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2020년 한국과 1971년 덴마크

Shawn Chase 2020. 9. 6. 01:38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입력 : 2020.09.05 18:03

 

 

입력 : 2020.09.05 18:03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박물관의 <덴마크의 보물> 전시를 공동기획한 TV2 채널의 방송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들이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책을 펼쳐보고 있다. 코펜하겐 국립박물관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이하 <아기는>)는 제목에 충실한 책이다. 임신과 출산 과정을 궁금해하는 어린이의 시각에 맞춰 사실적인 내용을 담은 성교육 서적이다. 1971년 덴마크의 작가이자 심리치료사, 성 연구가인 페르 홀름 크누센이 쓴 이 책이 거의 반세기가 지나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여성가족부가 기업·아동단체 등과 함께 해당 서적이 포함된 성평등 교육용 ‘나다움 어린이책’ 선정도서들을 초등학교 등 교육현장에 배포한 사업을 두고 보수성향 단체·정당에서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성행위를 표현했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여가부는 이 책을 포함한 7종의 도서를 회수하기로 결정했다.

보수성향 개신교계 단체 집단 움직임

 

이 책이 고향인 덴마크에서는 어떤 대접을 받을까. 9월 4일부터 덴마크의 코펜하겐 국립박물관에서는 <덴마크의 보물> 전시가 열린다. 최근 100년 동안 덴마크인들의 일상에서 나타난 변화와 역사적 흐름을 100개의 물건을 통해 보여준다.

<아기는> 책은 덴마크의 현대사를 잘 보여주는 ‘보물’ 중 하나로 선정됐다. 성에 대해 자유로운 분위기를 덴마크를 대표하는 특징으로 보여주는 이 전시에서는 <아기는>을 비롯해 세계 최초로 공식적인 성교육이 이뤄졌다는 점을 덴마크의 자랑거리로 꼽는다.

같은 책을 두고 두 나라에서 완전히 상반된 반응이 나오고 있는 셈이다. <아기는>을 포함한 7종의 책이 문제가 있다며 도마에 올린 배경에는 보수성향이 강한 개신교계 단체의 집단적인 움직임이 있다. ‘나쁜교육에 분노한 학부모 연합’(분학연) 등의 단체들이 지난 6월부터 ‘나다움 어린이책’ 배포사업을 비판하고 나섰고, 8월 들어 본격적으로 7종의 책을 지목해 ‘조기 성애화’와 ‘동성애 조장’ 같은 이유를 들며 학교에서 수거하라고 요구했다. 8월 25일에는 김병욱 국민의힘 의원이 국회 교육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같은 취지로 문제를 제기하자 여가부는 바로 이튿날인 26일 도서 7종을 전량 회수하겠다고 밝혔다.

 

<아기는>에서 특히 논란이 된 대목은 성관계를 ‘재미’있고 ‘신나고 멋진 일’이라고 표현한 부분이다. 책을 읽는 어린이의 시점에서 부모의 모습을 닮은 남녀는 사랑에 빠지고 성관계를 통해 태아를 잉태한다. 이어 출산 과정을 거쳐 아기가 세상에 나오는 장면까지 그림으로는 단순하게 표현됐지만 핵심적이고 현실적인 과정들을 상세하게 알려준다. 김병욱 의원은 이러한 장면을 두고 “성교를 일종의 놀이처럼 서술하고 있다”며 “조기 성애화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의 한 장면. 담푸스

그밖의 다른 책들은 대부분 동성애를 미화한다는 이유로 표적이 됐다. <엄마 인권 선언>과 <아빠 인권 선언>에서 나온 “원하는 대로 사랑할 수 있는 권리”라는 표현이나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에서 “아주 비슷한 사람들이 사랑할 수도 있어. 예를 들면 남자 둘이나 여자 둘이” 같은 표현 등이다. 동성애와 같은 사랑의 방법이 있다고 소개하고, 그에 대해 편견을 갖지 말자고 교육하는 내용을 동성애 조장·미화로 해석한 것이다.

동물을 의인화한 동화 내용을 두고 “이종 간 결합을 미화한다”고 비판한 지점은 더 황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엄마는 토끼 아빠는 펭귄 나는 토펭이!>는 제목처럼 토끼와 펭귄 부모 사이에서 나온 ‘토펭이’라는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귀는 토끼귀를 하고 부리와 물갈퀴는 펭귄을 닮은 토펭이는 다른 동물들과 다른 모습 때문에 따돌림을 겪고 혼자 깊은 시름에 빠지기도 하지만 자신만의 장점을 살려 무서운 적을 물리치고 주위로부터 인정받는다. 동화에서 흔히 표현되는 이러한 상상력을 두고 분학연 측은 “어린이들에게 수간 등 이종 간 성적 결합을 다양한 ‘성적취향’ 중 하나로서 정상적인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비판했다.

여가부는 국회의원 1명의 비판이 알려진 바로 다음 날 즉각적인 회수 조치에 나선 데 대해 사실상 사업에 참여한 기업과 아동단체의 눈치를 본 결정이었음을 내비쳤다. 이정옥 여가부 장관은 8월 31일 온라인으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회수 이유에 대한 질문에 “정부 예산을 쓴 사업이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공헌사업으로 파트너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답했다. 이 장관이 언급한 사업 파트너는 사회공헌 취지로 사업에 참여한 롯데지주와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을 가리킨다. 그러면서 이 장관은 “관련 학부모 단체와 소통을 시도했으나 해당 단체의 대표자가 코로나19에 확진됐다”며 사회적 논의가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밝혔다.

같은 책 두고 두 나라서 상반된 결과

성에 관한 문제에선 유독 엄숙주의 태도를 요구하는 보수적인 여론 때문에 공론화가 미뤄지고 있다는 우려는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나다움 어린이책’ 사업을 실질적으로 주관한 씽투창작소의 남윤정 대표는 “정부와 기업 쪽 입장에서는 논란이 이어지는 것을 피하고 싶겠지만 오히려 민간 차원에서는 이 일을 계기로 엄숙주의 때문에 제대로 된 성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대해 사회적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보수단체들의 편향적인 주장과는 달리 사실적인 성교육이 ‘조기 성애화’ 같은 부작용을 낳기는커녕 정반대 결과를 불러온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2018년 개정판을 펴낸 유네스코의 <국제 성교육 가이드>는 세계의 5~12세 어린이들이 보편적으로 ‘성 및 재생산과 관련된 신체 부위 묘사’, ‘질 속에 사정하는 성관계로 임신 가능하다는 인식’, ‘신체 접촉을 통해 쾌감을 느끼는 방식 설명’, ‘성에 대한 호기심과 의문은 자연스러운 반응’,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하는 효과적 방법’ 등을 교육받아야 한다고 제시한다. 또한 이러한 성교육을 거치면 성적 책임감도 높아져 오히려 성행위를 시작하는 연령대는 올라가고 성관계 빈도와 성 파트너 수, 위험한 행동 양상은 모두 감소하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밝혔다.

그래서 성에 대해 더 솔직하게 반응하는 어린이의 눈으로 볼 때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 일들을 어른들이 과도하게 통제하는 국내의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는 학부모들의 목소리도 높다. <아기는>은 덴마크에서 출간된 이듬해인 1972년 덴마크 문화부 아동도서상을 수상했고,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도 스웨덴 출신의 작가가 한 해 최고의 아동문학작품에 주는 작가상인 엘사 베스코브상을 수상하며 인정받았다. 하지만 <아기는>은 국내에선 2017년이 돼서야 출간됐다. 논란이 일기 전부터 현재 5세·6세인 두 자녀에게 <아기는>을 읽혔다는 직장인 김여진씨(35)는 “이 책이 왜 문제가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당혹스러웠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기 안 낳는다고 저출산 문제를 들먹이는 사회에서 정작 아기 낳는 교육만 조기교육을 못 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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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9051803001&code=940100#csidx3b91b0ba0afa28c8b055ea957de6b8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