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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39. 200g의 승리. 대한민국 첫 세계선수권자 레슬링 장창선

Shawn Chase 2020. 11. 8. 14:17

이신재 입력 2020.11.08. 06:12 수정 2020.11.08. 06:24

 

다다미 바닥은 거칠었다. 브릿지 연습을 하느라 얼굴을 수없이 비볐다. 남은 건 귓구멍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은 채 부풀어 오른 반쪽짜리 귀였다. 그러나 그 ‘못생긴 귀’가 1962년 아시안게임 은메달, 1964년 도쿄 올림픽 은메달 그리고 1966년 토레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 금메달을 만들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52kg급 결승전. 장창선은 일본의 요시다 요시가츠에게 판정패, 은메달에 머물렀다. 대한민국 레슬링의 올림픽 첫 메달이었지만 일본에게 진 것이 너무 억울했다. ‘다음엔 반드시 이긴다.’ 장창선은 각오를 다지고 또 다졌다.

1966년 미국 토레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 대진표를 받아 든 장창선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컨디션이 좋아지는 3차전과 그 이후에 난적인 일본의 가쓰무라를 비롯 소련, 미국과의 싸움이 있었다. 해볼 만 했다.

언제나 1, 2차전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감량을 하느라 진을 다 뺏기때문이었다. 장창선은 평소 체중은 58~59kg, 출전 체급은 52kg급. 비교적 많이 빼는 편이었지만 56kg급에 나가면 승산이 없었다.

이기자면 6~7kg의 감량은 참아내야 했다. 대회 보름 전부터 서서히 빼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운동을 꾸준히 하기에 살 찔 겨를이 없었던 몸에서 또 살을 들어내는 작업이니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그렇게 빼니 첫 경기가 좋을 리 없었다.

1차전 폴란드, 2차전 아르헨티나, 쉬웠다. 3차전은 가쓰무라. 어려운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일본선수 무섬증이 있었다. 2점을 먼저 얻어놓고도 노심초사하다 막판에 동점을 내주는 바람에 벌점 3점을 받았다.

터키, 소련은 잘 넘었다. 마지막 상대는 홈 매트의 미국 샌더스. 꼭 이겨야 했고 이길 수 있는 상대였지만 미국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 탓에 어찌어찌하다 3-3으로 비기고 말았다. 벌점 5점이었다.

상황이 복잡해졌다. 장창선은 경기를 끝냈지만 샌더스와 가쓰무라는 맞대결을 남겨놓고 있었다. 경기 결과에 따라 순위가 왔다갔다했다. 장창선이 가장 유리했지만 공동1위가 나올 수 있었다. 그럴 경우 몸무게로 순위를 정했다.

볼 것 없었다. 무게를 줄여야 했다. 장창선은 뜨거운 사우나실로 달려갔다. 아니 단장, 감독 등에게 끌려갔다. 그들은 장창선을 밀어 넣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조그만 유리문을 두드리며 열어달라고 했다. 밖에선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더욱 세게 두들겼다. 마찬가지였다. 유리를 부술 생각으로 쳤으나 그건 그렇게 쉽게 깨지는 유리가 아니었다. 단장을 비롯 서넛의 선배들이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에겐 그렇게 보였다.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나가면 당장 죽일 듯 펄펄 날뛰었다. 밖은 여전히 오불관언이었다. 날뛰니 더 죽을 것 같았다. 의식이 조금씩 사라지는 듯 했다. 어느 순간 무의식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기분이 묘했다. ‘아, 이러다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들 즈음 문이 열렸다.

10cm 밖의 세상은 그야말로 황홀했다. 금메달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 순간이 생애 최고였다. 그때 뭔가 번쩍했다. 코피가 흘렀다. 하경대 단장이 한방 날린 것이었다. 조금의 피라도 빼서 무게를 줄이려는 안간 힘이었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가쓰무라와 샌더스가 4-4로 비겼다. 가쓰무라도 벌점 5점. 최후의 계체량. 장창선이 먼저 체중계에 올랐다. 52kg. 가쓰무라가 뒤이어 올랐다. 52kg을 넘어가는 듯 했다. 52.2kg.

200g.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대회 금메달이었다.

모두들 좋아서 난리였다. 장창선도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머리 한편에서 불쑥 한 생각이 떠올랐다. 200g이면 코피는 안 흘려도 되는 것 아니었나. 아니 그것 때문에 200g이 준 것일까?

장창선에게 가난은 숙명이었다. 전쟁 중에 부친이 실종되었고 어머니는 인천 신포동 시장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며 1남3녀의 네 남매를 키웠다. 그 가난은 또 한편 그를 챔피언으로 키운 의지의 밑천이었다.

그래서 장창선이 1966년 미국 토레도에서 열린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 자유형 52kg급에서 우승, 대한민국의 첫 챔피언이 되자 국민들은 함께 울고 웃었다. 그의 세계 제패는 행운이나 우연이 아니었다. 반드시 ‘하고 만다’는 투혼의 결과물이었다.

가난을 타고 난 작은 청년(키 1m58)의 세계 제패는 그 시절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었다. 단지 스포츠의 승자로만 본 것이 아니었다. 불패의 헝거리 정신을 높이 산 인생의 승자로 보았다. 운동을 하기위해 틈틈이 아이스케키 통을 들고 산기슭을 오르내리고 신문 배달을 한 것이 알려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시대의 아이콘이 된 장창선에게 집 한 채 살 수 있는 격려금(105만원)을 주었다. 수많은 독지가들이 그를 돕겠다고 나섰다. 언론에 발표된대로 그 격려금을 다 받지는 못했으나 장창선은 가난에서 벗어나 레슬링 후학들을 키우는 일에 나설 수 있었다.

콩나물 엄마의 위대한 승리이기도 했던 장창선.

이 작은 청년은 훗날 이건희를 레슬링으로 이끈 디딤돌이 되었고 이건희는 그 길을 열심히 가다가 IOC위원, 평창동계올림픽을 만났다. 삼성그룹 회장과는 또 다른 길이었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20manc@maniarepo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