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현 논설위원 입력 2021-05-20 03:00수정 2021-05-20 03:00
與 대선주자들의 선심공약 봇물
나랏빚 늘려 청년미래 위협할 것
박중현 논설위원
“통장하고 도장이 없어졌어. 누가 훔쳐갔나 봐.”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이런 얘기를 하기 시작한 건 4년 전 겨울 아버지 상을 치른 직후였다. 놀라서 퇴근 후 두 분이 살던 집에 가보면 옷장 속 숨겨둔 가방 안에 예금통장이 멀쩡히 들어 있곤 했다. 같은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된 뒤 모시고 병원에 갔다. 치매였다. 병석의 아버지에게만 신경 쓰는 동안 어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왔던 것이다.
고령사회 한국에 치매환자가 많은 건 당연하지만 어느 자녀에게나 ‘내 부모의 치매’는 처음 겪는 일이다. 이후 의사, 부모 치매를 경험한 사람들을 통해 치매노인들이 통장과 현금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는 걸 알게 됐다. 6·25전쟁 이후 밑바닥부터 출발해 경제적으로 힘겨운 시대를 살아낸 그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제일 믿을 수 있는 것, 절대 잃어선 안 되는 게 통장과 현금이었다. 한국보다 풍요롭고 집에 현금을 두지 않는 서구 선진국에선 결혼반지, 보석이 없어졌다고 호소하는 치매노인이 많다고 한다.
요즘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들이 청년들에게 뭉텅이 현금을 쥐여주자는 약속을 쏟아내고 있다. 4·7 재·보궐선거에서 이반현상이 뚜렷해진 20대, 특히 ‘이대남’을 어르려는 거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대학 안 가는 청년들에게 해외여행비 1000만 원을 지원해 주는 건 어떤가”라고 제안했고,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제대할 때 사회출발자금 같은 것을 한 3000만 원 장만해 드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출생 때부터 20년간 국가가 적립해 사회초년생이 될 때 1억 원짜리 통장을 만들어주자고 한다.
올해 성년을 맞은 청년이 49만7000여 명. 어림셈만 해봐도 매년 수조∼수십조 원이 필요한 공약들이다. 성년의 날을 맞아 민주당 지도부가 연 간담회에서 청년들은 “더 이상 이런 공약에 속아 표를 주진 않는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이런 말을 좀처럼 믿지 않는 게 정치인들의 속성이다. 선심성 공약일수록 무리해서라도 지키려 하는 게 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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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공약의 실현을 가로막을 장벽은 높아지고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이 현 정부에서 폭증한 나랏빚이다. 빚을 내 돈 쓰는 일이 습관화된 영향으로 내년 말 국가채무는 1000조 원을 넘는다. 최근 취임 4주년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적극적 확장재정”을 강조한 만큼 남은 1년도 흔들림 없이 돈을 풀 것이다. 코로나 위기에서 벗어나면 주겠다는 대통령의 ‘전 국민 위로금’ 약속도 살아 있다.
그런데 경고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한국의 신용등급을 제일 먼저 떨어뜨렸던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최근 “한국의 국가채무가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이라며 재정 규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절제된 표현을 쉽게 풀면 “지금처럼 써대다간 머잖아 신용등급이 떨어질 것”이란 경고다. 게다가 미국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면서 긴축 시기가 빨라지고 있다. 다음 정권을 누가 잡든 지금처럼 재정 털어먹기를 계속하다간 임기 내 경제 파탄을 각오해야 한다. 청년에게 쥐여준다는 돈도 결국 청년들이 평생 세금으로 갚아야 할 빚과 이자만 늘릴 것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요양원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가끔 만나는 어머니는 갓 고등학생 된 모습까지만 기억하는 손녀가 대학생이란 사실에 매번 놀란다. 그리고 “얘 대학 들어갈 때 등록금 해주려고 모아둔 돈이 있는데…”라고 한다. 끔찍이 챙기던 통장은 장성한 자식을 넘어 손녀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우리 정치인들에겐 기대할 수 없는 걸까.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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