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역사

[숨어 있는 세계사] 흑인 노예 300명 남부에서 북부로 탈출시킨 '검은 모세'

Shawn Chase 2020. 4. 16. 13:23

입력 : 2020.04.15 03:00


[해리엇 터브먼


농장 노예로 태어나 1849년 탈출
남부 흑인 노예를 북부로 가게 돕는 비밀 조직 '지하철도'서 10년간 활동
남북전쟁 중엔 무장군대 지휘하며 700명 구해 '터브먼 장군'으로 불려

지난 2월 미국 내 흑인 소유 은행 중 최대 규모인 원유나이티드 은행은 흑인의 역사와 업적을 기념하는 '블랙 히스토리의 달'을 맞아 한정판 직불카드를 출시했어요. 미국 행정부가 20달러 지폐의 앞면 인물을 앤드루 잭슨 전 대통령에서 흑인 여성 인권운동가인 해리엇 터브먼(1820년경~1913)으로 교체하는 계획을 연기하자 이에 항의하는 의미를 담아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 카드를 내놓았죠. 하지만 카드에 새겨진 터브먼의 자세가 영화 '블랙팬서'에 등장하는 가상의 왕국 '와칸다' 사람들이 '와칸다 포에버'를 외치며 손목을 가슴 앞에서 엑스(X)자로 교차하는 모습과 같다는 지적이 제기돼 논란이 일어났어요. 그녀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 무례하다는 것이었죠. 과연 그녀는 어떠한 인물이었을까요?

고달픈 어린 시절 품은 자유에 대한 열망

해리엇 터브먼의 결혼 전 본명은 아라민타 로스입니다. 1820년쯤 미국 동부 메릴랜드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어요. 부모는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온 노예였기 때문에 그녀 또한 노예 신분일 수밖에 없었어요. 노예로서 그녀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어요. 5~6세 때 아기 돌보미로 일했는데 아기가 잠들 때까지 계속 옆에서 지켜보아야 했고 아기가 깨어나서 울면 채찍질을 당했어요. 다른 집 노예 주인이 던진 무거운 금속에 맞아 머리를 심하게 다쳤고 그때 생긴 상처로 평생 병을 앓아야 했습니다. 이런 고난을 겪으며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조금씩 깨달았고 자유에 대한 열망을 품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 그녀의 건강이 나빠지자 '노예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주인이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팔고자 하였어요. 해리엇 터브먼은 자신이 팔리면 부모와 형제들을 영영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였고, 1849년 탈출을 감행하였어요.

수백 명의 흑인 노예를 탈출하도록 도와 '검은 모세'라고 불린 해리엇 터브먼의 사진.
 수백 명의 흑인 노예를 탈출하도록 도와 '검은 모세'라고 불린 해리엇 터브먼의 사진. 그녀는 남북전쟁에선 여성 최초로 무장 군대를 이끌고 공격 작전을 수행하고, 자서전 등을 통해 번 돈을 모아 가난한 흑인을 돕는 등 평생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위키피디아
10여년간 300명 넘는 흑인 탈출 도와

도망 노예들은 거의 문맹이었기 때문에 이정표를 읽을 줄 몰라 탈출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해리엇 터브먼에게 도움을 줬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지하 철도'라고 불리는 조직이었죠. 1840년부터 1861년까지 수천 명의 흑인 노예들을 남부 노예주에서 북부의 자유주나 캐나다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운 비밀 조직입니다. 도망친 흑인 노예를 숨겨주는 사람의 집을 '역', 흑인 노예들을 이끌고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조직원들을 '차장'이라고 부르는 등 자신들만의 은어를 만들어 비밀리에 움직였어요. '차장'의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은 자유민 신분의 흑인, 해방된 노예, 아메리카 원주민, 노예 폐지론을 지지하는 백인 등 다양한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이 '지하 철도'의 도움으로 그녀는 남부를 벗어나 북부 필라델피아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자유를 얻은 그녀는 자신의 탈출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받은 도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고자 뛰어난 '차장'으로 활동하였어요. 1850년 자유주에서도 도망 노예를 추적하고, 잡힌 노예를 송환할 수 있게 하는 도망노예법이 가결되면서 도망 노예의 탈출을 돕는 것이 더욱 위험한 일이 되었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활약이 계속되자 남부의 농장주들은 그녀를 잡는 데 4만달러의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어요. 하지만 아주 치밀하고 교묘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그녀를 잡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해리엇 터브먼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주로 겨울철을 이용해 이동했고, 노예주들이 월요일 아침까지는 사라진 노예에 대한 신문 광고를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토요일 밤에 길을 떠났어요. 그렇게 해리엇 터브먼은 1850년부터 10여 년 동안 300명이 넘는 흑인들의 탈출을 도왔는데, 단 한 명의 낙오자나 부상자도 없었다고 해요.

남북 전쟁에서 여성 최초로 공격 작전 수행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해리엇 터브먼은 노예 해방을 지지하던 북군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활동했어요. 그녀는 요리사, 간호사, 안내원으로 일하며 북부를 도왔는데, 특히 북군의 요리사로 일하면서 남부의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스파이로 숨어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어요. 그녀가 빼돌린 남군의 병력, 군사 기지 등에 관한 중요 정보는 북군이 승리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그녀는 북군의 제임스 몽고메리 장군을 돕는 군사 고문이 됐고, 그와 함께 습격 작전을 지휘해 700명 이상의 노예를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강을 따라 구출해 내기도 했어요. 남북전쟁 중 무장 군대를 이끌고 공격 작전을 수행한 최초의 여성이었죠. 이런 활약으로 그녀는 북부의 군인들에게 '터브먼 장군'으로 불렸고, 흑인들은 자신들의 탈출을 도와준 고마운 마음을 담아 성서 속 인물에 빗대어 그녀를 '검은 모세' '모세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노예제가 폐지된 후에도 그녀는 미국 땅에 사는 아프리카계 흑인과 여성들을 위해, 특히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투쟁했어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는 베푸는 삶을 살았어요. 88세에 그동안 자서전을 쓰고 노동을 해서 번 돈을 모아 '해리엇 터브먼의 집'을 만들어 가난한 흑인들을 도와줬어요. 그녀는 1913년 3월 10일 조용히 눈을 감았지만, 평등과 인권을 위해 싸우는 여러 세대의 흑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