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소신과 팩트로 무장했던 유능한 여성 정치인은
극성 ‘문빠’에 무릎 꿇고 민심과 존엄을 잃었다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입력 2021.04.26 03:00 | 수정 2021.04.26 03:00
퇴근길. 택시 기사가 저 혼자 혀를 찼다. “10만원에 홀랑 넘어갈 줄 알았나? 국민을 등신 취급해도 유분수지.” 선거 끝난 지 닷새가 지난 날이었다. 백미러를 흘끔대며 기사가 또 궁싯거렸다. “저격수 박영선이 민심에 저격당했지 뭐야. 똑똑한 여잔 줄 알았더니, 안 그래요?”
지난 7일 서울시장 선거 당일 오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사에 박영선 후보가 들어서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애초 명분도 실리도 없는 싸움이었다. 출마 자체가 여성이 여성을 공격하는 2차 가해였다. LH 사태, 김상조 전세금까지 속수무책이었다지만 조세 저항으로 이미 민심이 돌아선 뒤였다. 돌아보니 구색 맞추기용이었던 경선 상대 우상호도 “녹록지 않은 싸움”이라며 몸을 사렸었다. 박영선만 몰랐다.
택시 기사 말마따나 그녀는 저격수였다. 초선 의원이던 2005년 금산분리법을 관철시킨 재벌 저격수였고, 2007 대선에선 이명박 후보를 최대 위기로 몰아넣은 BBK 저격수였다. ‘오빠 박지원’과 콤비를 이뤄 낙마시킨 총리와 장관이 몇이던가. 헌정 사상 여성 최초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과 원내대표를 지냈고,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막상 링에 오른 박영선은 왕년의 저격수가 아니었다. ‘피해 호소인’ 3인방 중용, 20대 역사 경험치 폄하는 해프닝이라 치자. 정의당 비난에도 고(故) 노회찬 의원을 소환해 강행한 버스 유세는 퍽 다급한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대중을 실망시킨 건 TV 토론이었다. 말꼬리 잡고 면박 주기는 장관까지 지낸 이의 격을 허물었다. 말문이 막히면 ‘용산 참사’를 들이미니 헛웃음이 났다. 팩트를 무기로 강력한 펀치를 날리던 박영선은 어디로 간 걸까. 그가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이라고 외쳤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났던 걸까.
강준만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박영선은 “부족주의 늪”에 빠졌다. 최근 펴낸 ‘부족국가 대한민국’에서 강준만은 “평소 이념과 소신대로라면 절대 안 했을 것이고 할 수도 없는 말을 자신이 소속된 정치적 부족의 이익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패거리정치의 늪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버려진 카드’였는지도 모른다. 2011년 서울시장 선거에 등 떠밀려 나간 나경원이 그랬다. 선거 전부터 한나라당이 20%포인트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당의 유세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나경원은 “당은 내가 서울시장에서 낙선하는 것이 이듬해 총선에서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던 거다. 난 버려진 카드였다”고 했다. 박영선의 패색이 짙어졌을 때 나경원이 “박 후보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뭘 해도 안 되는 좌절과 외로움. 그럴수록 당당하길 바란다”고 고언한 이유다.
박영선이 문빠 부족주의를 거부하고, 박원순 피해자를 찾아가 무릎 꿇고 사과하는 것으로 출마 선언을 했다면 어땠을까. 20대 역사 경험치를 탓할 게 아니라 조국 사태로 분노하는 청년들에게 먼저 유감을 표했다면 어땠을까. 김어준과 생태탕을 우려먹는 대신 부동산 실정을 인정하고 대안 마련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어땠을까. 석패는 했을지언정 자신의 존엄은 지키지 않았을까.
박영선은 봄날 같은 시장이 되겠다며 출사표를 던졌으나, 구태 정치인들이 걷는 ‘쉬운 길’을 택했다가 끝내 봄을 맞지 못했다. 패배의 책임을 두고 싸우는 민주당에 “목련이 다시 필 때까지 정권 재창출을 위해 단합해달라”고 했다가 “고통받는 국민보다 정권 재창출이 먼저인가. 소나무에 낙엽이 질 때까지 성찰하라”는 쓴소리를 들었다.
저격수의 총구는 항상 옳은 방향으로 겨눠야 명중하고, 국민을 졸(卒)로 보는 집단을 방패 삼았다간 함께 무너진다. 문심(文心)을 좇다 민심을 잃은 그녀에게 봄은 다시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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