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강자에겐 호랑이, 약자에겐 비둘기처럼"…원조 '석호필' 스코필드 박사

Shawn Chase 2016. 2. 29. 01:00

한세현 기자

입력 : 2016.02.28 10:24


1919년 3월 1일.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며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민초들. 절규하듯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던 민초들의 모습을 한 외국인이 카메라에 어렵게 담았습니다. 그 사진은 해외 언론으로 보내졌고,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기폭제가 됐습니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 ‘아리타 도시오’ 일본 육군 중위가 경기도 수원군(지금의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를 찾아와 주민 30명을 교회로 모았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주민들을 기다린 건 일제의 참혹한 만행이었습니다. 일본 군경은 제암리를 3.1운동의 근거지로 보고, 그곳 주민들을 교회에 몰아넣은 뒤 집중사격을 가했습니다. 그리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에 불까지 질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한 외국인은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 처참한 당시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이 자료는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로 만들어졌고, ‘제암리 학살사건’은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 스코필드 박사와 3·1만세운동, 34번째 민족대표

일제 만행을 세상에 알린 이 외국인은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 박사였습니다. 영국 태생의 캐나다 수의사(수의학박사)였던 그는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교수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세균학 교수가 없어 교육의 내실화를 기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 올리버 애비슨의 편지를 받고, 낯선 타국 한국으로 달려왔던 겁니다.

한국에 온 지 3년이 지난 1919년 2월 어느 날, 그는 같은 장로교 선교사이던 앨프리드 샤록스의 소개로 이갑성(1886~1981)을 만납니다. 그리고 만남은 훗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게 됩니다. “조만간 전개될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해 줄 수 있느냐”라는 이갑성의 제안에, 한국의 불행한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스코필드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1915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이갑성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합니다.)
 
3.1만세운동을 앞두고 이갑성은 스코필드 박사에게 국제사회가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고, 스코필드는 외국 신문과 잡지는 물론 외국인들을 찾아가 국외소식을 자세히 물어 그 내용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소아마비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탑골공원과 종로 일대로 뛰어다녔습니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군중에서부터, 군도를 휘두르며 진압하는 일제 헌병의 모습까지, 역사의 순간순간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또, 화성 향남면 제암리-수촌리 마을 학살 현장을 직접 방문해 증거를 모으고, 이를 미국과 캐나다, 영국 등으로 보내 일제 만행을 전 세계에 폭로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가 몰래 촬영한 사진들



그해 5월엔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던 유관순 등을 면담하고 수감자에 대한 고문을 확인한 뒤, 하세가와 총독과 미즈노 정무총감을 찾아가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의 중지를 호소했습니다. 그가 활발한 독립운동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일동맹으로 영국계 캐나다 사람인 스코필드를 일본에서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점을 이용해, 11월엔 상하이 임시정부를 후원한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수감된 김마리아 회장 등을 방문해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공을 인정받아, 그는 ‘34번째 민족대표’로 인정받게 됩니다.
 
이처럼 스코필드 박사는 일제의 만행에 대해 호랑이와 같은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공식 언론을 통해 스코필드 박사를 ‘과격한 선동가(Arch Agitator)’로 낙인찍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192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해 모국인 캐나다로 돌아가 다시 수의학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 '혈액응고방지제'를 개발한 세계적 수의학자

스코필드 박사는 선교사, 독립운동가이기 전에 세계적인 수의학자였습니다. 1907년 캐나다 토론토대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전 과목 A 학점을 받으며 수석으로 학업을 마쳤습니다. 이후 1911년 ‘토론토 시내에서 판매되는 우유의 세균학적인 검토’로 토론토대에서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21년엔 농장의 소들이 심한 출혈로 죽는 일이 자주 발생했는데, 그 원인이 '스위트 클로버'이란 걸 밝혀냈습니다. '스위트 클로버'엔 혈액응고를 막는 독성물질이 들어 있었는데, 이사실을 최초로 밝혀낸 겁니다. 그의 연구논문은 미국 수의학회에 보고되었고, 이 연구는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혈액응고방지제인 ‘와파린’과 ‘디큐머롤’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그는 온타리오 수의과대학 병리학 교수가 되었고, 1935년엔 독일 막시밀리안 대학교에서 명예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또, 국제수의학회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인 수의학자로서도 명성을 널리 알렸습니다.
 
● '마음의 모국'으로 돌아오다

수의학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음에도, 스코필드 박사는 ‘마음의 모국’인 한국을 잊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한국인들에게 돌려주고 싶다며, 1958년 그는 독립한 대한민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뒤 그는 우리나라 국적을 취득하고,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후학양성에 힘썼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도 언제나 앞장섰습니다. 그는 전 세계에 있는 친구들에게 손수 편지를 보내 ‘스코필드 기금’을 마련했고, 이 기금은 가난한 학생들과 보육원 등에 보내졌습니다. 또, 영어 성경반을 만들어 중고등학생들에게 영어와 함께 미래의 꿈을 가르쳤으며, 가난한 학생에게는 사비를 털어 장학금을 주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가 몰래 촬영한 사진들

스코필드 박사가 몰래 촬영한 사진들

스코필드 박사와 영어 성경반 학생들

스코필드 박사와 영어 성경반 학생들

서울대 명예 수의학박사 학위를 받는 스코필드 박사

서울대 명예 수의학박사 학위를 받는 스코필드 박사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글을 쓰거나 교육장려 활동도 활발히 펼쳤습니다. “한국의 경제 발전은 철저한 부패 일소에 달렸다.”라거나 “국민은 불의에 항거하고 목숨을 버려야 할 때가 있다.”라는 글을 신문에 기고하며 한국의 부패와 부정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공로로 그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70년 4월 12일, 대한민국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의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업적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습니다.



  스코필드 박사 "내 심장은 한국에 있다"

1970년 4월 당시 스코필드 박사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