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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잠수함 침투사건 20주년..잡힌자와 잡은자 서로가 "생명 은인"

Shawn Chase 2016. 9. 18. 11:43

무장공비 이광수 "20년전 생포되지 않았다면 목숨 부지 없었다:

경찰관 최우영 "생포당시 실수했다면 이세상 사람 아니었을것"


연합뉴스 | 입력 2016.09.18. 06:02 | 수정 2016.09.18. 06:57




무장공비 이광수 "20년전 생포되지 않았다면 목숨 부지 없었다:

경찰관 최우영 "생포당시 실수했다면 이세상 사람 아니었을것"

(춘천=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20년 전 생포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광수)

"생포 당시 조금만 실수했다면 나 역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최우영)

20년 전 북한 잠수한 침투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광수(51)와 이 씨를 생포한 강원지방경찰청 최우영(46) 경감은 서로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최 경감은 20년 전 생사를 넘나들었던 이광수 생포 순간을 아직도 뇌리에 또렷이 기억한다.

1996년 9월 18일 새벽 1시. 강릉 강동면 안인진리 앞바다에서 북한 잠수함이 50m 해상에서 좌초했다.

침투 닷새 전인 그해 9월 14일 오전 5시 함경남도 퇴조항을 출발한 북한 잠수함의 목적은 정찰요원 3명을 남한에 침투시키는 일이었다.

임무를 마친 정찰요원을 태우고 북한으로 복귀하려던 잠수함은 뜻하지 않는 좌초 사고가 난 것이다.

그날 새벽 칠흑 같은 어둠 속 좌초된 잠수함은 강릉의 한 택시기사가 최초로 발견해 신고했다.

그사이 잠수함에 타고 있던 이광수를 비롯한 무장공비 25명은 강릉 강동면 안인진리 해안을 통해 내륙으로 침투했다.

이들은 육로를 이용해 북한으로 복귀할 계획이었다.

무장공비 침투 사실이 알려지면서 도내 대부분 지역은 최고 수준의 국지도발 대비태세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다.

이 소식을 접한 지역 주민은 물론 전 국민은 불안에 떨었다.

그날 오후 4시 30분께 최 경감이 당시 경장으로 근무하던 강릉경찰서 강동파출소에는 한 통의 신고전화가 걸려왔다.

"길옆 풀숲에 수상한 사람이 있으니 빨리 와달라"는 신고였다. 신고 주민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떨렸다.

1998년 강릉 무장공비 잔당을 최후 섬멸한 '인제 연화동 전투' 전적비를 찾은 장병들이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있다.
1998년 강릉 무장공비 잔당을 최후 섬멸한 '인제 연화동 전투' 전적비를 찾은 장병들이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있다.

신고자가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는 곳은 파출소와 불과 2㎞ 거리였다.

당시 최 경장과 전호구 경장은 카빈총에 실탄을 장전했다. 순간 막연한 긴장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신고 장소에 도착한 최 경장 등은 주변 경계를 하며 언덕길을 따라 농장에 다다랐다.

농장 마당에 주차된 승용차 사이로 신고 주민의 남편과 머리가 덥수룩한 거동 수상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사실 이때만 해도 최 경장 등은 이 거수자가 무장공비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고 한다.

"꼼짝 마,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최 경장 등의 경고에 거수자는 두 손을 드는 듯하더니 한 손을 내려 허리춤에 있던 물건을 꺼내려 했다.

그 순간 최 경장은 거수자의 손을 내리쳤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은 45구경 권총이었다. 권총에는 실탄 13발이 정전돼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에서 거수자를 제압한 뒤 "누구냐"는 질문에 "북한에서 왔수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순간 최 경장과 전 경장은 머리끝이 쭈뼛하고 섬뜩함을 느꼈다.

20년 전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광수(당시 31세)는 그렇게 생포됐다.

최 경감은 "생포한 이광수의 허리띠를 풀어 양손을 묶자 '거칠게 다루지 마시라요'라고 불만을 토로했다"며 "생포 당시 조금이라도 실수해 제압하지 못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광수의 생포로 북한 잠수함의 침투과정과 침투 인원 등 전모가 밝혀졌다.

이때부터 청학산 작전, 단경골 작전, 괘방산 작전, 칠성산 작전, 보광리 작전, 목계리 작전, 오대산 지역 작전, 노인산 지역 작전을 거쳐 인제 연화동 전투까지 49일간의 대간첩 침투 작전이 펼쳐졌다.

대침투 작전에는 군과 예비군, 경찰 등 연인원 150만 명이 투입됐다.

이 과정에서 무장공비 11명이 시신으로 발견되고 13명은 대간첩 침투 작전 중 사살됐다.

하지만 군인 12명과 예비군 1명, 경찰 1명, 민간인 4명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장병 27명은 작전 중 다쳤다.

잡힌 자와 잡은 자 서로가 "생명 은인"     (춘천=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1996년 9월 18일 강릉 앞바다에서 발견된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이 18일 20주년을 맞았다. 북한 잠수한 침투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광수(51·왼쪽)와 이 씨를 생포한 강원지방경찰청 최우영(46·오른쪽) 경감이 2008년 12월 춘천에서 열린 안보강연회에서 만나 사진을 촬영한 모습. 당시 일촉즉발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최 경감과 이광수는 서로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후 이들은 서로 연락을 자주 주고받으며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2016.9.18     jlee@yna.co.kr
잡힌 자와 잡은 자 서로가 "생명 은인" (춘천=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1996년 9월 18일 강릉 앞바다에서 발견된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이 18일 20주년을 맞았다. 북한 잠수한 침투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광수(51·왼쪽)와 이 씨를 생포한 강원지방경찰청 최우영(46·오른쪽) 경감이 2008년 12월 춘천에서 열린 안보강연회에서 만나 사진을 촬영한 모습. 당시 일촉즉발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최 경감과 이광수는 서로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후 이들은 서로 연락을 자주 주고받으며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2016.9.18 jlee@yna.co.kr

최 경장과 전 경장 등은 이광수 생포 전공을 인정받아 1계급 특진과 포상금을 받았다.

이광수의 증언을 토대로 대간첩작전을 성공적으로 종료한 공적도 인정돼 현직 경찰관으로서는 유일하게 충무 무공훈장도 받아 국가유공자로 등록됐다.

당시 음식물을 마련하려고 대열에서 이탈해 민가에 내려왔다가 생포된 이광수의 삶도 180도 바뀌었다.

대한민국으로 전향한 이광수는 이듬해인 1997년 해군에 입대해 군무관으로 근무 중이다.

해상침투 자문과 군인들을 상대로 안보 강의를 주로 하고 있다.

이광수는 "허름한 민가에 전화기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알았다면 오래 머무르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역설적으로 주민의 신고와 최 경감의 생포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됐다"고 회고했다.

1999년 결혼한 이광수는 제2의 인생을 살게 해 준 인연을 찾아 강릉으로 신혼여행을 오기도 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최 경감과 이광수는 침투사건 이후 8년만인 2004년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지난날을 회고하기도 했다.

이후 서로 연락을 자주 주고받으며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최 경감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포된 이광수나, 생포한 나도 서로 '생명의 은인'이 아닐 수 없다"며 "다만 북상하려는 공비와 맞서 싸우다 위국헌신한 젊은 영웅들과 이를 가슴에 묻은 부모·형제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불거진다"고 말했다.

이어 "제5차 핵실험 강행과 미사일 발사 등 북한은 그때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도발하고 있다"며 "지난날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광수는 추석 연휴인 지난 16일 잠수함 침투 20주년을 맞아 강릉 청학산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jl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