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꽃미남 모던보이' 이봉창

Shawn Chase 2016. 6. 6. 22:31

우리가 현재 기리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은 어쩌면 아주 적은 숫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적은 숫자조차 우리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의 희생과 공로를 전달하고자 영상실록 '영웅'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 영상=TV조선, 구성=뉴스큐레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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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6.06.03 11:06 | 수정 : 2016.06.03 16:12

    이봉창은 1930년 12월 중국 상해로 가 임시정부의 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처단에 실패하고,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이봉창,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이봉창의 옥중수기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 부유하게 자랐다. 그러나 토지가 총독부에 수용당하고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가세가 기울었다. 4년제 용산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직장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인 직원들로부터 '조센징(조선인을 비하하는 말)' 이라 불리며 굴욕적인 수모와 설움을 당했다.

    여기서 이봉창은 부모나 이웃, 그리고 자신이 받은 민족적인 수모와 설움이 모두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후 나고야·도쿄·요코하마 등을 전전하며 일본어를 익히는 한편, 상점 점원이나 철공소 직공·잡역부·날품팔이 등으로 직업을 바꾸면서 일본인처럼 생활하려 애썼다.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 이름도 사용했으며, 한때 일본인이 되고 싶어 조카딸과도 왕래를 끊었던 이봉창은 아무리 노력해도 일본인들에게 멸시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을 갖게 된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가 있는 중국 상해로 떠나 백범 김구를 만나게 되었다.


    이봉창은 개성이 강한 독특한 인물로 여느 독립운동가와는 달리 쾌활하고 발랄한 '모던보이'였다. 떠벌리기 좋아하고 술과 음악, 여인도 좋아했다.

    그는 악기 연주에도 뛰어나 그가 연주한 연가(戀歌)는 많은 일본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이봉창에게 어느 일본 귀족아가씨가 접근했다. 그녀는 이봉창이 일하던 상해의 악기점에 자주 들러 이봉창과 함께 슈베르트의 <소야곡> 같은 노래를 연주하곤 하더니 이봉창에게 사랑의 도피를 하자고 매달렸다. 그러나 이봉창은 헝가리 애국시인 페퇴피 산도르(1823~1849)의 시를 전해주면서 그녀의 제의를 뿌리쳤다.

    그는 상해에서 술에 취하면 곧잘 일본 노래를 유창하게 부르며 호방하게 놀았다. 민단에 '하오리'(일본 겉옷)를 입고 '게다'(일본 나막신)를 신고 왔다가 중국인 경비원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이봉창이 임정에 와서 어울리려 하자 이동녕 선생 등 임정 원로들은 일본 말을 하고 일본 복장을 하고 일본인들과 어울려다니는 그를 믿을 수 없다며 백범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백범은 믿고 맡겨달라고 했다. 백범은 임정 사무원인 김동우를 시켜 이봉창을 면밀히 관찰한 결과 그가 단순한 건달이 아님을 간파하고 여러 차례 비밀 면담을 한다.

    당시 일왕을 직접 처단한다는 생각은 백범도 하지 못한 생각이었다. 백범은 이봉창을 만난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하루는 어떤 청년 동지 한 사람이 거류민단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이봉창이라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일본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데 독립운동에 참예하고 싶어서 왔으니 자기와 같은 노동자도 노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가 하였다… 며칠 후였다. 내가 민단 사무실에 있노라니 부엌에서 술 먹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청년이 이런 소리를 하였다. '당신네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안 죽이오?'"

    이후 일왕 처단의 거사를 위해, 이봉창이 바지 속주머니에 폭탄을 숨기고 상해를 떠나 무사히 일본으로 잠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귀족아가씨가 동행했기 때문이라고 이화림*은 말했다. 귀족아가씨가 동행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의 몸수색과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봉창이 거사를 위해 일본 귀족아가씨와 일본으로 떠날 때, 부두에는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짓는 아녀자도 적지 않았고 배웅하러 나온 일본 경찰도 있었다. 그는 특유의 사교성으로 여인들은 물론이고 일본 경찰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상해 주재 일본총영사관의 한 경찰간부는 일본 본토의 경찰서장에게 이봉창을 소개하는 소개장을 써주었다가 이봉창 의거 뒤 자살했다.

    * 이화림: 이봉창의 바지에 폭탄을 넣을 속주머니를 만들어주었던 항일운동가

    거삿날. 이봉창은 도쿄 경시청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 행렬에 폭탄을 던졌다. 겨냥한 것은 두 번째 마차였다. 일왕은 첫 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는데 그 마차엔 한 사람만 타고 있어 이봉창은 일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폭탄은 궁내부 대신이 타고 있던 두 번째 마차 뒤쪽의 마부가 서는 받침대 아래에 떨어져 터졌다. 그러나 수류탄의 성능이 약해서 마차 밑바닥과 바퀴의 타이어가 파손되었을 뿐 인명피해는 없었다. 사방에 있던 사람들이 흩어지고 제복을 입은 순사가 이봉창의 뒤에 있는 무명옷을 입은 사내를 체포해 연행하려 했다. 이봉창은 엉뚱한 사람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아니다, 나다"라고 말하며 순사에게 자진 체포되었는데, 체포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일왕 처단에 실패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거사는 비록 실패했지만 당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상해 임정의 존재를 전 세계에 각인시킨 일대 쾌거였다. 쾌거는 석달 남짓 뒤인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虹口)의거' 성공으로 이어져 꺼져가던 임정의 불씨를 되살려 놓았다.

    (참고=여시동 저 '인간적인 책')

    이봉창, 목숨을 바친 애국(愛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