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및 연예

"한강은 내 글 안 읽지만… 난 딸의 애독자"

Shawn Chase 2016. 10. 16. 13:55

정상혁 기자

입력 : 2016.10.13 03:00

[등단 50주년 맞은 소설가 한승원]

"딸은 나랑 전혀 다른 세계 그려"
새 장편 '달개비꽃 엄마' 출간… 모친에게 받은 사랑 글로 풀어내


무덤을 팠다. 자궁처럼 까만 구덩이가 생겼다. 어머니의 유골을 놓고 흙을 덮었다. 새로 솟은 봉분이 만삭의 임신부 같았다. "거기서 어떤 여신(女神)의 몸짓을 느꼈어요. 어머니라는 존재가 마치 노자가 말한 천지근(天地根), 우주적인 자궁 같았죠."

새 장편 '달개비꽃 엄마'를 펴낸 소설가 한승원(77)씨가 말했다. 올해 등단 50년을 맞은 그는 "이 소설로 50주년을 자축하고자 했다"고 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어머니에 대한 헌사예요. '어머니 깊이 읽기'라고 할 수도 있겠죠. 이른바 '자궁 권력자'로서의 어머니."

전남 장흥군 회진면 신덕리 고향 마을에 99세로 세상을 뜬 모친을 묻고 돌아온 3년 전, 이 소설은 잉태된 것이다. 그는 책에 "산수(傘壽·여든 살)의 나이를 눈앞에 둔 내가 쓴 이 자전적인 소설이 이때껏 써온 소설들의 총체"라고 썼다. 어머니 박점옹 여사가 자식 11명을 낳고 키우고 스러져간 일대기가 신화처럼 펼쳐지며 동시에 한씨의 과거를 반추한다. "나이 들면서 세상을 신화처럼 보게 돼요. 신화학자들이 그러대요. 신화는 진리는 아니지만, 진리를 낳는 자궁이다."

11일 전화 통화를 나눈 한승원씨의 목소리는 강하고 젊었다. 현역으로 살기 위해 몸 관리에 힘쓴다고 했다. “산책을 자주 해요. 바닷가를 열심히 걷습니다. 살아 있는 건 생물학적 생명이고 글을 쓴다는 건 작가적인 생명이죠.”
11일 전화 통화를 나눈 한승원씨의 목소리는 강하고 젊었다. 현역으로 살기 위해 몸 관리에 힘쓴다고 했다. “산책을 자주 해요. 바닷가를 열심히 걷습니다. 살아 있는 건 생물학적 생명이고 글을 쓴다는 건 작가적인 생명이죠.” /문학동네


지난해 10월엔 아버지를 주제로 한 장편 '물에 잠긴 아버지'를 냈다. 남로당원 아버지를 둔 한 남자의 곡진한 일화를 고향 땅의 현대사로 끌고 들어간 소설이다. "아버지는 신의 또 다른 이름 같아요. 태초의 씨앗. 역사 속에서 살아남아 어떻게 역사를 잇는가 얘기하고 싶었죠." 이 소설은 한씨의 유일한 희곡 발표작 '아버지'(1998)에서 파생한 것이다. 지난 7일 장흥에서 열린 그의 50주년 축하 행사에서 상연되기도 했다.

부모를 받드는 건 일종의 채무 탕감이었다. "생명을 비롯해 무수히 받았잖아요. 빚 갚는 심정으로 살았어요." 한씨는 교편을 잡으며 소설을 쓰며 번 돈으로 일곱 남매를 건사했다. 사실상 가장이었다. 막냇동생 시집갈 땐 서울 상계동에 아파트까지 해줬다. 유달리 자신을 예뻐한 어머니의 부탁을 그는 하나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내가 많이 고달팠을 거예요. 아주 순한 아내. 그러니 훌륭한 자식들을 낳은 거라고 생각해요."

한씨의 딸인 소설가 한강.
한씨의 딸인 소설가 한강.







이제 그가 세대를 물려줄 차례가 됐다. 한씨는 신작이 나오자마자 소설가인 딸 한강(46)씨에게도 한 권을 보냈다. 딸이 워낙 바빠 지난 5월 맨부커상 수상 이후 얼굴 본 게 딱 한 번이다. "걘 책 보내줘도 안 읽어요. 아버지 글이랑 닮았다는 얘기 절대로 안 들으려고. 근데 저는 딸 책 열심히 읽어요. 그러곤 깜짝 놀라죠. 나랑 전혀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구나."

거의 매년 작품을 발표 중인 노작가는 지칠 줄 모른다. "차기작은 노년을 힘차게 사는 사람들의 얘기를 쓸 거예요. 내가 여든 살 되는 2018년에 내기로 출판사와 약속했어요."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나 공복의 맑은 정신으로 매일 30분씩 글을 쓴다. 그가 '토굴(土窟)'이라 부르는 작업실에서다. "다작(多作)이라고 하는데, 늙어보니까 뭐라도 안 하면 노인성 우울증에 빠지더라고요. 소설 쓰는 데 정년이 없으니 다행이에요."

몇 년 전, 한씨는 마당 잔디밭에 난 잡초를 뽑아 동백나무 밑에 쌓아뒀다. 그중 달개비만 혼자 살아남아 남보랏빛 꽃을 피워냈다. "저는 글을 쓰는 한 살아 있고, 살아 있는 한 계속 쓸 겁니다. 아직 안 끝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