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최보식이 만난 사람] "압록강대장, 압록강대장! 飢寒이 얼마나 심하오 부족한 날 용서하오…" ―낙동강 전투 당시 무전 교신

Shawn Chase 2016. 6. 6. 22:34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 2016.06.06 03:00 | 수정 : 2016.06.06 09:00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이대용 전 駐越 공사]

"전쟁 때는 無垢의 정신으로 굵고 짧은 삶 값있게 살다
화사한 꽃이 떨어지듯 가버리는 게 軍人의 일생"

"鴨綠江물 수통에 담는 장면… 그건 사진이 아니라 그림
그때는 그것이 요란스럽게 역사에 남을 줄 몰랐어요"


"전쟁 때는 무구(無垢)의 정신으로 굵고 짧은 삶을 값있게 살다가 화사한 꽃이 떨어지듯이 가버리는 것이 군인의 일생이라고 했어요. 그러하듯 6·25 때 예하 소대장 4명과 직속상관인 부(副)대대장과 대대장까지 모두 전사했어요. 나만 운 좋게 살아남았어요."

입속에서 웅얼거리는 듯한 이대용(91) 전 주월(駐越) 공사의 말은 알아듣기 쉽지는 않았다.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말이 내게는 '전설(傳說)이 살아남았다'는 것으로 들렸다.

그는 6·25의 첫 승전으로 기록된 '춘천 전투'의 중대장(제6사단 7연대 1대대 1중대)이었다. 낙동강의 화산 전투에서 '내 목숨이 끊어지겠구나' 하면서 방어 진지를 사수했다. 북진할 때는 그의 중대가 맨 먼저 압록강에 도달해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았다. 베트남전(戰)에서는 사이공(현 호찌민)이 함락되기 직전 교민 철수를 위해 마지막까지 남았다. 체포된 그는 감옥살이를 한 뒤 5년 만에 귀환했다. 몇 년 전 그가 펴낸 '6·25와 베트남전 두 사선(死線)을 넘다'라는 책의 제목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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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용 전 공사는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오자 최규하 전 대통령이 격려금 300만원을 줬다”고 말했다. /성형주 기자


―6·25 발발 당시 스물다섯이었더군요. 그날 아침이 기억납니까?

"춘천에 하숙집을 얻어 영외 거주를 하고 있었어요. 그날 비가 내렸어요. 오전 8시 반쯤 쿵쿵 포성(砲聲)이 들렸어요. '일요일인데도 우리 포병부대가 사격훈련 하는구나' 했어요. 나는 도서관에 책을 빌리려고 나섰어요. 그때 연락병이 달려와 '인민군이 38선 넘어 공격해와 비상이 걸렸다'는 거예요. 고무장화를 신은 채 부대에 복귀했어요."

―6·25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릅니까?

"우리 중대가 맨 먼저 압록강에 도달한 것이지요(1950년 10월 26일). 그때 남북통일이 되는가 감개무량했어요. 인민군들은 압록강 뗏목 다리를 건너 중국으로 도망쳤어요.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압록강가에 주둔했어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떠 담는 사진 속 주인공이었습니까?

"그때 사진이 어디 있어요? 나중에 그림을 그렸거나 다른 데서 찍은 겁니다."

―사진이 없었다고요?

"그때 중대와 대대에는 사진사가 없었어요. 나는 물을 뜰 생각도 안 했어요. 뒤늦게 대대장(김용배)이 도착해 '남북통일 축원을 위해 대통령께 보내 드려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어요. 내 연락병 오달희가 자기 수통으로 물을 떠 온 걸로 기억해요. 그는 나중에 전사했습니다. 어쨌든 그 수통을 후방으로 보냈어요. 전쟁기념관에 수통이 전시돼 있는데, 그게 그 수통인지 모르겠어요. 그때는 그것이 요란스럽게 역사에 남을 줄은 몰랐어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의 압록강 주둔은 2박3일로 끝났지요?

"10월 28일 저녁쯤 '초산으로 철수하라'는 무전 연락이 왔어요. 중공군이 서북 방면에서 밀고 들어와 후방을 몇 겹으로 차단했어요. 포위망을 뚫고 나오면 또 포위가 되곤 했습니다."

그의 중대가 중공군과 만난 횟수는 22회였다. 이 중 13회는 크고 작은 교전을 벌였다.

"어떤 부대에서는 각자 민간인복으로 갈아입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어요. 우리 중대원도 그렇게 하기를 원했어요. 나는 '군인은 총칼을 버릴 수 없다. 사즉생(死則生)이다. 마지막 총알 한 발은 자기를 위해 써라'고 말했어요. 총 들고 끝까지 싸우면서 포위망을 뚫고 나온 중대는 우리밖에 없었어요. 사단사령부에서 유일하게 생환 신고식을 했지요."

―6·25 전쟁을 통틀어 최고의 지휘관은 누구였다고 생각합니까?

"직속상관인 김용배 대대장은 최고의 군인이었어요. 일본군에 지원했던 흠결이 있었지만, 그분은 천재적인 전략가였고 용감했고 인격적으로 훌륭했어요. 적의 총알이 이마를 스쳐 지나가 피가 뚝뚝 흐르는데도 '별거 아니야'라고 태연했어요. 한번은 낙동강 전투에서 내가 죽음을 떠올리며 방어진지를 사수하고 있을 때 '압록강대장(제1중대장의 음어), 압록강대장! 기한(飢寒·추위와 굶주림)이 얼마나 심하오. 부족한 나를 용서하오'라며 무전기로 전해왔어요. 나는 전쟁터에서 한 번도 눈물 흘린 적 없었는데 그때는 무전기를 쥔 채 흐느껴 울었어요.(김용배는 1951년 7월 제7사단 5연대장으로 부임한 뒤 양구 전투에서 전사. 당시 30세)"

―6·25가 끝난 뒤 어떤 계기로 주베트남 대사관 무관으로 나가게 됐습니까?

"나는 군지휘관의 그릇이 되고 싶었어요. 미(美) 육군참모대에 연수를 다녀온 뒤 연대장까지 마쳤어요. 하지만 그 시절엔 부정(不正)과 결탁하지 않고는 군인 월급으로 가족과 함께 살 셋집도 얻을 수 없었어요. 무관 시험에 응시한 것은 봉급 수준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어요."

그가 1963~66년 남베트남에서 근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보직이 주어지지 않았다. 장군 진급 심사에서도 몇 차례 떨어졌다.

"왜 고위직에 인사를 다니지 않느냐는 말을 들었어요. 나는 아부도 상납도 부정(不正)도 못했어요. 그런 세태가 역겨웠어요. 전역 자원서를 제출했는데 뜻밖에 장군 진급이 됐어요. 알고 보니 그해 한 심사위원이 내 진급을 강하게 주장했어요. 결국 정원이 아닌 예비명단으로 올렸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낙점한 겁니다."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는 장면
/국가보훈처 사진


―장군이 된 뒤 이번에는 주베트남 대사관 정무공사(1968~72년)로 발령났지요?

"박 대통령의 지시였어요. 그때 베트남에 진출한 한진과 현대 등 기업의 문제가 있었어요. 한진의 경우 미화(美貨)를 밀반입하려다 압수되고 3배의 벌금을 물게 된 사건이 터졌어요. 월남의 응우옌 반 티에우 대통령과 미(美) 참모대학을 같이 다녔던 나를 보내게 된 겁니다."

―그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티에우 대통령을 만나 국익 차원에서 이를 해결하자, 조중훈 회장 형제가 감사 표시로 미화 30만달러와 베트남 화폐(10만달러)가 든 가방을 들고 찾아왔어요. 국내 아파트 40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었어요. 내가 야단쳐 돌려보내자, 조 회장이 '나중에 자연인이 될 때 큰 저택을 지어 드리겠다'고 말했어요. 나는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했어요."

물론 이런 약속이 지켜질 리 없고, 조중훈 회장은 저세상 사람이 됐다. 2년 전 이 스토리를 알게 된 한 작가가 한진그룹에 알리자,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는 동생 조중건 전 부회장이 찾아와 감사를 표시했다고 한다.

―베트남 근무를 마치고 1년도 안 돼 또다시 대사관 공사로 나갔더군요.

"돈 싸들고 인사를 안 다니니 사단장 시켜줄 리 없었지요. 한직(閑職)에 보냈어요. 군복을 벗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무렵, 직속 사령관이 불러 골프를 치러 갔다가 박 대통령을 만났어요. '이 장군, 요즘 어디 있나?'고 물어요. 내가 소속을 말하자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가다가, 되돌아와서 '왜 보직을 받지 못했지?' 물었습니다. 며칠 뒤 국방장관이 나를 불러 '소장으로 승진 예편시키고 주월대사관 부(副)대사로 발령내라는 게 각하의 지시'라고 했어요.(하지만 그는 경제공사로 발령났고 결국 진급을 못 하고 준장으로 예편함)"

남베트남 패망 이틀 전 1975년 4월 28일 주월 한국대사관은 폐쇄됐다. 그는 교민 철수 작전 책임을 맡았다. 사이공 외곽에서 포성이 들렸다. 상황은 급박했다. 그는 그때까지 탈출 못 한 잔류 교민 175명을 데리고 프랑스 정부에서 운영하는 병원(치외법권 지역)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사이공은 함락됐다.

―결국 체포돼 감옥에 갇혔는데, 그때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미 대사관에 갔을 때 미국 공사가 '지금 혼자 옥상에 올라가 헬기를 타라'고 권했어요. 교민들을 버려두고 혼자 떠날 수는 없었어요. 6·25 때 다들 죽었는데 나는 지금껏 살았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나 생각했어요. 그때 잔류 교민들을 인솔하지 않았으면 다음 날 사이공에 진입한 월맹군에 의해 거의 다 사살됐을 겁니다."

그는 햇볕이 안 들어오는 감방에 갇혔다. 297일 만에 일광욕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몸무게는 78㎏에서 46㎏으로 줄었다.

―북한노동당 공작요원 3명이 파견돼 직접 심문을 하고 '북한 망명 자술서'를 강요했다면서요?

"나를 북으로 데려가 정치적으로 활용하려고 했지요.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았어요."

그의 석방 안건을 놓고 한국과 베트남, 북한 3자 비밀협상이 진행됐다. 북측에서는 '남한에 수감된 남파 간첩 450명과 교환하자'고 요구했다.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한국 원자력 사업과 인연이 있었던 유대계 거상(巨商) 아이젠버그가 해결사로 나섰다. 그러던 중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박 대통령이 피격되는 10·26이 발생했다.

이대용 공사가 풀려난 것은 1980년 4월 12일이었다. 그는 아이젠버그의 개인 전용기를 타고 들어올 수 있었다. 4년 7개월간 수감을 포함해 베트남 억류 5년 만이었다.

―그 시절 국내 상황은 어수선했지요. 우리 정부에서는 어떻게 대접했습니까?

"최규하 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러 '박 대통령이 살아있었으면 크게 치하했을 텐데 청와대 금고가 바닥이 났다'며 봉투를 하나 줘요. 300만원이 들어있었어요."

―베트남에서 장군님을 심문했던 '안닝노이찡(특별경찰)' 3인방 중 한 명이 나중에 주한 베트남 대사로 부임했다면서요?

"악명 높았던 즈엉징특이었어요. 그는 김책공대와 김일성대학에서 유학해 우리 말을 잘했어요. 평양 주재 베트남 대사를 한 뒤 2002년 주한 베트남 대사로 왔어요."

―부임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어떠했습니까?

"세상 요지경이다 싶었어요. 하지만 복수한다는 것은 조국에 큰 누를 끼치는 거라, 표가 안 나는 복수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지요."

―그해 9월 신라호텔에서 '베트남 수교 10주년' 행사에서 조우를 했다고요?

"그는 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를 만나자 '당시 심문을 받을 때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고 말하던 장군님의 선견지명에 놀랐다'고 했어요. 서로 총을 겨누던 관계가 국교정상화로 우방이 됐으니까요. 나는 '그때 당신은 당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고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고 답했어요. 그 뒤 우리는 친구처럼 가끔 만났어요. 원한의 외나무다리에도 꽃은 피구나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