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원, AI 프로그램 사용 관련해 기사 내규 신설
이홍렬 바둑전문기자
입력 2020.11.20 20:42
대국에 앞서 명상 중인 김은지 2단. /한국기원
‘천재 바둑소녀’가 인공지능의 유혹에 발목 잡혀 추락하는데는 두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한국기원은 20일 비공개 운영위원회를 열고 소속 프로기사 김은지(13) 2단에게 1년간 자격 정지 조치를 내렸다.
이날 운영위에는 김은지 2단의 어머니(김연희)씨도 참석했다. 국가대표팀 목진석 감독의 경과 보고에 이어 발언대에 선 김씨는 “제기된 혐의를 인정하며 처벌을 달게 받겠다. 하지만 아직 어린 나이를 봐서 좌절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울먹이며 선처를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사자인 김 2단은 참석하지 않았다.
20일 김은지 2단에게 AI 치팅과 관련된 징계 결정을 내린 한국기원 /한국기원
지난 9월 29일 밤에 열린 ‘오로국수전’ 이영구(33) 9단과의 24강전이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됐다. 바둑 전문사이트 ‘세계사이버기원’이 주최한 이 인터넷 기전엔 우승 상금 1000만원이 걸려있다. 종합랭킹 100위권 밖인 김 2단이 한국 7위이자 국가대표팀 코치이기도 한 이 9단을 상대로 AI(인공지능) 일치율이 무려 92%에 달하는 일방 우세 끝에 완승하자 바둑계가 경악했다. 김 2단은 치팅 의혹을 부인하다가 이후 일부 시인했고 국가대표 팀을 떠났다. 하지만 이후 예정돼 있던 국내외 공식전 일정은 모두 소화해 왔다.
이번 결정으로 김 2단은 향후 1년간 공식전 출전이 불가능해졌지만, 문제 시점 이후 치른 대국의 유효성 여부도 논란이 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지난 14일부터 한·중 간 원격 대국으로 열리고 있는 중국 을조리그는 국제전 성격을 띠고 있어 주목된다. 김 2단은 21일까지 대국이 잡혀 있으며, 상하이 팀과 맺은 계약엔 2만 위안(약 350만원)의 위약금 조항이 존재한다.
대국중인 김은지 2단. /한국기원
자격 정지 1년으로 결정된데 대해선 극단적인 찬반 양론이 함께 나오고 있다. “기사는 한 두 달만 정규 무대에서 떠나있어도 감각을 잃고 후퇴한다. 철 없는 나이에 저지른 실수에 1년은는 과도한 처벌”이란 주장을, 다른 한편에선 “나이, 재주와 관계없이 프로의 기본에서 크게 벗어난 만큼 영구 제명이 정답”이란 의견을 각각 내놓고 있다.
바둑계에서 인공지능을 악용한 부정 사례로는 지난 1월 열렸던 프로 입단대회 사건이 대표적이다. 붕대를 둘러 감춘 귀에 이어폰을 숨긴 채 출전, 밖에서 AI의 착점을 알려준 공범의 도움을 받으며 대국하다 적발돼 처벌됐다. 3년 전엔 모 현역 프로기사가 소규모 리그에 출전, AI를 활용하다 적발됐지만 즉시 시인하고 사과해 경징계에 그쳤었다.
이번 사태를 기회삼아 온라인 대회 방식을 전면 손봐야 할 시점에 왔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전자기기(器機) 오작동 문제에 시달려온 바둑계는 치팅에 따른 공정성 보완이란 또 하나의 큰 과제와 마주하게 됐다. 코로나 사태로 대면(對面) 대국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돌파구 역할을 했던 인터넷 방식 대국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바둑계 여러 조직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한국 바둑의 총 본산인 한국기원은 상황을 인지하고도 신속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화를 키웠다. 특히 당사자가 혐의를 인정한 뒤에도 국내외 대회 출전을 묵인한 것은 중대한 실책으로 지적된다. 화상캠 같은 감시장치 하나 없이 ‘안방 대국’을 치러 치팅가능 환경을 방치한 인터넷 업계도 변화가 필요해졌다. 프로기사들에 대한 인터넷 윤리교육 강화 필요성도 확인됐다. 한국기원은 이날 회의에서 인공지능프로그램 사용과 관련된 소속 기사 내규를 신설하고 위반시 자격정지 3년 또는 제명 조치키로 했다.
김은지는 누구?
2007년 5월 생으로 만 13세다. 한국기원 현역 프로 377명(여자 70명) 중 최연소 기사이기도 하다. 2020년 1월 12세 8개월의 기록적인 나이에 프로가 됐다. 6살 때부터 어린이 대회를 휩쓰는 등 천재소녀로 소문났다. 2015년엔 SBS 교양 프로그램 ‘영재발굴단’에 소개되기도 했다. 입단하기 전 프로 선배들을 자주 꺾었고 아마여자국수전서 2년 연속 우승하는 등 각종 대회를 석권했다.
대국에 앞서 명상 중인 김은지 2단. /한국기원
입단 8개월만이던 지난 9월엔 쟁쟁한 선배들을 잇달아 누르고 제3회 오청원배 예선을 통과, 사상 최연소로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한국여자바둑리그에 이어 중국 여자 을조리그에도 참가 중이다. 국내 여성 프로기사 중 입단 첫 해 한 중 양국 리그에 함께 선발된 것은 김 2단이 처음이다.
눈부신 활약이 계속되자 김 2단을 현역 세계 여성 최고수인 최정(24) 9단의 후계자로 점찍는 전망이 잇달았다. 김은지 스스로도 인터뷰 때마다 “최정 9단이 목표”라고 말해 왔다. 2006년생인 우이밍, 2009년 태어난 나카무라 스미레 등 중국과 일본이 ‘기획 상품’으로 키우고 있는 영재들과의 미래 주역 경쟁은 항상 화제가 됐다.
선이 굵은 기풍으로 힘이 넘치는 바둑을 구사한다. 특히 전투력에 관한 한 최정상급에 밀리지 않는 펀치력을 인정받고 있다. 김 2단의 극성 팬들은 빨리 여왕으로 등극하라는 뜻에서 ‘퀸은지’란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입단 9개월 만인 지난 달 한국 여자랭킹 4위에 올랐다가 11월 현재 5위에 랭크돼 있다. 10월 2단으로 승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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