거든요. 언젠가 제가 ‘오빠, 우린 팀이잖아! 팀이니까 이건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라고 외친 적이 있어요. 그때 남편이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준아, 그것 참 멋진 말이다!’”

―남은 결혼생활은 어떨 것 같은가요.

강주은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칼릴 지브란 아시죠?” 했다. 그러고는 〈예언자〉의 한 구절 “서로의 잔을 채우되 한 잔으로 같이 마시지는 마십시오. 서로에게 자신의 빵을 주되 한 덩어리를 같이 먹지는 마십시오”를 읊어 보였다. “전 이 말 참 좋아해요. 부부끼리는 그렇게 서로의 공간이 필요하고, 서로를 굳이 소유하려고 들면 안 된다는 것. 지난 23년 동안 이걸 익히 배웠으니 남은 시간은 이걸 실천해보려고요.” 최민수처럼 대답하고 싶어졌다. 그것 참 멋진 말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