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경영

[미래에셋 대해부]⑤ ‘박현주 2호’ 원금 반토막…도피성 유학떠나

Shawn Chase 2016. 6. 20. 22:59

이찬환 기자


입력 : 2016.06.20 06:00 | 수정 : 2016.06.20 21:22 2000년 12월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굿모닝증권빌딩(현 신한금융투자) 300홀. 이날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박현주 2호 성장형펀드’ 임시주주총회에 참석한 한 가입자는 “펀드에 이름을 걸고 돈을 모집했는데 이 정도로 손실이 커졌다면 박현주 사장과 운용담당자의 재산이라도 내놓으라”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수십 년간 모은 전 재산을 펀드에 투자했다는 일부 고객은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며 당시 사장이었던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을 공격했다.

‘박현주 1호’가 미래에셋금융그룹이 재계 서열 33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주춧돌이 됐다면 ‘박현주 2호’는 그룹 운명의 갈림길이 될 수도 있는 첫 번째 위기였다.

‘박현주 1호’의 성공에 도취해 1999년 말 출시한 ‘박현주 2호’는 벤처 거품이 꺼지고 증시가 내리막길을 타면서 30~40%의 손실이 났다. ‘대박’의 신화를 써가던 미래에셋의 이미지는 땅에 떨어졌다. 이후 박현주 회장은 2001년 초 갑작스레 미국으로 떠났다.

미래에셋은 ‘박현주 1호’ 펀드의 성공을 발판으로 1999년 12월 ‘박현주 2호’를 선보였다. 펀드매니저들 사진과 경력을 삽입한 광고를 내자는 박현주 회장의 아이디어는 당시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자산운용사들은 ‘펀드매니저’를 내세운 신문광고를 잇달아 쏟아냈다. 사진은 1999년 12월 14일 일간지 광고.
미래에셋은 ‘박현주 1호’ 펀드의 성공을 발판으로 1999년 12월 ‘박현주 2호’를 선보였다. 펀드매니저들 사진과 경력을 삽입한 광고를 내자는 박현주 회장의 아이디어는 당시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자산운용사들은 ‘펀드매니저’를 내세운 신문광고를 잇달아 쏟아냈다. 사진은 1999년 12월 14일 일간지 광고.

◆ ‘박현주 2호’ 수익률 -44.92% 주주 불만 폭발

국내 첫 뮤추얼펀드인 ‘박현주 1호’는 설정 1년 만에 100% 가까운 수익률을 기록했다. ‘박현주 펀드’는 운용보수 외에 수익률에 따라 추가로 받는 성과보수가 있었다. 예컨대 수익률이 연 15%를 넘으면 초과분의 20%만큼을 성과보수로 받는 식이다. 성과보수가 워낙 높은 덕에 미래에셋은 박현주 시리즈로 2000억원 가량을 벌어들였다.

‘박현주 1호’가 ‘대박’을 터뜨리자 미래에셋은 곧이어 1999년 12월 박현주 2호를 내놨다. 이 펀드에는 3000억원에 달하는 개인 자금이 몰려 미래에셋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문제는 2000년에 발생했다. 1999년 1년간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던 코스피지수가 2000년 들어 힘을 쓰지 못했다. 1999년 12월 28일 1028.07에 한해를 마감했던 코스피지수는 2000년 12월 26일 504.62까지 하락했다. 반토막이 난 셈이다.

박현주 2호 역시 급락장을 버텨내지 못했다. 2000년 11월 23일 운용을 마친 박현주 2호의 수익률은 마이너스 44.92%를 기록했다. 투자자들은 원금의 절반가량을 잃었다. 물론 미래에셋은 수익률 악화로 성과보수를 받지 못했지만 펀드가 반토막이 나도 수수료 수입을 챙겼다.

펀드에 돈을 넣은 주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일부 투자자들이 모여 만든 비상대책위원회는 펀드의 운용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만약 운용상에 불법 및 편법 사실이 발견될 경우 50%에 가까운 원금 손실 중 어느 정도 회사 측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현주 2호’는 법정 소송으로까지 이어졌지만 재판부는 간접 상품에 대한 손실은 투자자가 책임져야 한다며 소송을 기각했다. 하지만 불패의 신화를 거듭했던 ‘박현주’라는 브랜드는 큰 상처를 입었다.

미래에셋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박현주 2호’의 실패는 박 회장 한 사람에게 집중된 과도한 영향력 때문에 자초한 것”이라며 “모든 의사 결정 과정에서 반론이 전혀 표출되지 않았던 점은 ‘소수의 시각’을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다는 점을 방증한다”고 말했다.

◆ 미국으로 떠난 박 회장…엇갈린 두 가지 시각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의 1998년 모습./조선DB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의 1998년 모습./조선DB

‘박현주 2호’ 실패 이후 박 회장은 2001년 초 돌연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박 회장의 미국행에는 두 가지 시선이 공존한다. 도피성 유학이라는 의견과 재충전을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박 회장은 언론을 통해 미국에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공부하러 갔다고 밝혔고,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최고경영자과정에 들어갔다.

하지만 박 회장은 출국 전까지만 해도 연내에 국내 증권사 가운데 5위권에 오르겠다며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저조한 투자실적 때문에 피신했다는 얘기가 금융투자업계에 돌았다.

한편에서는 당시 벤처 관련 정경유착 사건이 터졌고 증권가에 정치 자금을 준 사람 중 하나로 박 회장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펀드에 정·관계 인사의 자금을 끌어들였다가 수익률이 떨어지자 부담감에 한국을 떠났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펀드 수익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코스닥시장 상장 종목에 투자해 시세를 조작했다는 의심을 받았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검찰이 이런 정황을 토대로 실사에 나섰다는 소문이 한동안 증권가에 돌았다.

박 회장의 미국행은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미국 유학 생활 중 하버드대 경제·경영학 교수를 비롯해 금융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해외진출을 위한 네트워크를 쌓았다.

미래에셋그룹 관계자는 “박 회장의 미국 유학길은 전화위복의 계가가 됐다”며 “미래에셋증권의 전략과 SK생명 인수를 통한 미래에셋생명 출범, 홍콩·싱가포르 현지법인 설립 등은 이때 얻은 유무형의 경험을 토대로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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