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입력 2020-07-25 03:00수정 2020-07-25 03:00
모진 비난과 정쟁에 피해자 ‘2차 피해’
여성인권 후진국 일본보다 뭐가 나은가
한국 여성인권 하락은 기성세대 책임
정치가 도덕 지배하지 않는 사회 만들어야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일본에 20년을 사는 동안 좋은 모습도 보고 나쁜 모습도 보면서 일본을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했다. 처음 일본의 한 대학에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은행에 신용카드를 신청하러 갔다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담당 직원에게서 카드 사용액을 미납한 채 한국으로 돌아가면 자기네가 곤란해진다는 기분 나쁜 말을 들었다. 며칠 뒤 나보다 6개월 먼저 부임한 미국인 교수가 같은 직원을 통해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미국인 교수는 그 직원이 매우 친절했다면서 그를 만나 상담해 볼 것을 권했다. 나는 그 길로 은행으로 달려가 따졌다. 은행 직원은 외국인에게 신용카드를 발부한 적이 없다고 발뺌하다가 내가 그 미국인 교수와 같이 오겠다고 하자 그때서야 상사와 의논해 보겠다고 했고 몇 주 후 신용카드가 발급되었다.
식당 종업원 중에 외국인에게만 반말을 쓰는 이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되고는 나도 똑같이 반말로 응대했다. 손님이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하대하기 시작하는 사람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일본의 그런 모습을 혐오했다. 그러나 얼마 뒤 내가 일본에서 겪은 차별을 한국에 있는 동남아시아인들이 똑같이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한국인들은 적어도 여성의 지위에 있어서는 한국이 일본보다 낫다고 믿는다. 일본에서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고발한 여성이 오히려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있을 때마다 한국 언론은 일본 사회의 후진성과 야만성을 질타했다. 그러나 최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고소한 여성을 끈질기고도 모질게 비난하는 행태를 보며 여성의 인권이란 면에서 과연 한국이 일본보다 나은 사회인가 의문이 든다.
박 전 시장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정치권에서 쏟아진 수많은 말들 중 장혜영 류호정 두 의원의 말만큼 조심스러우면서도 진실한 말을 보지 못했다. 장 의원은 “차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애도할 수 없다”며 철저한 진상 파악과 재발 방지 대책을 호소했다. 류 의원은 피해자의 아픔에 함께하기 위해 고인을 조문하지 않겠다면서도 “모든 죽음은 애석하고 슬프며, 고인께서 얼마나 훌륭히 살아오셨는지 다시금 확인한다”는 말로 고인에 대한 예의를 지켰다. 그들은 고인의 마지막 행로를 따라 걸으며 키득대지 않았고, 슬픔에 잠긴 어린 상주에게 이미 무혐의 처분이 내려진 병역 의혹을 들이밀며 조롱하지 않았다. ‘채홍사’같이 피해자에게도 상처가 될 수 있는 자극적인 단어를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사려 깊고 절제된 메시지 위로 퍼부어지는 저열하기 그지없는 비난을 보며 나는 내가 정말 2020년의 대한민국을 보고 있는 것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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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가 출신인 여성 정치인들조차 ‘정치’ 때문에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을 때 그 두 사람만은 정치와 무관하게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정의당이 조문을 정쟁화한다”고 비난했을 때 나는 그 비난의 근거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다른 누구는 노회찬 의원이 살아 계셨으면 조문 가지 않겠다는 의원들에게 뭐라고 했을지를 물었다. 일의 시시비비를 왜 가해자와 같은 연령대, 같은 성별의 사람에게 물어야 하는가? 오히려 피해자와 같은 연령, 같은 성별의 사람에게 먼저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 세대는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희롱이 범죄라는 것도 자녀가 독립할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들을 응원하고 지지함으로써 지난날의 잘못을 씻어야 하건만 오히려 정치적 이유로 그들을 핍박한다. 한국의 여성 인권이 일본보다 나을 것이 없는 것은 그래서 우리 세대의 책임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편적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외교적으로 밀리지만 않는다면 사죄할 필요가 없는 ‘국제 정치’의 문제로 선동하는 일본 극우를 보며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그들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기를 빌었다. 한국의 청년들 역시 여야를 떠나 정치로 도덕을 지배하려는 선동에 넘어가지 말고 여성과 남성이 모두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같이 만들어 나가기를 빈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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