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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아깝던 영화 vs 묻히기엔 아까운 영화

Shawn Chase 2015. 12. 16. 21:54

등록 :2015-12-15 21:48수정 :2015-12-16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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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아깝던 영화 vs 묻히기엔 아까운 영화

등록 :2015-12-15 21:48수정 :2015-12-16 21:21

 

 

나를 실망시킨 영화
이게 ‘천만’이라니…표값이 아깝다

이런 사기극은 안 본다고 전해라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그레이
그레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성인이 되었던 80년대는 성인영화의 전성시대였다. 한국영화의 침체기였으나 에로영화는 호황을 맞았고, 고영남의 <여자여자>(1985), 박호태의 <빨간 앵두 4>는 지금도 수작으로 기억된다. 에로영화로 단정 짓기는 그렇지만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1981), <보디 히트>(1982), <나인 하프 위크>(1986), <투 문 정션>(1988) 등의 외화까지 쏟아져 나올 때는 행복했다.

요즘에는 볼만한 성인영화가 드물다. ‘90년대에 비디오로 에로영화를 졸업했을 관객에게 IPTV에 드글거리는 싸구려 에로영화 따위가 성에 찰 리가 없다. 그래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관심이 갔는지 모른다. 베스트셀러 원작의 수위에 대해 전해 들었고, 미국의 중년 여성들이 영화에 몰려든다는 소문도 났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건 성인영화로 부르기조차 민망한 수준이었다. 10살짜리 소녀가 성에 대한 판타지로 썼다면 모를까, 아이들이 다락방에서 장난치고 노는 것보다 못했다. 회초리로 엉덩이를 몇 대 때린다고 그걸 ’가학피학성변태성행위‘라 부르니 사드가 살아 있다면 엉덩이를 걷어찰 노릇이다. 만약 이 영화의 얼음 신에서 느꼈다는 관객에게는 제발 <나인 하프 위크>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어른들이 유아처럼 살고 있는 현실의 방증 같은 작품이다. 좋은 대중영화는 언제나 필요하다. 단, 간혹 예술영화를 보고 싶은 것처럼, 성인들은 때때로 질펀한 성인영화를 보기를 원한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같은 사기극은 원하지 않는다. 이용철(영화평론가)

스타를 빼면 무엇이 남을까 <암살>

암살    
암살
영화가 안 좋아질 때 옷걸이형 영화가 등장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인물과 소재를 수많은 옷걸이에 여기저기 걸어놓아 짜임만 대충 맞춘 결과물이다. 일년에 두어 차례 천만 관객이 형성되는 요즘, 특정 시즌에 습관적으로 극장을 찾는 관객은 그런 영화를 보고 심정을 토로한다. 그런데 그들이 느낀 격앙된 감정은 기실 영화의 본질적인 측면과 별로 상관이 없다.

<암살>에서 일본이 한국을 침탈한 역사를 지우면 무엇이 남게 될까. <암살>은 인물과 이야기 사이에 어떤 아름다운 관계도 맺지 못한 안 좋은 영화다. 그렇고 그런 배경을 지닌 인물들이 그렇고 그런 대사를 내뱉을 뿐이다. 단지 친일 앞잡이를 제거한다는 사명이 그들에게 감정적 무게를 부여할 따름이다. 예를 들어 전지현이 맡은 여주인공이 왜 아버지를 죽이려는지 영화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그런 시대에는 모두가 애국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군다. 그러니 현실은 어떠했는지 질문할 생각조차 없다.

애국자들 사이로<와일드 번치>에 나올 법한 무정부적 인물들이 나와 쓸데없이 폼만 잡을 때는 헛웃음도 안 나온다. <암살>은 영화가 안 좋아질 때 써먹는 또 하나의 수법을 사용한다. <암살>은 네댓 편의 영화에 나와도 남을 스타들을 총동원해 눈요기로 이야기를 메운다. 이런 영화와, 각자 몇 초씩 노래하다 무대 뒤로 사라지는 아이돌 그룹과 다를 게 무엇인가. 둘의 공통점은 반짝 인기다. 다시 질문하자. 스타와 소재의 허울을 벗으면 <암살>에는 무엇이 남을까. 나는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용철(영화평론가)

‘와호장룡’을 기대했지만… <협녀, 칼의 기억>

     
협녀
“호쾌한 무협으로 빚어진 전도연과 이병헌의 시너지를 만끽할 블록버스터!” 영화 <협녀>를 만나기 전 관객들의 기대는 그러했다. 물론 <와호장룡>만큼의 멋진 감동을 얻기엔 부족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중국이 독점했던 장르를 한국의 스크린에 펼쳐놓을 영화를 기대한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터. 해바라기 밭에서 영화가 시작할 땐 숨조차 죽였다. 하지만 그뒤 영화는 우리가 다 아는 실패의 길로 간다. 문제는 흥행이 아니다.

<협녀>는 단순히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한 배우 탓으로 몰기에는 부족한 허술한 스토리와 구성, 개연성 없는 캐릭터와 내러티브, 완성도 떨어지는 액션 등으로 국적 불명 이상한 무협영화로 귀결됐다. 요즘 관객들이 무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인가. 감독의 생각이 허공에 붕 떠있던 것은 아니었나. 정지욱(영화평론가)

왜, 지금, 서울서 구마영화를? <검은사제들>

검은
검은
<검은 사제들>을 보기 전 서구의 엑소시즘물을 어떻게 한국의 맥락에서 풀어낼지 궁금했다. 물론 사제복을 입은 강동원을 보고 싶은 마음에 끌리기도 했다.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강동원이 지닌 신비한 아우라는 엄숙한 사제복과 만나 묘한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영화는 가톨릭 구마의식을 꼼꼼히 재현했으며, 한국 가톨릭 사회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나, 명동 뒷골목으로 요약되는 한국적 풍경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시공간을 옮긴 것일 뿐, 왜 가톨릭 구마영화가 지금 한국에서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악령은 수천년 전부터 신 혹은 인류와 대적해온 존재일 뿐 ‘지금 여기’와 무관하다. 주인공의 트라우마도 너무나 탈역사적이다. 그 결과 영화는 해석의 여지가 없는 번안 액션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흥행은 놀라울 정도다. 사제복을 입은 강동원이 던지는 금지된 섹슈얼리티의 판타지가 강력하긴 한 모양이다. 황진미(영화평론가)

블롬캠프는 SF를 모른다 <채피>

채피
채피
종종 사람들은 할리우드 바깥에서 우연히 발탁되어 만든 데뷔작으로 천재 소리를 듣기 시작한 감독에 대해 좀 맹목적인 애정을 품는 경우가 있다. 흙수저가 금수저가 되는 걸 지켜보는 것 자체가 일종의 대리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그거 사실은 대단히 나쁜 버릇이다. <디스트릭트 9>의 닐 블롬캠프가 대표적이다.

<채피>는 인공지능을 가진 경찰 로봇이 점점 인간과 비슷한 존재가 되어간다는 이야기를 다루는 SF영화인데, 이 영화를 통해 블롬캠프는 자신이 에스에프(SF) 장르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그렇다면 그가 잘하는 것? 이미 할리우드가 지난 몇 십년간 다루어온 소재를 자신의 고향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얄팍하게) 버무려내는 것이다. 데뷔작 <디스트릭트 9>에서는 그게 기가 막히게 통했다. 왜냐면, 처음이었으니까. 닐 블롬캠프는 <엘리시움>, <채피>에서 계속 똑같은 방법을 써먹는다. 왜냐면, 그것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이렇게 재능이 부족하고 게으르기까지 한 젊은 감독에게 계속 기대를 거는 것보다는 진짜로 창의적인 장르 영화를 만들 줄 아는 감독에게 기대를 거는 편이 낫다. 이를테면 올해의 가장 근사한 에스에프(SF) 영화 <엑스 마키나>의 알렉스 갈란드 같은 감독 말이다. 김도훈(허핑턴 포스트 편집장)

올 최대의 낚시 ‘서울 로케’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어벤
어벤
뭔가 대단한 기대를 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만, 그럼에도 <어벤져스>의 서울 로케이션은 올 영화판 최대의 낚시 한 판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겠다.

관광 서울의 위상제고와 경제효과창출이라는 기치 하에 이루어졌던 교통통제 정도야 뭐, 오랜 세월 발효숙성된 시민의식으로 대략 넘긴다 치지만, 이 로케이션이 뭔가 국제적 ‘가문의 영광’인 듯 황송해하며 <어벤져스>마케팅의 기수를 자임했던 일부 언론, 그에 힘입은 국내 흥행으로 한국에서 쓴 제작비 충분히 회수하고도 남을 영화에 39억 환급금까지 퍼 준 당국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스러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장면들에 등장했던 서울의 전혀 안 매력적인 모습은 우리를 허탈의 도가니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건 물론 서울장면에 도달하기 전에 영화의 지루함에 지쳐 가수면 상태에 빠지지 않았을 때나 가능한 얘기겠다만.

결론적으로 <어벤져스>는 한국상영판에서 서울 등장 10초 쯤 전 자명종 소리를 넣어주는 성의 정도는 보였어야 했다. 한동원(영화평론가)

샤말란의 총기는 사라졌나 <더 비지트>

비지
비지
나이트 샤말란의 골수팬으로 늘 그의 신작을 기대한다. <더 비지트>는 이런 기대를 처참하게 배신한 망작이었다.

샤말란이 자신의 전매특허인 호러장르로 돌아온 이 영화는 <블레어 위치>, <클로버필드> 처럼 파운드 푸티지 형식의 작품이다. 실제 기록 영상을 보는 것 같은 생생한 이미지는 흠잡을 데 없지만, 수상한 외조부모의 집에 갇힌 두 남매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용두사미이다. 초반부 모호함이 가득한 분위기를 조성할 때까지만 해도 기대는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파운드 푸티지 영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스토리의 빈약함을 극복하지 못한다. ‘가짜 다큐멘터리’라는 한때 유행했던 장르의 식상함이 더해지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샤말란은 정녕 <식스 센스>와 <언브레이커블>의 총기를 회복할 수 없는 것일까. 장병원(전주영화제 프로그래머)

현란하지만 속은 텅 빈…<나이트 오브 컵스>

나이트
나이트
<나이트 오브 컵스>는 의심받지 않는 예술가가 만들 법한 실패작이다. 올해의 배신이란 말은 못하겠다. 말릭은 나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배신이 가능한가. 다 쓸데없는 기대를 품은 내 잘못이지.

고뇌하는 예술가 이야기다. 크리스찬 베일이 잘 나가는 할리우드 작가로 나온다.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고 인생이 공허하다. 이런 입장에 있는 예술가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는 풍광이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고뇌를 하는데, 그런 그의 곁엔 케이트 블란쳇에서부터 나탈리 포트먼에 이르는 쟁쟁하고 아름다운 배우들이 한 명씩 앉아있다.

비슷한 영화로는 <트리 오브 라이프>가 있었다. <나이트 오브 컵스>처럼 남성 중심적이고 과대망상증적인 독백 위주의 영화였다. 하지만 그 영화는 굳이 말릭의 비전과 주제를 따르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내용이 풍부한 작품이었다. <나이트 오브 컵스>는 <트리 오브 라이프>처럼 현란한 영화지만 내용이 없다. 너무 공허하고 자기 중심적이어서 오히려 재미있긴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영화가 아님은 분명하다. 듀나(영화평론가)

나를 기쁘게 한
고작 ‘천명’이라니…두고두고 미안하다

관객들 혼이 비정상인 게야 <들꽃>

들꽃
들꽃
집을 잃고 방황하는 세 소녀들이 있다. 아무도 그녀들을 돌보지 않는 세상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 몸부림은 처절할 정도이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카메라는 그녀들의 고투를 불안하게 지켜본다. 지난 11월 5일 개봉한 박석영 감독의 <들꽃>은 세 배우들의 열연과 작품에 대한 찬사(혹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관객 1000여명을 넘기는데 그쳤다. 1천만 관객 시대에 1천명이라는 관객 숫자는 초라해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불안에 떨면서도 희망을 부여잡으려는 소녀들의 간절함이 이렇게 담기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는 아쉬움은 두고두고 <들꽃>의 소녀들에게 미안함 마음으로 남을 것 같다. 조영각(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