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경영

한 편의 영화 같은 BMW의 성장 스토리

Shawn Chase 2020. 7. 10. 23:12

 

다음자동차 입력 2020.07.10 14:47 수정 2020.07.10 14:49

 

BMW 브랜드 히스토리(4)

BMW 위기를 통해 기회를 모색하다

통상 신차를 개발할 때 4~5년의 시간과 수천억 원의 비용이 필요하다. ①디자인 ②엔지니어링 ③마케팅 등 크게 3박자가 맞아야 비로소 결실을 맺는다. 이 과정에서 빛을 못 본 차도 수두룩하다. 또한 개발과정에서 초기 콘셉트가 희석돼 전혀 다른 차종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부서 간 기 싸움도 만만치 않다. 반면 BMW는 일관된 철학으로 신차를 빚는다.

BMW는 설립 이후부터 항상 위기 속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항공기 엔진, 모터사이클 등 남다른 엔지니어링으로 기틀 다진 회사답게, 업계를 선도하는 기술력으로 전쟁과 석유파동 등의 숱한 위기를 극복했다. 그래서 BMW 내부엔 늘 ‘위기의식’과 ‘긴장감’이 짙게 깔렸다. 특히 1970년대 들어 걸출한 선장의 지휘 아래 세계적인 완성차 업체로 성큼 다가갔다.

에버하르트 폰 쿠엔하임

1970년 BMW CEO로 취임한 에버하르트 폰 쿠엔하임(Eberhard Von Kuenheim)이 주인공이다. 그의 회사 운영방식은 ‘얼음채찍’으로 유명하다. 그의 인생 내막을 살펴보면 블록버스터를 방불케 한다. 1928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10대 때 아버지를 잃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기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7세의 이른 나이로 독일 해군에 입대했다.

복무 중엔 어머니가 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쿠엔하임은 무너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 보쉬에 들어가 냉장고와 자동차 부품을 만들며 일을 배웠다. 업무능력이 좋아 회사에서 장학금 지원받고 대학에서 공학학위를 따냈다. 이 무렵 콴트 가문의 눈에 띄었다. 하랄트 콴트가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에 기술책임 임원으로 스카웃했다.

역랑을 키워가던 쿠엔하임에게 더 큰 기회가 찾아왔다. 하랄트가 죽자 형 헤르베르트는 쿠엔하임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하랄트의 사업체 중 하나를 운영하라고 지시했다. 방만한 운영으로 곪은 데가 많은 업체였다. 쿠엔하임이 단기간에 ‘건실한 회사’로 바꿔놓자 헤르베르트는 그를 BMW의 차기 CEO감으로 점찍는다. 1970년 공식 임명했다.

1975 BMW 3시리즈

그는 ‘스포츠맨의 자동차’란 철학 아래 3‧5‧7 등 새로운 라인업을 선보이며 들쭉날쭉한 BMW 라인업을 간결하게 개편했다. 여기엔 밥 루츠(세일즈&마케팅 총괄), 폰 팔켄하우젠(치프 엔지니어), 폴 브라크(수석 디자이너) 등 부하 3인방의 긴밀한 협업도 한 몫 한다. 그 결과 1970년 17억 달러였던 글로벌 판매수익은 10년 사이 40억 달러로 ‘폭풍성장’했다.

1990년대 경제위기, SUV로 넘어서다

탄탄대로 같은 BMW 앞에 또 한 차례 위기가 찾아왔다. 1990년 8월, 걸프전이 터지며 기름 값이 폭등했고, 미국은 경제 불황으로 휘청거렸다. 또한, 1980년대 후반 일본 3사 럭셔리 브랜드가 공습했다. BMW를 포함한 프리미엄 제조사의 간담을 서늘케 한 주역이다. 자동차 업계는 인수합병 통해 규모를 키우고, 원가를 줄이기 위해 움직였다.

이때 BMW가 노린 ‘먹잇감’은 미니, 재규어, 랜드로버 등을 보유한 영국의 로버 그룹이었다. 그러나 로버 그룹 인수는 BMW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플랫폼 공유를 통해 원가 낮출 차종도 마땅히 없거니와, 영국정부의 규제 강화로 외국기업인 BMW가 로버를 입맛대로 쥐고 흔들 수 없었다. 더욱이 렉서스가 미국인의 마음을 훔치며 판매수익이 쭉쭉 떨어졌다.

BMW는 1990년대 초반, 5시리즈 플랫폼 바탕의 SUV를 만들어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개발자들의 원칙은 딱 한 가지였다. ‘BMW 냄새가 나는 SUV가 아닌, SUV 냄새가 나는 BMW’를 만들자고. 트럭 기반의 SUV가 판을 치는 북미에서 색다른 제품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가령 개발과정에서 엔진 위치를 몇 ㎝ 낮추고, 5시리즈의 독립식 서스펜션을 물렸다.

1997 벤츠 M 클래스

그러나 SUV 제작경험이 전무한 제조사가 ‘뚝딱’하고 만들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 1994년 랜드로버를 품에 안으며 X5의 완성도 높이는 계기로 삼았다. 특히 상시 사륜구동 시스템은 랜드로버의 기술로 한층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러나 로버 그룹 인수로 SUV 프로젝트가 뒤로 밀렸다. 결국 메르세데스-벤츠 M클래스보다 2년 늦은 1999년 X5를 선보였다.

1999 BMW X5

X5는 뼛속부터 달랐다. M클래스는 본래 G바겐 후속으로 기획한 차로, 모양은 승용인데 속은 보디 온 프레임 방식의 정통 트럭이었다. 반면 BMW는 SUV나 트럭 대신 ‘SAV(스포트 액티비티 비이클)’란 새로운 용어를 앞세워 틈새를 노렸다. 초기엔 품질문제로 몸살을 앓았지만, 2003년 컨설팅회사 스트래티직 비전이 뽑은 ‘최고의 럭셔리 SUV’에 올랐다.

클라우스 루테의 퇴장, 크리스 뱅글의 혁신

클라우스 루테

1976년, 폴 브라크의 후임으로 아우디 출신 클라우스 루테가 수석 디자이너로 들어왔다. 그는 보수적이던 BMW의 표정에 활기 넣은 주역이다. 2~3세대 3시리즈, 3세대 5시리즈, 8시리즈 등을 빚으며 1990년까지 BMW 디자인을 이끌었다. 직선 위주의 반듯한 차체, 낮고 평평히 다진 보닛, 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비율은 지금도 올드카 마니아를 열광케 한다.

그가 커리어 정점을 찍던 1990년 4월, 독일 일간지 1면엔 일제히 이런 기사가 실렸다. ‘BMW 수석 디자이너, 아들 살해혐의로 체포’. 오랜 시간 불화를 겪은 마약 중독자 아들과 어느 날 말다툼을 벌였고, 끝내 아들을 칼로 찔러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다. BMW는 최고 변호인단을 꾸려 루테를 전폭 지원했고, 결국 33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는 데 그쳤다.

BMW는 루테가 복역하는 동안 실내 디자이너인 한스 브라운에게 지휘를 맡기고,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공석으로 남겼다. 루테가 출소하자마자 BMW는 복직을 제안했다. 루테의 뛰어난 역량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제안을 뿌리쳤고 대신 디자인 고문 자격으로 1990년대 말까지 뒤에서 은밀히 활동했다. BMW는 발 빠르게 후임자 물색에 나섰다.

크리스 뱅글

당시 BMW R&D 총괄 볼프강 라이츨레는 ‘세계적인 비전’ 가진 인물을 원했다. 때마침 전 수석 디자이너 폴 브라크가 “아주 괜찮은 젊은 디자이너가 있다”고 귀띔한다. 오펠을 거쳐 피아트에서 혁신 이끈 크리스 뱅글이다. 성격 급한 라이츨레는 그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이 만남에서 뱅글은 제대로 눈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개혁의 칼자루를 넘겨받았다.

크리스 뱅글이 이끈 21세기의 BMW

뱅글이 합류한 뒤 3‧5‧7시리즈, X5 등 모든 라인업을 수술대에 올렸다. 라이츨레는 금속판의 반지름까지 하나하나 간섭할 정도로 디자인 부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좋게 말하면 ‘열정남’이고, 나쁘게 말하면 짜증나는 상사였다. 그는 “뱅글은 내가 찾을 수 있는 최고의 인재다. 디자인팀에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동기를 유발했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2001 BMW 7시리즈

2001년, 드디어 첫 번째 결과물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올랐다. 뉴 7시리즈다. 기존의 네모반듯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괴상하게 생긴 7시리즈가 등장했다. 관객은 충격에 빠졌고 각종 비난 기사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뱅글은 신형 7시리즈를 지겹도록 변호하기 바빴다. BMW는 전 세계 자동차 기자 800명을 뮌헨으로 불러 설명회를 가질 정도였다.

BMW 재무담당 이사도 뱅글을 나무랐다. 센터콘솔 등 사소한 부위까지 비싼 재료에 집착한다고. 그러자 뱅글은 케루빔(아기천사)이 새겨진 뮌헨의 고딕풍 성당 사진을 들이밀며 “성당에 케루빔을 새기는 데 많은 비용이 듭니다. 하지만 케루빔이 없는 성당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라고 되받아쳤다. 작은 부위까지 세심하게 설계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2001 BMW 7시리즈

7시리즈는 뱅글의 작품, 그 이상이었다. 3‧5‧7로 이어지는 틀에 박힌 표정이 싫었다. 캘리포니아의 디자인 회사 ‘디자인웍스’를 인수했고, 사내 5~6개 팀을 디자인 과정에서 경합을 붙였다. 내부경쟁을 펼쳐 더욱 창의적인 제품을 내놓고자 노력했다. 현재 BMW 그룹 디자인 총괄인 아드리안 반 호이동크(당시 디자인웍스 소속)의 첫 스케치를 토대로 발전시켰다.

뱅글은 “우리는 실용적인 기계로서 자동차를 만드는 게 아니다. 우리는 고품질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예술작품’으로서 자동차를 만든다”고 말했다. 즉, 뱅글은 기존 카 디자이너의 딱딱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예술적으로 사유하는 자동차를 빚었다. 이후 로드스터 Z4, 일명 ‘독수리 눈매’ 품은 5시리즈 등을 선보이며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로 우뚝 선다.

BMW의 혁신은 ‘현재 진행형’

2006년, 헬무트 판케가 정년퇴임하고, 노르베르트 라이트호퍼가 신임 CEO 자리에 올랐다. 전 BMW 미국 생산부문 사장으로, 1987년 입사해 생산과 개발 등의 부서를 두루 거친 인물이다. 그의 지휘 아래 BMW는 전동화 시대를 맞아 새로운 혁신에 나섰다. 2013년 선보인 전기차 i3가 주인공이다. 닛산 리프 이후 프리미엄 브랜드가 선보인 첫 전기차다.

BMW i3

이 차는 ‘세계최초’로 가득하다. 양산 전기차 최초로, 머리카락보다 10배 얇고 일반 철보다 50% 가벼운 CFRP(탄소섬유강화플라스틱)로 골격을 짰다. 그 결과 i3는 공차중량 1,195㎏을 달성하며 ‘전기차는 무겁다’는 편견을 지웠다. 또한, 차체는 미국 모세 레이크에 자리한 수력발전소에서 100% 물의 힘으로 만들었다. 과연 진정한 ‘친환경차’라고 부를 만하다.

더욱이 실내를 감싼 직물은 페트병을 재활용해 만든 친환경 소재로 둘렀다. 대시보드 패널은 유칼립투스 나무, 통상 석유로 만드는 플라스틱 트림은 케나프(Kenaf, 양마) 소재로 대체했다. 차체 밑바닥엔 삼성 SDI와 함께 개발한 배터리팩을 깔았다. 단 1분 충전으로 4㎞를 달릴 수 있으며 50㎾ 급속충전기를 쓰면 약 40분 만에 최대 80%까지 충전할 수 있다.

BMW 배터리 스토리지 팜

‘지속가능한 성장’. BMW 전동화 전략의 핵심 키워드다. i3로 꿈꾼 진정한 친환경을 발전시키고 있다. 가령 2017년 독일 라이프치히 공장에 중고 배터리 700개 엮은 ‘배터리 스토리지 팜’을 세웠다. 라이프치히 공장은 풍력에너지를 쓰는데, 바람 안 부는 날엔 전기 에너지가 너무 적고, 바람이 많이 불면 에너지가 넘친다. 한 마디로 ‘들쭉날쭉’하다.

이를 실제 i3에 들어갔던 폐배터리로 관리한다. 전기 에너지가 풍족할 때 배터리에 모아놓고 부족한 날에 푼다. 우리나라 제주도에도 비슷한 시설이 있다. BMW 코리아가 세운 ‘e-고팡’이다. 풍력발전소에서 에너지를 받아 10개의 폐배터리에 에너지를 저장해둔다. 이를 전기차 충전소로 쓴다. 폐차장 ‘고철덩어리’ 신세였던 배터리가 새 생명을 얻은 셈이다.

BMW 비전 i넥스트

 

 

모두가 이젠 ‘전기차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BMW는 단순히 유행 쫓아 신차를 기획하지 않는다. 2016년, BMW 창립 100주년 맞아 선보인 BMW 비전 넥스트 100 콘셉트가 좋은 예다. 과거 100주년을 기리면서 다가올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콘셉트 카로, 차체와 통합한 휠, 100% 자율주행 시스템을 통해 BMW가 꿈꾸는 미래를 가늠할 수 있다.

2023년까진 25종의 전동화 모델을 선보여 i3와 i8의 틈바구니를 빼곡히 채울 계획이다. 그러나 파워트레인 변화는 BMW의 오랜 가치를 희석시키지 않는다. 지난 100년의 역사가 말하듯, BMW는 미래에도 ‘스포츠맨의 자동차’란 타이틀을 놓지 않을 계획이다. 창립 이후 남다른 엔지니어링으로 굳건히 성장한 BMW. 과거보더 미래를 더 기대하는 이유다.

글/강준기(로드테스트 기자)

사진/BMW

 

 

'듣보잡' BMW가 미국에서 성공한 비결은?

다음자동차 입력 2020.07.02 13:53

 

한 편의 영화 같은 BMW의 성장 스토리(3)

자동차계에 ‘골목식당’ 같은 프로그램이 있다면, BMW는 후보 1순위였다.

1950년대 BMW는 속된말로 ‘삽질’의 연속이었다. 전후 경기불황을 고민하지 않은 최고급 세단 501, 벤츠 300SL 잡으려다 회사를 잡을 뻔한 스포츠카 507 등이 대표적이다. 300㏄도 채 안 되는 모터사이클 엔진 얹고 등장한 삼륜차 이세타는 여느 BMW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가격도 그렇고. 최고급 안심 스테이크와 컵 떡볶이를 같이 파는 꼴이었다.

BMW 507

BMW는 항공기 엔진과 모터사이클 제조에 뿌리를 둔 엔지니어링 회사다. 그러나 장사꾼은 아니었다. 당대 동향파악은커녕 소비자가 어떤 차를 원하는 지도 몰랐으니까. 우글거리는 공대생들의 집약체 같은 BMW가 변화를 꾀한 건 콴트 가문이 등장하면서다. 그들은 경쟁력 있는 가격의 중간급 차 개발을 지시했고, 그 결과 BMW ‘뉴 클래스’가 태어났다.

BMW 1500, 2000CS, 2002 등이 ‘뉴 클래스’의 일원이다. 작고 다부진 차체와 칼날처럼 예리한 핸들링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했다. <카앤드라이버> 등 미국 자동차 전문지는 BMW의 주행성능을 ‘경이롭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러나 세계 최대 미국 시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히피들의 마음은 뺏었지만, 캐딜락 좋아하는 진성 미국인은 콧방귀도 안 뀌었다.

BMW 뉴 클래스 1800

1970년대 초 설문조사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BMW를 영국 자동차 회사쯤으로 생각했다. 1년에 잘 해야 1만 대 정도 파는 유럽의 ‘듣보잡’ 업체로 여겼다. 한 광고회사는 BMW 2002를 골프클럽 주차장에 세우고 회원들의 생각을 물었다. 체크무늬 바지와 꽈배기 스웨터 입은 그들은 벤츠나 캐딜락보다 작은 차가 가격은 비슷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고급차’는 넉넉한 차체 크기와 가죽으로 치장한 실내, 8기통 대배기량 엔진이 필수적이었다. BMW는 남다른 운전 재미와 엔진 성능으로 당당히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좁고 불편한 소형차에 불과했다. 심지어 1970년대 마르크 화폐가치가 최악으로 떨어져 찻값도 비쌌다. 뷰익이나 링컨 등 정통 미제 세단 좋아하는 미국인이 BMW에 관심 가질 리 없었다.

 

‘카 가이’ 밥 루츠를 마케팅 책임자로 고용하다

BMW는 고급차, 고품격의 정의를 다시 세워야했다. 마케팅 전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를 위해 GM 제품개발 부서에 있던 밥 루츠를 데려왔다. 그는 자칭 ‘카 가이(Car Guy)’다. 해병 장교 출신으로 전투기와 머슬카, 시가를 좋아하는 마초 사나이다. 1963년 자동차 업계에 발을 디뎌 훗날 포드, 크라이슬러, GM 등 빅3의 리더 자리를 모두 거친 인물이다.

그는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야 할 자동차 회사가 빈 카운터스(재무전문가)에 휘둘려 비용절감과 숫자놀이에 빠지다 보면 반드시 몰락한다”며 GM의 제품개발 부서를 개혁한 주역이다. ‘스포츠맨의 자동차’를 슬로건으로 앞세운 BMW가 딱 원하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밥 루츠는 BMW의 미국 내 성장을 위해 뉴욕의 광고대행사들에게 사업제안 요청서를 보냈다.

밥 루츠

최종 후보에 3개 업체가 올랐다. 대통령 등 정치인의 선거용 광고를 제작해온 <벤튼&바울스>, 오랜 역사의 인물 광고회사인 <테드 베이츠>, 신생 업체인 <아미라티&퓨리스>다. 카 가이의 선택은 마지막이었다. 전통적인 광고 회사에 도전장 내민 <아미라티&퓨리스>의 ‘반항기’가 BMW와 닮은 구석이 있어서다. 특히 피아트 미국 광고로 성공한 바 있다.

당시 이 광고업체는 BMW의 핸들링이 그동안 작업했던 다른 차보다 월등하단 걸 느꼈다. 벤츠, 볼보, 피아트와 비교할 때 BMW는 마치 철로 위에서 움직이듯 달린다고. 광고 전략으로 ‘최고의 드라이빙 머신’을 택한 이유다. 다소 고전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이 한 줄의 문장으로 BMW의 정체성을 담백하게 내세웠다. 그리고 이 문구는 BMW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3‧5‧7, 창의적인 이름으로 새 판을 짜다

BMW는 ‘뉴 클래스’의 후속 타자로 코드네임 E12의 새로운 중형 세단을 기획하고 있었다. 이전보다 차체를 훌쩍 키우되, BMW 특유의 운동성능을 녹여 활로를 모색했다. 디자인은 카로체리아 베르토네의 수장이자 당대 자동차 디자인을 쥐고 흔든 마르첼로 간디니에게 맡겼다. 그는 람보르기니 미우라, 란치아 스트라토스 제로, 마세라티 기블리를 빚은 거장이다.

BMW 5시리즈

1972년, 드디어 결과물이 등장했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BMW 5시리즈다. 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듯한 자태, 네 개의 원형 헤드램프가 남다른 존재감을 뽐냈다. 특히 엔진에 따라 525i, 530i 등으로 나눴는데, 이때 당시 하나의 모델에 여러 종류의 엔진을 쓰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BMW는 5시리즈 출시를 계기로 이름 체계를 개편하고 나섰다.

BMW 5시리즈

마쓰다 북미법인 전 CEO 찰리 휴즈는 “BMW는 이상적인 숫자+문자 조합을 만든 회사다. BMW의 모델명은 소비자에게 프리미엄 브랜드를 연상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단순하면서 체계적인 모델 이름은 소비자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또한, 다양한 엔진과 컬러 조합으로 고객에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란 느낌을 줬다.

5시리즈는 다양한 의미에서 BMW의 ‘새 시대’를 연 주역이다. 더 이상 소수의 애호가를 위한 차가 아니었다. 넓은 객실과 트렁크, 실내 소재에 집중한 결과, 메르세데스나 캐딜락으로 골프 즐기는 미국인의 마음을 단숨에 돌렸다. 더욱이 짜릿한 운동성능은 세단의 전통적 가치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그 방점을 찍는 게 525i의 직렬 6기통 ‘실키식스’ 가솔린 엔진이다.

BMW 5시리즈

자동차 전문지 <로드앤트랙>은 “BMW의 신형 6기통 엔진은 ‘보석’이다. 6,200rpm까지 올라가면 포르쉐 911처럼 유쾌하게 그르렁거린다. 동급의 경쟁 차보다 빠르고 더 스포티하며 더 장시간 달릴 수 있다”고 전했다. 또한, <컨슈머가이드>는 “다이내믹한 성능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권한다. 꼼꼼한 장인 기술로 만들었고, 실용적이며 스포티하다”고 평가했다.

 

배기량 높은 엔진은 연비가 떨어진다? 편견 뒤엎은 BMW

그러나 탄탄대로 같은 5시리즈 앞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터졌다. 중동지역 6개 석유수출국은 원유고시가격을 17% 인상했다. 이른바 ‘오일쇼크’다. 배럴당 2달러59센트였던 중동산 기준원유 값이 1년 만에 11달러65센트로 4배나 껑충 뛰었다. 때문에 배기량 높고 기름 벌컥벌컥 마시는 차 대신 작고 연비가 좋은 차가 필요했다.

특히 BMW처럼 운동성능을 앞세운 브랜드에겐 치명타였다. 그러나 BMW는 정면승부를 택했다. 성능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까다로운 규제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가령, ECU를 통해 연소시간과 연료분사를 치밀하게 조정했다. 덕분에 BMW의 직렬 6기통 엔진은 경쟁 업체의 V6 엔진보다 연비가 뛰어났고, 심지어 4기통 엔진과 비슷한 효율로 업계를 놀라게 했다.

위기는 엔지니어링으로 극복하는 BMW의 역량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1960년대 BMW ‘뉴 클래스’의 일원인 2002의 후속 모델도 개발하고 있었다. 작고 다부진 차체를 바탕삼아 BMW 특유의 날카로운 핸들링을 녹이고, 연비 좋은 4기통 엔진을 얹어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1975년, 드디어 결과물이 등장했다. BMW의 월드 베스트셀러, 3시리즈다.

1975 BMW 3시리즈

“당신이 BMW를 운전합니다. BMW가 당신을 운전하는 건 아닙니다.” 당시 3시리즈의 광고 문구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자동차 업계가 휘청거릴 때, BMW는 ‘스포츠맨의 자동차’란 타이틀을 포기하지 않았다. 뒷바퀴 굴림(FR) 방식과 50:50의 무게배분으로 ‘BMW의 가치’를 계승하되, 뛰어난 연비까지 만족시키며 BMW의 중심 모델로 우뚝 섰다.

또한 BMW는 밥 루츠의 지휘 아래 1972년 ‘BMW 모터스포츠’를 세웠다. 그는 레이스 참가를 통해 BMW의 이미지를 더욱 탄탄히 다지고자 했다. 당시 BMW 모터스포츠 수석 엔지니어인 파울 로쉬는 3시리즈를 밑바탕 삼아 레이싱 버전을 만들었다. 독일과 북미에서 열리는 경주에 내보내 자동차 마니아를 열광케 했고, BMW 전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다음 회에 계속)

 

글/강준기(로드테스트 기자)

사진/BMW

 

 

BMW 틈새 노려 벤츠의 라이벌로 거듭나다

다음자동차 입력 2020.06.11 10:51

 

한 편의 영화 같은 BMW의 성장 스토리(2)

히틀러가 BMW에 원한 것은…

1936 BMW 328 로드스터

1936년 BMW는 328을 선보인 뒤 전성기를 맞았다. 각종 레이스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유럽에서 ‘BMW는 운동성능이 뛰어나다’란 평판을 얻었다. 비슷한 시기 내놓은 R35 모터사이클은 뛰어난 험로주행 성능으로 전장을 누볐다. 3년 동안 독일군이 1,500대 사갔다. BMW는 2만7,000여 명의 직원, 5,400만 마르크의 현금을 보유한 기업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1939년 히틀러 정부가 BMW 뮌헨 공장의 자동차 생산을 막았다. 폭스바겐, 다임러-벤츠 같은 자동차 업체 대신 항공기 엔진 제조사로 남길 바랐다. 때문에 BMW는 뮌헨 공장뿐 아니라 아이제나흐, 슈판다우, 알라키 공장에서 전쟁 물자를 만들었다. BMW가 만든 항공기 엔진은 공군 조종사들에게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1941년 BMW는 최초의 분사추진식 엔진, ‘109-003 제트엔진’을 개발했다. 그러나 이 엔진은 정부와 BMW 경영진 사이에 마찰을 빚었다. 당시 정부는 수랭식 엔진을 만들도록 지시했지만 BMW가 공랭식을 고집한 탓이다. 결국 포프는 ‘지시불이행’으로 회사에서 쫓겨났다. 표면적 이유는 이러하나 실은 포프가 모터사이클 제작을 포기하지 않은 결과다.

BMW는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교훈을 얻었다. 전쟁 후 자동차를 만들어야 독일을 재건할 수 있다고. 포프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 또한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회사에서 쫓겨난 신세. 덕분에 전후 전범재판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BMW는 전쟁의 여파로 엔진 실린더를 두들겨 냄비로 개조하는 업체로 전락했다. 뮌헨 공장은 포격으로 무너졌다.

BMW 501

1942년 포프의 뒤를 이어 BMW 기술감독 쿠르트 도나트가 키를 잡았다. 그는 모터사이클을 만들어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 1948년 법정관리의 위기를 맞은 BMW를 은행가 한스 칼 폰 만골트-레이볼트가 인수했다. BMW는 3년 뒤 501을 선보이며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그러나 가격이 비싸고 운동성능이 떨어져 기존 고객에게조차 외면 받았다.

 

물거품으로 끝난 ‘아메리칸 드림’

전후 독일 직장인의 평균 월급은 360마르크. 반면 BMW 501의 가격은 1만7,500마르크로, 일반인은 꿈도 못 꿀 고급차였다. 독일과 달리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폭풍’ 경제성장을 맛봤다. BMW는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미국엔 오스트리아 출신 자동차 딜러인 막스 호프만이 있었다. 미국 내 수입차 시장을 쥐고 흔든 주역이다.

BMW 501

그는 메르세데스-벤츠의 레이스카 300SL을 양산차로 만들라고 벤츠에 주문해 1,100대나 팔아치웠다. 이를 계기로 호프만의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자신의 요구사항을 제조사에 관철시키는 전무후무한 딜러였다. 그는 BMW에 특별한 제안을 했다. 300SL보다 저렴한 스포츠카를 만들라고. ‘라이벌’ 벤츠의 성공사례를 볼 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결과적으로 BMW 507은 호프만의 유일한 실패작이었다. BMW는 그의 입맛에 맞춰 거의 모든 부품을 새로 만들었다. 심지어 디자인 초안을 호프만이 퇴짜 놓자 수석 디자이너까지 바꿨다. 알루미늄 차체는 수작업으로 빚었고, 8기통 엔진도 새로 설계했다. 단가가 비쌀 수밖에 없었다. 507의 가격은 1만 달러 이상으로, 300SL보다 3,000달러 이상 비쌌다.

BMW 507

 

 

BMW 507

명백한 오판이었다. 507의 생산대수는 4년간 고작 252대. 설상가상으로 1955년 이집트의 수에즈운하 봉쇄로 기름 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BMW는 247㏄ 모터사이클 엔진 얹은 초소형차 이세타(영종도 BMW 드라이빙 센터에 있는 그 차다)를 선보여 활로를 모색했다. 그러나 최고급 세단과 저가의 이세타, 양극단의 라인업으로는 수익을 내기 힘들었다.

BMW 이세타

당시 BMW엔 중산층이 살 수 있는 적당한 차가 없었다. BMW 700이 태어난 배경이다. 700㏄ 모터사이클 엔진 얹은 차체 길이 3,540㎜의 소형 세단으로, 이탈리아 디자인 회사 미첼로티가 설계했다. BMW는 1965년까지 약 19만 대 700을 팔았지만, 파산위기를 뒤집을 순 없었다. 회사를 살리려면 다임러-벤츠의 인수합병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위기를 극복한 구세주, BMW 1500

BMW 이사회는 1959년 말 뮌헨에서 열린 회의에서 “회사를 다임러에 매각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BMW 주주 중 한 사람인 독일 출신 사업가 헤르베르트 콴트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콴트는 BMW의 가치를 호소하는 노동자들의 프리젠테이션에 감동했다. 결국 그는 3달간 거친 회의 끝에 BMW 주식 30%를 사들이며 개혁에 나섰다.

헤르베르트 콴트와 이복형제 하랄트 콴트는 BMW 엔지니어에게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신뢰할 수 있는 중간급 차를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사내에선 ‘패밀리카 프로젝트’라고 불렀다. 그 결과 2년 뒤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BMW 1500이 모습을 드러냈다. 4개의 도어 갖춘 컴팩트 세단으로, 오늘날 BMW 3시리즈의 초석이다.

BMW 1500

새로운 BMW의 등장에 미국이 반응했다. 자동차 전문지 <카앤드라이버>는 ‘이 차는 재빨리 회전하며 차체를 거의 움직이지 않고 경이로운 코너링을 한다’고 극찬했다. 1.5L 80마력 엔진은 4단 수동변속기, 가벼운 차체와 맞물려 경쾌한 가속을 이끌었다. 평평한 보닛과 낮은 벨트라인, 직선으로 다듬은 보디라인은 BMW의 독창적 실루엣으로 자리매김했다.

BMW 1500

BMW 수석 디자이너, 빌헬름 호프마이스터의 작품이다. 특히 C필러 안쪽에 각을 세운 형태는 오늘날까지도 ‘호프마이스터 킨크’란 이름으로 BMW 모든 라인업에 스며들었다. 차체 무게배분은 53.5:46.5로 맞추고, 앞 맥퍼슨 스트럿, 뒤 세미트레일링 암 서스펜션으로 남다른 핸들링을 뽐냈다. 레이서 출신 엔지니어 폰 팔켄하우젠이 설계한 결과였다.

BMW 1500

당시 팔켄하우젠은 새 엔진을 2,000㏄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1.5L 엔진을 만들되 배기량을 2L까지 쉽게 키울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그 결과 BMW 1800, 2000CS, 2002 등 후속타자들이 연타석 홈런을 때리며 부도위기의 BMW를 완벽히 살렸다. 항공기 엔진, 모터사이클 만들며 다져온 짜릿한 운동성능, 다부진 차체 등이 어우러진 결과다.

 

틈새시장 공략하는 마케팅 전략

BMW 성공의 이면엔 걸출한 마케터가 있었다. 1961년, 헤르베르트 콴트는 아우토 우니온에 있던 폴 하네만을 판매이사로 데려왔다. 훗날 ‘미스터 BMW’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마케팅과 브랜드 경영이 제품개발 못지않게 중요하다며 틈새전략을 강조했다. 사내 목소리보단 소비자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과거 328의 이미지를 최신 BMW에 녹이고자 했다.

데이비드 카일리가 쓴 에 따르면, 하네만은 벤츠와 BMW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성공한 사업가가 이웃에게 자신이 대단한 사람임을 보여주고 싶다면 벤츠를 탈 것이다. 그러나 생애에서 무언가를 성취했지만 자랑할 필요가 없다면 BMW를 구매할 것이다.” 하네만은 이 전략을 ‘꾸미지 않는 독점적 가치’로 설명했다.

BMW 1800

 

BMW 1800

그는 BMW 1500, 1800, 2002 등을 묶어 ‘BMW 뉴 클래스’라는 광고 슬로건을 만들었다. 클래스란 단어가 암시하듯 메르세데스-벤츠의 등짝을 겨눴다. 1960년대 중반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기점으로 등장한 히피들의 마음 훔친 비결이다. 부모에 반항하고 틀에 박힌 시스템을 증오하는 이들에게 메르세데스-벤츠나 캐딜락의 대안으로 BMW 만한 게 없었다.

BMW 2002

 

BMW 2002

하네만은 제품뿐 아니라 심리적 기회 또한 노렸다. 세계 최대시장인 미국에서 세단은 아주 넉넉한 차체와 배기량, 출렁이는 서스펜션을 갖추고 ‘유유자적’ 움직이는 존재였다. 반면 BMW는 작고, 매끈하며 스포티했다. 면도날 같은 코너링 성능과 항공기 엔진 제조사 출신다운 엔지니어링으로 ‘스포츠 세단’이란 장르를 젊은 소비자에 각인시켰다.

당시 젊은 세대 사이에서 BMW 오너는 ‘뭔가 잘 아는 사람’ 또는 ‘세련된 사람’처럼 보였다. 오늘날 벤츠 S-클래스 대신 테슬라 모델 S를 타는 사람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하네만은 “벤츠처럼 강하고 무겁게 만들면 제작이 쉽다. 그러나 우리는 탁월한 균형에 있어서라면 어떤 경쟁자도 이길 수 있다”며 소비자에게 신비로운 이미지를 심었다.

(다음 회에 계속)

 

글/강준기(로드테스트 기자)

 

 

BMW, 항공기 엔진 만들다 자동차에 뛰어든 사연

다음자동차 입력 2020.06.10 15:27

 

한 편의 영화 같은 BMW의 성장 스토리(1)

항공기 엔진 제조업체로 출발한 BMW

BMW는 독일어 ‘Bayerishe Motoren Werke’의 약자다. 독일 바이에른에 자리한 엔진 제작소란 뜻이다. 공식 창립일은 1916년 3월 7일. BMW 역사의 뒤안길을 찾아보면, 두 명의 엔지니어를 찾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츠 요세프 포프와 전자제품 회사 AEG의 사내 동기 막스 프리츠다. 1886년 태어난 포프는 체코에서 학업 마치고 귀국해 AEG 엔지니어로 일했다. 이후 엔진 생산 하청업체인 ‘라프 모터렌 베어케’에 감독관으로 갔다.

이때 포프는 열악한 회사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막스 프리츠를 데려왔다. 두 사내의 꿈은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경영난을 겪자 포프는 경영권을 인수하고 이듬해 사명을 ‘바이에리셰 모토렌 베어케’로 바꿨다. 오늘날 BMW의 시작이다. 1918년, 주식회사로 상장한 BMW는 항공기 엔진을 만들어 독일군에 납품하기 시작했다.

막스 프리츠는 1960년대까지 BMW 제품개발을 주도한 주역이다. 1917년, 그는 수냉식 직렬 6기통 타입 Ⅲa 엔진을 설계해 고물 비행기에 얹었는데, 1919년 승무원 8명을 태우고 3만1,826피트까지 올라 세계 고도기록을 세웠다. BMW 항공기의 평판을 높인 배경이다. 그러나 위기가 찾아왔다. 독일이 전쟁에서 졌다.

BMW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항공기 엔진 등 군에 조달하는 부품을 만들 수 없었다. 이때 포프의 동업자 카스티글리오니는 회사 가치가 떨어지기 전 크노르 브렘센 AG 최고경영자에게 2,800만 마르크의 BMW 주식을 팔았다. 2년 뒤 팔 때보다 싼값에 주식을 다시 사들이며 무너져가는 BMW를 되살렸다.

 

뛰어난 엔진 제조실력, 모터사이클로 확장하다

BMW의 엔진 제조기술은 남달랐다. BMW는 시장에서 평판이 좋았던 항공기 엔진을 바탕 삼아 모터사이클 엔진을 개발했다. 전쟁 이후 기차용 브레이크나 사무용 가구 등을 만들며 연명한 BMW에게 이륜차는 새 원동력이었다. 훗날 자동차 제조사로 거듭난 계기이기도 했다. 1921년, 드디어 첫 번째 결과물이 등장했다.

R1200 GS, R nine T 등 최신 BMW 모터사이클엔 2기통 ‘수평대향 엔진’이 들어간다. 실린더가 수평으로 누운 구조다. 마치 권투선수가 주먹을 뻗는 듯 움직여 ‘복서 엔진’이라고도 부른다. 프리츠는 1920년대 가장 위대한 엔진 중 하나로 손꼽는 ‘바이에른 클레인모터’를 개발해 영국 빅토리아에 납품했다. BMW 복서 엔진의 시작이다.

복서 엔진은 무게중심이 낮아 고속주행 능력이 탁월했다. 이때 BMW는 자사의 모터사이클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품는다. 우선 자전거를 만들어 가능성을 엿본 뒤 1923년, 프랑스 파리 모터쇼에 BMW 최초의 모터사이클 R32를 출품시켰다. BMW 역사가 얀 로르비에는 “R32로 인해 프리츠와 BMW는 모터사이클 예술이 선봉이 됐다”고 평가했다.

결과적으로 BMW의 모터사이클 도전은 자동차 제조사로 거듭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5년 BMW가 내놓은 이륜차는 9가지로, 판매수익이 1,500만 마르크에 달했다. 특히 1928년까지 각종 레이스에서 573번이나 우승컵을 들었다. 때문에 ‘BMW 엔지니어링은 탁월하다’는 이미지가 유럽 전역에 퍼졌다. 회사 수익은 3년간 무려 77%나 올라갔다.

BMW는 더 큰 꿈을 그리고 있었다. 항공기 생산 금지령이 풀리면서 모든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카스티글리오니는 자동차 제조사로 확장시키길 바랐다. 1928년 BMW는 독일 딕시(Dixi)사를 인수하며 2인승 스포츠카 오스틴 세븐을 라이선스 생산했다. 이름은 BMW 3/15로, 2,200마르크의 합리적 가격 덕분에 1931년까지 2만5,000여 대나 팔았다.

 

사실 BMW는 전기차 제조 회사였다?

여기까지가 흔히 알려진 BMW 히스토리다. 그러나 한 꺼풀 더 벗기면 한층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딕시는 1896년 독일 튀링겐 주에 자리한 아이제나흐 공장에서 ‘바르트부르크’란 이름으로 시작했다. 딕시는 자전거, 엔진을 만들었고, 1899년엔 전기차를 생산했다. 전기 모터를 품은 사륜마차다. 내연기관차보다 더 긴 역사를 지닌 셈이다.

1903년, 창업주 에어하르트는 경영에서 손을 떼고 엔지니어 윌리 섹에게 바통을 넘겼다. 이듬해 ‘딕시’라고 부르는 소형차를 선보였다. 3가지 버전으로 나눴는데, 2기통 8마력 뿜는 S6부터 4기통 3.5L 엔진 얹은 S12/14까지 구색별로 갖췄다. 모두 수작업으로 생산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 구급차, 우편물차 등으로 개조해 판매를 이어갔다.

특히 1921년에 출시한 딕시 G1은 당대 레이스를 쥐고 흔들었다. 4기통 엔진은 18마력의 막강한(?) 힘을 뿜었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못 했다. 전쟁 여파로 1921년 철도 회사인 ‘고타왜건파브릭(gothaerwaggonfabrik)’이 인수했다. 또한, 값비싼 자동차 제조 전략과 저조한 생산능력으로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 차는 잘 만들되 장사는 못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딕시는 저렴한 소형차로 눈을 돌렸다. 영국 하버트 오스틴(Herbert Austin)사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2인승 오스틴 세븐을 아이제나흐 공장에서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이 차는 당시 영국 중산층에서 큰 인기를 끈 소형차로, 일반인은 꿈도 못 꿀 사치품인 자동차를 대중화시킨 주역이다. 딕시는 검증 받은 차를 가져와 돌파구를 찾았다.

그러나 딕시는 경영난으로 독자적 자동차 제조사로 거듭나지 못했다. 결국 1928년 BMW가 1,000만 마르크에 인수했다. 그 결과 독일 최고의 항공기 엔진&모터사이클 제조업체와 아이제나흐 기반의 자동차 제조사가 한 식구로 거듭났다. 합병 초 BMW는 오스틴 세븐을 밑바탕 삼은 3/15를 만들며 독자개발 자동차의 꿈을 서서히 키워나갔다.

 

BMW 엠블럼&키드니 그릴 단 최초의 모델이 등장하다

1933년, BMW는 3/20을 선보였다. 이때부터 지금의 BMW 엠블럼을 달기 시작했다. 동그란 배지 속을 네 등분 해 흰색과 파란색으로 채운 모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항공기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모양을 형상화한 엠블럼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독일 바이에른 지역은 흰색과 파란색이 교차하는 무늬의 깃발을 쓰는데 이를 참고해 만든 로고다.

3/20은 오스틴에서 벗어나 프리츠가 설계한 BMW 최초의 자체 디자인이었다. 또한, 같은 해 선보인 BMW 303은 ‘전매특허’ 직렬 6기통 엔진을 얹고 시장 확대를 이끌었다. 고유의 ‘키드니 그릴’을 단 첫 모델이기도 했다. 1934년, BMW는 항공기 엔진, 모터사이클, 자동차 판매로 8,200만 달러를 벌면서 다임러-벤츠의 라이벌로 떠올랐다.

사실 두 회사는 합병을 고려했다. 당시 독일 히틀러 정부는 이른바 ‘국민차’ 사업을 진행했다. 참고로 1936년 미국은 국민 4.5명 당 자동차 1대를 보유했는데, 독일은 49명 당 1대 수준이었다. 히틀러는 페르디난트 포르쉐에게 대중용 자동차 ‘폴크스아우토’를 설계하도록 지시했고, 400달러에 팔길 원했다. 독일 노동자 계급의 마음 훔칠 묘안이었다.

당시 독일차의 평균가격은 1,000달러 이상. BMW와 다임러-벤츠는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나치당은 양사 공장에 스파이까지 심었다. 히틀러는 폴크스아우토의 사업경제성의 핵심사항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양사는 합병을 통해 ‘살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정부의 감시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며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절대로 질보다 양을 우선하는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BMW의 고집 중 하나다. 1936년엔 2인승 로드스터 328을 출시했다. 강철 프레임을 바탕으로 독립식 서스펜션을 얹는 등 당시 BMW의 모든 기술력을 집약했다. 328은 1940년까지 172개 경주에서 141차례 우승을 거두며 BMW를 세계적 제조사로 널리 알렸다.

(다음 회에 계속)

 

글/강준기(로드테스트 기자)

사진/BM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