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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여유 권하는 사회

Shawn Chase 2016. 3. 4. 09:19

여미영·디자인회사 D3 대표

여미영·디자인회사 D3 대표 사진

입력 : 2016.03.04 03:00




누구나 한 번쯤 숨이 멎는 듯한 벅찬 순간을 맞는다. 이탈리아에 있을 때 디자이너 에토레 소트사스(1917~2007)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얘기를 듣던 날이 내겐 그랬다. 세계 디자인의 헤게모니를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가져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포스트모더니즘 창시자의 제안이었으니 말이다.

10명 남짓한 도제식 스튜디오에 가장 먼저 출근해 컴퓨터 앞에서 미동도 없이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트사스가 미소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잠시 이 앞 거리에 나가 커피 한잔하지 않겠니? 디자인은 컴퓨터 앞에서 나오는 게 아니야. 눈을 감고 봄날의 따스한 햇살을 느껴봐. 네가 행복해야 좋은 디자인이 나오는 거야. 디자인은 삶이야."

모범생처럼 자리를 지켜 열심히 일하는 게 최선인 줄 알던 나는 처음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래도 되나, 불안도 잠시. 분위기 좋은 노천 카페에 홀로 앉아 커피를 마시다 보니 마음이 누그러졌다. 눈을 감자 그간 음미할 여유도 없던 햇살의 따스함과 커피의 그윽한 향이 온몸으로 퍼졌다. 사무실에서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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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이 지나 돌아온 고국은 창조 경제와 포스트모더니즘형 창의 인재의 중요성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최장 근로시간을 기록하며 저조한 노동생산성을 기록하고 있다. 일더미에 둘러싸여 퇴근 시간에도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해 눈치를 보는 사이, 피로는 가중되고 창조적 생각은 사치가 된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하고픈 일을 생각할 틈도 없이 스펙 쌓기 경쟁에 내몰려 있다. 창조는커녕 딴 생각할 틈이 없다. 틀을 깨는 변화와 혁신을 위해서는 등을 두드리며 새로운 생각과 행동이 들어설 여유를 권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1980년대 소트사스는 60대 중반의 나이에 실업자인 20대 제자를 모아 멤피스 디자인 운동을 벌였다. 이 디자인 운동으로 자신은 거장으로 발돋움하고, 제자들을 차세대 스타로 키웠다. 그 기적 같은 일은 일상의 행복과 삶을 중시하는 태도에 있었다. 언젠가 이 성공 비결을 묻자 답한 그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글쎄, '그냥' 해보면 재밌을 것 같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