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⑤ 시인 박인환의 장남 박세형

Shawn Chase 2021. 5. 20. 15:02

“문학이 아버지를 죽였지만 불행한 시인은 아니었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가장 1950년대다운 시인… 李箱 추모하며 술 마시다 심장마비
⊙ 1970년대 박인희의 낭송·노래로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다시 인기
⊙ “어머니 이정숙은 아버지 시의 첫 독자… 명동의 두 분은 한 쌍의 鶴과 같아”

[편집자 주]
20세기 한국의 문인만큼 치열하게 산 이들도 드물다. 나라를 잃었고 문자를 빼앗겼으며 이념의 소용돌이와 전쟁의 極限을 모두 체험했다. 더러는 親日로, 더러는 붓을 꺾고 순수와 이념문학의 길로 흩어졌지만 이들의 내면세계는 쉽게 재단할 수 없다. 이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자식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할까. 한국 근대 문인가족에 대한 연구는 매우 빈약하다. 생존한 가족의 입을 통해 문인들의 인간적 면모와 일화를 소개한다.
  1950년이라는 전쟁과 허무, 비탄과 우울 속에서 술과 낭만으로 시를 썼던 이가 박인환(朴寅煥·1926~1956·강원도 인제 출생) 시인이다. 끼니를 거르는 가난한 시인이었지만 몇 푼 안 되는 고료(稿料)로 조니 워커와 럭키 스트라이크(담배)를 좋아한 멋쟁이였다. 폭격의 상흔이 가득한 서울 명동을 주름잡던 문인 중에서 박인환만큼 지적이며 세련되고, 낯설면서 감성이 풍부한 시어(詩語)를 다룬 시인은 없었다. 가장 1950년대다운 시인이었다. 《경향신문》 종군기자로 포연 속을 누볐고, 그 슬픔을 만가(輓歌)로 노래 부를 줄 알았다.

 
  박인환 하면 우선 〈목마와 숙녀〉가 떠오르고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로 시작되는 〈세월이 가면〉이 생각난다. 이 시는 1970년대 혼성 듀엣 뜨와에 므와(佛語로 ‘너와 나’)의 박인희가 부르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목마와 숙녀〉는 노래가 아닌 낭송이지만 박인희의 애절하고 청아한 목소리로 큰 사랑을 받았다.
 
  시인은 1955년 유일한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내고 1956년 3월 20일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불과 서른한 살의 나이였다. 당시 그의 아내는 서른, 어린 2남1녀 아이들은 9살·7살·4살이었다. 9살이던 박세형(朴世馨·67)씨는 그날 밤 아버지의 마지막을 기억했다.
 
  “우리 집은 서울 세종로 135번지(지금의 교보빌딩 뒤편) 디귿자 한옥이었어요. 집 가운데 펌프로 우물물을 푸는 마당이 있었는데 그날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들어와 토를 하시니 제가 등을 쳐 드렸습니다. 입에서 활명수 냄새가 났던 것으로 기억해요. 안 되겠다 싶어 어머니는 의사 선생님을 모시러 뛰어가셨어요. 그때 밤 9시가 넘고 있었어요.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빈손으로 오셨습니다. 이미 아버진 눈을 감으셨어요.”
 
  그와 가깝던 문우의 증언으로는, 죽은 이상(李箱·1910~1937)의 기일(忌日·3월 17일)을 기해 사흘 동안 술을 마셨고, 죽던 그날도 화가 김훈이 사 주는 자장면을 한 그릇 먹었을 뿐 빈속이었다고 한다. 그는 염상섭·박종화·현진건 같은 당대 주호(酒豪)가 아니라 그저 풋술을 즐기던 여린 시인이었다. 술을 이겨 내지 못한 것이다.
 
  “당시 부모님은 사랑채를 쓰셨고 저는 외조부와 한방을 썼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밤늦게 외조부가 잠든 저를 깨웠어요. ‘이놈아, 네 애비가 죽었다’시며… 초등학교 1학년이던 제가 어떻게 죽음을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눈을 비비며 어머니가 계신 사랑채로 갔더니 아버지 시신이 옥양목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얼굴이 하어요. 눈은 감고 있었고요. 아버지 친구였던 송지영… 이봉구 시인의 증언은, 눈도 못 감았다고 하는데 제 기억으로 그런 것 같지는 않았어요.”
 
 
  나는 왜 아버지가 없을까
 

 

http://mailto:kimchi@chosun.com

 

chosun.com

 
20대의 박인환 시인.

  계속된 그의 말이다.
 
  “삼우제를 지내고 돌아오니 사흘 동안 계속 비가 내렸습니다. 저는 댓돌에 앉아 비를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다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우는데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하고 말이죠.”
 
  장남 박세형씨는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이 점점 깊이 다가와 오래도록 가슴을 짓눌렀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왜 별안간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나는 왜 아버지가 없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어요. 제 나이 15살 때는 마음속으로 ‘아버지보다 16년을 덜 살았다’고 되뇌었고, 서른이 되자 ‘아버지보다 1년을 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보다 오래 살면서 더는 죽음을 떠올리는 공포는 사라졌어요.”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시인 이전에 아버지는 처가살이를 할 수밖에 없는 무능한 생활인이셨어요. 자력으로 솔가해 자식을 부양할 생활인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참혹했어요. 당시 고료만으로 생활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됐을까요?”
 
  생전 박인환은 세탁소에 맡긴 스프링코트를 찾을 돈이 없어 두꺼운 겨울외투를 봄까지 걸치고 다녔다고 한다.
 
  박세형씨는 연세대 국문과를 나왔다. 영문과 최인호(崔仁浩·1945~2013)는 같은 학번이고 마광수(馬光洙) 교수는 국문과 1년 후배. 같이 수업 듣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사이였다고 한다.
 
  “국문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지방 출신들이 70%나 됐어요. ‘나는 어느 고교를 나왔는데, 고2때 전국백일장에서 1등을 했다’는 얘기부터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을 10번 읽었다’는 얘기까지 문학깨나 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저는 이렇게 소개했죠. ‘연대 정외과에 떨어져 재수해서 왔다’고요.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죠. ‘아버지가 시인 박인환인데, 그렇다고 시 쓰러 온 것은 전혀 아니다’.”
 
  마음속으로 절대 아버지처럼 문학을 하진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문학이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죠.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어요. 문학을 안 했다면 평범하게 사셨을 테니까요. 집안의 가장은 결혼해 땅에 발붙이는 걸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피는 못 속이는 것일까. 장성해 현대건설 리비아 현지 업무부장이었던 그가 회사 구조조정에 반발, 사표를 던진 일이 있다. 1년 넘게 회사와 송사(訟事)를 벌였는데 “그때 저절로 시가 나오더라”고 했다.
 
  “직장에 다닐 때는 몰랐는데 제가 바닥으로 떨어져 보니 시가 저를 구제하더군요. 정신없이 썼어요. 유명한 미술평론가인 친구놈이 제게 ‘미적 감각이 놀랍다’고 할 정도였어요.”
 
 
  아버지 책과 옷가지 모두 버려
 

 
1955년 박인환과 그의 시 〈세월이 가면〉을 작곡한 이진섭, 박태진(오른쪽부터).

  시인이 살았던 세종로 135번지는 박인환의 처가였다. 그곳은 현재 교보생명 광화문 본사 사옥 뒤쪽이다. 그는 처가살이를 한 것이다.
 
  “제 외조부는 일제시대 은행지점장을 하셨고, 창덕궁 이왕직(李王職)에서 회계를 담당하던 분이셨어요.”
 
  이왕직은 일제 강점기 이왕가(李王家)와 관련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다. 한일병탄 이후 이왕직은 대한제국 황실이 아닌 일본의 궁내성(宮內省)에 소속됐다. 시인의 장인은 고종의 재산과 재정운영을 맡았다고 한다.
 
  “외조부는 딸만 둘을 두셨는데, 어머니는 맏딸과 14살 차이가 나는 둘째셨어요. 그렇게 어여뻐하시며 애지중지로 키우셨어요. 그런 사랑을 받아서인지 어머니 성격이 의존적이셨어요. 평생 모든 재화를 처가를 통해 받았으니 돈 개념도 없으셨어요. 원서동(창덕궁 인근) 시댁에서 밤마다 친정이 그리워 우셨다고 해요. 딸 소식이 궁금한 외조부가 퇴근길에 들르셨는데 그때마다 우는 모습을 보셨어요.
 
  하는 수 없이 외조부가 조부에게 얘기해 신접살림을 처가로 옮겼습니다. 아버지는 수레에 한가득 책을 싣고 처가로 들어가게 됐다고 합니다.”
 
  시인의 아내는 귀하게만 자라서였는지 생활력이 없었고 비현실적이었다고 한다.
 
  “어깨 폭이 좁아 어머니처럼 한복을 잘 입은 이를 본 적이 없어요. 키가 170cm로 늘씬했고 진명여고에 다닐 때는 농구선수셨는데 포지션은 포드였어요. 얼마나 날렵하셨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한복을 차려입으셨다면 날아가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또 어머니만큼 얼굴 화장이 아름다운 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어요. 그런 분이 서른에 청상이 되어 평생을 홀로 사셨어요.”
 
  —맏이는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잖아요.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땠나요.
 
  “사실, 저와 어머니는 편한 사이가 아니었어요. 뭐랄까 묘한… 생활 안에 불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불화의 원조는 제 안에 남아 있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의 찌꺼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머니 나이 고작 서른에 애가 셋이었잖아요. 절망의 깊이를 이해한들 어린 자식들은 알 수가 없을 겁니다. 어머니는 떠난 아버지의 책들, 사랑채 벽면을 빼곡히 둘러쌌던 아버지의 흔적을 죄다 버렸습니다. 넝마주이가 다 가져갔어요. 아버지 옷가지들도 없애 버리셨어요. 우리 집처럼 선친의 유품이 없는 집이 없을 거예요. 그저 사진 몇 장밖에.”
 
  시인의 부인 이정숙은 작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박인환이 운영했던 ‘茉莉書舍’ 이야기
 

 
박인환 이정숙 부부가 명동에 출현하면 마치 폐허 속의 鶴과 같았다고 한다.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3년제)에 다니던 박인환은 광복 이후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버지한테서 받은 3만원과 작은 이모에게서 2만원을 얻어 종로 3가 2번지(지금의 낙원동 입구), 이모의 포목점 바로 옆에다 서점을 열었다. 서점은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유명했던 ‘마리서사(茉莉書舍)’. 김광균 김규동 이봉구 박영준 김수영 이시우 설정식 김기림 같은 문인들이 드나들었다.
 
  “혹자는 ‘주인이 서점에 없고 장사는 안 되는 데다 책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아닌 문학청년들이 모여서 떠드는 소굴’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마리서사 진열책 대부분이 아버지가 보유하던 외국문학 서적이라고 했고요. 아버지와 절친했던 시인 김수영은 ‘마리서사를 빌어,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 구별이 없던 몽마르뜨 같은 분위기였다’고 했지요. 아버지는 문우들과 모여 저녁을 먹더라도, 자기가 밥값을 내고 싶어했어요. 책 판 돈은 대개 그렇게 나갔어요.”
 
  시인은 서점 손님으로 왔던 이정숙을 알게 되어 마침내 약혼하기에 이른다. 서점은 영업부진으로 몇 년 안 가 문을 닫지만 반려(伴侶)를 찾은 셈이다.
 
  “두 분은 마리서사에서 처음 만나셨어요. 여성잡지사 기자였던 어머니의 사촌언니(이석희)와 누구를 병문안 가다가 우연히 서점에 들렀대요. 문을 열고 들어서니 쪽방 같은 곳에서 여름 모시옷을 시원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나와 자리를 권하는데, 그게 바로 아버지와의 첫 만남이었다고 해요.
 
  두 분은 많은 시간을 명동에서 보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 시의 첫 독자였어요. 시를 쓰면 꼭 어머니께 먼저 보여드렸습니다. 또 그 무렵 개봉하던 영화는 거의 모두 보았다고 하고 두 분이 명동에 나타나면 문우들이 ‘한 쌍의 학(鶴)과 같다’고 말했대요.”
 
  광복 후 미 군정 시절 MPEA(미국 8대 메이저들의 외국배급 카르텔)의 한국사무소가 1946년 생겼다. 정식 명칭은 중앙영화배급소. 이곳에서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독점 배급했다. 한국영화는 연간 4~5편에 불과했다.
 
  당시 이정숙의 사촌언니 이석희의 남편 임동규씨가 중앙영화배급소에 재직하고 있었다. 그가 박인환에게 시사회 초대권이나 개봉관 표를 두 장씩 자주 주었다고 한다. 박인환·이정숙 두 커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충무로 바닥을 누볐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생전 많은 영화비평을 남기기도 했다.
 
  “아버지가 경기중에 다닐 때부터 시와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해요. 당대 문인처럼 서양문물을 체감한 유학파도 아닌 분이 어떻게 첨단의 모던한 현대시를 쓸 수 있었을까요? 저도 불가사의하다고 생각돼요. 항간에는 아버지가 경기중을 자퇴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이 아니에요. 경기중에 다닐 때 지금의 서울시의회 별관 자리에 있던 부민관에서 영화를 보다 선생님에게 들켜 퇴학을 당했다고 들었어요. 아버지 이모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학창시절 아버지의 책상 서랍을 열면 외국영화 포스터가 두루룩 굴러 나왔대요.”
 
  1948년 5월 결국 두 사람은 덕수궁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어요. 결혼 날짜가 잡히면 함이 오잖아요. 사주단자에 적힌 아버지의 실제 나이가 어머니보다 1살밖에 많지 않은 거예요. 그동안 아버지는 당신 나이보다 5살 많게 얘기했던 모양입니다. 그것을 두고 처가가 실망을 하고 두 분이 티격태격했는데 당시 우리 집 뒤편으로 꽤 깊은 개울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화가 나서 물속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셨대요. 그러곤 유리병으로 자기 손을 확 찍더라는 겁니다. 감추려 했지만 몇몇 결혼식 사진에는 흰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이 나와요.”
 

서점 ‘茉莉書舍’의 유래는
 

“마리 로랑생의 이름에서 나왔다”
 
  박인환의 서점 ‘마리서사’의 이름은 독특하다. 어떤 연유로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까. 일부 문인들은 ‘마리’라는 명칭이 일본의 모더니즘 시인 안자이후유에(安西冬衛)가 31살 때 출간한 첫 시집 《군함 말리》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말리(茉莉)란 외래종 떨기나무의 일종. 당시 말리를 일본에선 ‘마리’라 불렀다고 한다. 시인 김수영도 훗날 “박일영(朴一英)이란 화가가 ‘서점 상호를 시집 《군함 말리》에서 따 준 것’이라 말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장남 박세형씨는 다른 설을 제기했다.
 
  “아버지는 프랑스의 여류 예술가였던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을 좋아하셨는데 그분의 이름 ‘마리’와 관련 있다는 얘기를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마리 로랑생은 당대 피카소, 기욤 아폴리네르 등과 교우(交友)하신 분입니다. 자유로운 환상과 감상을 화폭에 담은 독특한 화가였다고 해요. 저나 어머니는 《군함 말리》보다 ‘마리 로랑생’에서 유래하고 있다고 믿고 있어요.”

 
  “박인희의 낭송 〈목마와 숙녀〉는 통속적”
 

 
1948년 이른 봄 박인환과 이정숙은 많은 문우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박인환의 사후 20주기가 된 1976년 후손들은 생전 아버지가 펴낸 《선시집》(전체 54편)에다 이후 발표된 시, 미발표 유작(遺作), 첫 시집에서 빠진 이전 시들을 더해 시집 《목마와 숙녀》(61편)를 펴냈다.
 
  “본래 첫 시집 《선시집》은 한정판으로 나왔었는데, 그 후 화재로 절판돼 시중에서 보기가 어렵게 됐어요. 물론 월간지, 문학지 등에서 아버지의 시 일부를 초록(抄錄) 전재한 경우가 몇 차례 있었으나, 이렇게 거의 모든 시편을 묶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생전 어머니에게 ‘혹시 내가 죽으면 내 시집이 잘 나갈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그게 어쩌면 현실화됐습니다. 《목마와 숙녀》가 10만 부 이상 팔렸으니까요. 자식들 결혼할 때 인세의 도움을 조금씩 받아 시집장가 갔으니 말이에요.”
 
  —많은 시 중에서 시집 제목을 왜 ‘목마와 숙녀’로 정했나요.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는 도입부가 리드믹하지 않습니까. 그 시 속에 뭔가 많은 그림이 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1971년인가 72년인가 박인희라는 가수가 낭송을 해 크게 알려진 후였어요.”
 
  지금 들어 봐도 박인희의 감성적 목소리에 실린 〈목마와 숙녀〉는 쓸쓸함이 묻어 있다. 유신(維新)이라는 시대적 분위기까지 더했다. 당시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중략)’에서 뭔지 모를 멜랑콜리한 슬픔에 전 국민이 젖어들었다.
 
  그러나 박씨는 박인희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시에다 음악을 붙이는 것은 시적 이미지를 혼란시킬 수 있어요. 시는 그냥 언어로 읽고 행간으로 느껴야 하는데 박인희의 낭송과 배경음악은 가슴을 우려내려는 통속적 색채가 많아요. 괜히 아버지 생각을 왜곡시켜 놓은 것이 아닌지 몰라요.”
 
 
 

 

  • 명동의 엘레지, 〈세월이 가면〉 
      〈… 사랑은 가고 / 과거는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 가을의 공원 / 그 벤치 위에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어 /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세월이 가면〉 전문)
     
      한국전쟁 이후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던 ‘명동쌀롱’에 모인 예술가들이 박인환의 시에 즉흥적으로 멜로디를 붙여 소위 ‘명동 엘레지’로 알려진 시가 〈세월이 가면〉이다. 1950년대 명동의 주점 〈은성〉에서 탄생한 것으로 회자한다. 은성은 탤런트 최불암(崔佛岩)씨의 어머니가 주인. 곡은 박인환의 절친인 이진섭이 만들었다. 박씨의 말이다.
     
      “시는 말이죠, 영감이 떠오르면 후닥닥 금방 쓰잖아요. 굳이 퇴고를 안 하죠. 마치 신이 내린 것처럼 씁니다. 그런데 작곡은 달라요. 시어에 맞춰 작곡을 해야 합니다. 아버지 시에 즉흥적으로 곡을 붙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세월이 가면〉의 악보를 본 일이 있다고 회고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됐나요? 세종로 집으로 아버지와 이진섭 선생이 왁자지껄하게 오셨는데, 그날 8절지 도화지에 〈세월이 가면〉이 적혀 있었는데 좀 특이했어요. 콩나물 대가리 같은 음표는 없고, 아라비아 숫자가 잔뜩 있었거든요.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음표더라고요. 예를 들어 ‘도·미·솔’ 하면 ‘1·3·5’라는 식으로….
     
      아버지는 목소리가 좋으셨어요. 〈세월이 가면〉은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 불렀으리라 추정해요. 왜냐? 제가 어렸을 때 사랑채에서 두 분이 함께 불렀던 샹송이 아직도 생생하니까요.”
     
      —어떤 샹송인가요.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라모나’라고 하는 노래였어요.”
     
      그는 샹송의 리듬을 콧노래로 불렀다.
     
      “요절 시인의 시가 지금도 회자하고, 학생들의 문학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냐”는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명동을 활보할 당시 다 어렵고 참혹하던 시절이었고 아버지는 불행하게 가셔야 했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니 결국 아버지는 불행한 시인이 아니었어요. 사람들은 지금도 (아버지 시를) 좋아하고, 그 감정을 행간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