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그 해 여름처럼…벼랑 끝에 선 북한의 ‘주체 경제’

Shawn Chase 2020. 8. 27. 01:34

[중앙일보] 입력 2020.08.27 00:39

 

김정은의 ‘정면돌파’ 전략은 왜 좌초했나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예정된 파국이었지만 너무 일찍 와버렸다. 자력갱생과 정면돌파를 내건 구호판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붉은 깃발은 내려졌다. 진격의 나팔 소리 대신 정책 노선과 궤도 수정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김정은식 경제전략의 실패를 자인하는 현장이 돼버린 노동당 7기 6차 전원회의 얘기다. 지난 19일 평양의 노동당 본부청사에서 열린 회의 결정서는 참담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계획되었던 국가 경제의 장성 목표들이 심히 미진되고 인민생활이 뚜렷하게 향상되지 못하는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핵심이다.
 

“경제 안풀려 답답” 토로한 김일성
손자인 김정은도 “경제전략 실패”
민생 우선 챙기겠다 약속 했지만
대북 제재와 코로나로 파산 위기

오는 10월 노동당 창건 75주년을 ‘승리자의 대축전’으로 만들자며 선전 선동에 박차를 가하던 게 불과 며칠 전인데 급작스레 분위기가 바뀌었다. 북한으로선 무엇보다 ‘수령 무오류’의 원칙에 치명타를 입은 게 뼈아플 수밖에 없다. 당 간부와 경제관료들이 너도나도 나서 ‘내 탓이오’를 연발하고 있지만, 김정은의 리더십에 금이 갔다. 내년 1월 노동당 8차 대회를 기약하자며 다시 고삐를 죌 기세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2020년 8월 노동당 전원회의는 1994년 여름의 데자뷔다. 26년 전인 그해 7월 국가주석 김일성은 경제일꾼 회의를 소집했다. 도무지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는 북한 경제 전반의 문제점을 짚고 간부들에게 직접 자극을 가하려는 자리였다. 당시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모순에다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까지 겹쳐, 그렇지 않아도 빈사상태였던 경제가 파산지경이었다. 개혁·개방을 택한 중국은 아직 북한에게 효율적인 원조나 구호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다. 1993년 12월 열린 당 6기 21차 전원회의에서는 제3차 7개년 계획 실패를 스스로 인정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다.
 
열악했던 당시 상황은 김일성 사망 이틀 전인 1994년 7월 6일 소집된 경제부문책임일꾼협의회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북한에서 ‘일꾼’은 해당 분야 간부를 의미한다. 경제 분야를 책임진 노동당과 내각의 고위 관료들이 참여한 일종의 대책회의라 할 수 있다.
 
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가슴이 왜 이리 답답한가. 경제가 안 풀려 요즘은 끊었던 담배까지 다시 피우게 됐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경제 각 부문이 제대로 되는 게 없다”고 말한 뒤 부총리와 장관급 간부들을 하나씩 일으켜 세워 질책했다. 그는 “동무들! 농업·경공업·무역 제일주의는 당의 결정사항 아닌가. 화학비료는 남흥화학·흥남화학을 생산 정상화하도록 만들라우”라며 다그쳤다. 또 참석 간부들에게 “경제가 엉망인데 동무들은 회의에서 아무런 문제 제시나 답변을 못 하고 있다”라고 호통을 쳤다. 김일성은 끝부분에서 “이틀 뒤 다시 회의를 소집하겠으니 부문별로 대책을 세워 보고하라”고 지시했지만, 심근경색으로 숨지면서 회의는 다시 열리지 못했다.
  
경제 발목잡는 화학공업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5월 1일 순천인비료공장 준공식을 마친 뒤 장길룡 화학공업상으로부터 생산 공정을 브리핑 받고 있다. 장길룡은 8월 21일자 노동신문에 ’화학공업 부문이 제구실을 못한 건 화학 공업성 일꾼들이 전략적 안목과 사업성이 없이 일했기 때문“이란 반성문을 실었다. [조선중앙TV 캡처]

김일성은 당시 화학공업부장 김환을 집중적으로 다그쳤다. 비료 생산의 정상화가 다급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화학공업 부문이 화근이었다. 경고음은 일찌감치 울렸다. 지난 6월 초 김정은이 주재한 노동당 정치국 회의의 주요 의제 중 맨 앞자리를 차지한 게 화학공업의 발전 문제였다. 이후 잇달아 열린 노동당과 정무국의 주요 회의에는 화학공업이 약방에 감초처럼 등장한다. 코로나19 대책이나 홍수 피해 복구 등도 주목받는 이슈였지만 김정은의 신경은 화학공업에 곤두서 있었다. 지난 4월 하순 건강 이상설로 장기 공백 상태에 빠졌다가 복귀한 그가 첫 공개활동을 시작한 자리가 순천인비료공장 준공식이었다는 점만 봐도 화학공업에 김정은이 얼마나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난파 위기에 처한 북한 경제의 심각성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무엇보다 김정은이 야심 차게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줄줄이 중단 상태에 빠지거나 차질을 빚고 있다. 강원도 원산의 갈마 해안관광지구 건설은 지난해 10월 노동당 창건 기념일에 맞춰 완공될 예정이었지만 지난 4월 김일성 생일로 늦춰졌다. 하지만 이마저 맞추지 못했고 더는 북한 매체에서 언급이 없다. 대북제재 상황에서 원산에 수십 개 동에 이르는 대규모 해양리조트와 관련 시설을 짓는다는 게 무리수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3월 직접 기공식에 참석해 첫 삽을 뜨기도 한 평양 종합병원 건설도 김정은이 당초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5주까지 끝내라는 지시를 내린 건설사업이다. 그렇지만 요즘 들어 슬그머니 내년 1월 8차 당 대회에 맞추려는 분위기다.
 
연초까지만 해도 북한은 기세등등했다. 미국이 비핵화만 요구하며 대북제재를 해제하지 않는다고 비난한 김정은 위원장은 정면돌파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곧이어 밀어닥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의 충격파는 컸다. 체제의 명운이 걸린 방역을 위해 외부로 통하는 문을 닫아걸면서 경제는 엉망이 됐다. 산소호흡기 역할을 해온 장마당 경제도 북·중 접경의 밀무역까지 사실상 전면중단되는 상황에 빠졌다. 중국 해관통계에 잡힌 북·중 간 공식 교역은 대북제재와 코로나 여파로 95% 감소했다고 한다. 그나마 사정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평양 거주 주민들의 생활 문제가 열악해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지자 김정은이 직접 노동당 회의 의제로 챙기는 일도 나타났다.
  
통일부와 국정원 엇박자
 
이런 심상치 않은 북한 내부의 상황 변화에 우리 정부 당국이 얼마나 기민하게 움직이며 방책을 마련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촉수 역할을 해야 할 국가정보기관은 엉뚱하게 ‘위임통치’ 카드는 꺼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정치 9단으로 불린 박지원 국정원장은 국회 정보위 보고 자리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게 권한 일부를 위임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북한 관영 매체가 김여정의 최근 담화나 입장 발표 등에 ‘위임에 의하여’라는 표현을 쓴 대목에 지나치게 몰입하다 보니 ‘위임통치’라는 말이 불러올 파장을 생각하지 못했다. 정보위원들의 입을 통해 김정은 권력의 이상 징후나 건강·후계 문제로까지 번지자 뒤늦게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됐다.
 
김정은과 북한 지도부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권력 구도를 건드리는 자극적인 언급이 문재인 정부의 국정원에서 나왔다는 점은 불쾌할 수 있다. 북한이 당장 반응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향후 남북관계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공산이 크다. 정작 국민이 궁금해하는 북한 내 코로나 창궐 상황이나 김정은의 건강 문제 등에 대해서는 국정원은 입을 다물고 있다.
 
대북 주무부처를 자임해온 통일부는 남북관계의 현실과 청와대의 주문 사이에서 설 곳을 아직 찾지 못한 분위기다. 지난달 말 새로 부임한 이인영 장관이 물물교환 형태의 교역으로 남북 간 물꼬를 트겠다고 밝히자 통일부는 곧바로 남한의 설탕과 북한의 술을 맞바꾸는 사업이 성사될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민간단체인 남북경총통일농사협동조합이 북한 개성고려인삼무역회사와 1억5000만원 상당의 북한 주류 35종을 설탕 167t과 물물교환하는 프로젝트다. 언론에도 이런 사실이 공개되면서 기대치를 높였다.
 
사달은 엉뚱한 곳에서 났다. 북측 사업자가 유엔의 대북제재 대상인 노동당 39호실 산하 기관이란 점이 국정원에 의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업 승인부처가 제재 저촉 여부를 제대로 확인조차 않은 데다, 국정원과의 엇박자까지 나면서 이 장관은 출발부터 미덥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이 와중에 일부 관변 성향 전문가 그룹의 행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들은 빨간불이 켜진 지 오래된 북한 경제에 대해 “내구력이 만만치 않다”는 식의 장밋빛 분석만 내놓곤 했다. 김정은 시대 들어 평양에 건설된 고층 주상복합 시설이나 뉴타운 형태의 거리, 화려한 네온으로 장식된 평양의 야경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에 대한 대응책으로 국제사회가 내놓은 대북제재에 대해선 ‘무용론’을 주장한다. 중국이란 뒷문이 있어 제재의 효과가 미미할 것이란 얘기다. 북한의 장마당 경제가 작동하기 때문에 제재에도 끄떡없다는 논리까지 쏟아냈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기관의 박사는 “북한이 경제실패를 자인하기 며칠 전에도 북한식 자력갱생 경제를 두둔하는 듯한 자료집을 내돌린 중견 연구자 그룹도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집권 10년 맞는 내년 1월 당대회
 
김정은 위원장은 2012년 4월  첫 공개 연설에서 “다시는 인민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핵과 미사일 도발로 점철된 그의 집권 초반 호전적 행보는 대북제재를 자초했다. 그러면서도 2016년 5월 개최한 노동당 7차 대회에선 ‘경제’라는 단어만 142차례 쓸 정도로 민생을 챙기는 모습을 부각하려 했다. 그렇지만 결국 4년 3개월 만에 “인민생활을 뚜렷하게 향상시키지 못했다”고 인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북한이 노동당 8차 대회 개최 시점으로 제시한 2021년 1월은 김정은 집권 10주년에 돌입하는 때다. 엘리트 간부와 주민들에게 뭔가 새로운 비전과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상황이다. 오는 10월 당 창건 75주년에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들기보다는 시간을 벌어 내년을 기약하겠다는 의미도 있다. 11월 미 대선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포석도 깔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불과 5개월 뒤 북한이 처한 환경이 달라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제재와 코로나19의 후폭풍은 더욱 거세게 북한 경제를 뒤흔들 공산이 크다. 그때가 되면 김정은과 북한의 지도부는 대남·대미 문제나 경제 분야에서 좋은 기회와 호시절이 지나갔음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출처: 중앙일보] 그 해 여름처럼…벼랑 끝에 선 북한의 ‘주체 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