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및 연예

한류 붐 ‘겨울연가’에서 이젠 남성도 찾는 ‘기생충’으로

Shawn Chase 2020. 2. 8.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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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아사히신문 기자의 ‘일본 뚫어보기’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일본판 포스터.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일본판 포스터.

영화 ‘기생충’의 일본 개봉에 맞춰 지난달 후쿠오카(福岡)에 갔다. 극장 측으로부터 ‘기생충’ 상영 후 토크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한국관광공사 후쿠오카지사와 세이난가쿠인대학까지 3곳에서 강연하게 됐다.
 

잇단 만원사례에 영화 상영관 늘어
“아직 3번밖에 못 봤다”는 관객도

후쿠오카 영화제선 한류 소개 꾸준
꽁꽁 언 한·일 관계도 봄바람 불길

대학에서도 관심이 컸으며 극장과 후쿠오카지사 강의장은 가득 찼다. ‘기생충’은 일본 개봉 이후 잇따라 만석을 기록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상영 극장 수가 늘어났다. 일본은 영화 티켓 값이 1900엔(약 2만1000원)이나 된다. 비싸서 극장에서 영화를 안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상영관이 늘어난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나는 한국영화 팬이 된 지 20년 정도 됐는데 내 기억으로는 지금처럼 일본에서 한국영화가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다. 물론 ‘기생충’ 덕이다. 다른 한국영화와는 전혀 다르게  ‘기생충’에 대해서는 홍보에도 엄청 힘을 쓰는 것 같았다. 일본 홍보 담당자로부터 개봉보다 훨씬 전인 지난해 9월쯤 “보도 시사회를 여는데 영화 전문 아닌 한국사회에 대해 깊이 아는 기자를 소개해 달라”는 평소와는 다른 의뢰가 와서 놀랐다.
  
‘택시운전사’등 잇단 상영에 남성팬 늘어
 

지난달 한국관광공사 후쿠오카지사에서 영화 '기생충'에 대해 강연하고 있는 나리카와 아야 전 아사히신문 기자. [사진 나리카와 아야]

지난달 한국관광공사 후쿠오카지사에서 영화 '기생충'에 대해 강연하고 있는 나리카와 아야 전 아사히신문 기자. [사진 나리카와 아야]

나는 아사히신문 문화 담당 기자였던 당시 메인으로 영화를 담당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한국영화가 일본에서 개봉할 때 홍보차 감독이 오면 내가 통역 없이 이야기할 수 있어서 메인 담당 대신 인터뷰할 때가 많았다. ‘설국열차’(2013) 때 봉준호 감독도 내가 인터뷰했다. “봉준호 감독인데 크게 실어주세요”라고 부탁해도 “봉준호가 누구였더라. 배우는 안 왔나?”라는 아사히신문 데스크의 반응에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신문사에 있어도 한국영화에 대해 깊이 있게 취재할 기회는 거의 없겠다는 걸 깨닫고 2017년 1월 퇴사하고 그해 3월부터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엄마가 “딸이 한국영화에 빠져서 한국으로 유학을 갔다”고 주변에 이야기하면 “아 ‘겨울연가’?”라고 하는 사람이 꽤 많다고 한다. 일본에서 한류라고 하면 아직도 겨울연가를 비롯한 한류드라마, 그리고 세계적으로 인기 폭발한 K팝의 이미지가 강하다. 한류 붐이라고 해도 영화는 크게 히트한 적은 없었다.
 
이제 ‘기생충’이 한국영화 팬층 확대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듯하다. 그 변화의 징조는 몇 년 전부터 있었다. ‘택시운전사’, ‘1987’ 같은 영화를 보고 남성 영화 팬들이 “한국영화가 재미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한류 팬층 대부분은 여성이었는데 한국영화는 왠지 그 팬층의 기호와는 조금 안 맞는 듯했다. ‘기생충’을 보고 “너무 재밌네!”라고 나에게 연락해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그 전까지 일부 남성들 사이에서 한류는 여성과 아이들만 좋아하는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홍보 방법도 실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주연이 아닌 출연자 중 아이돌이 있으면 그 아이돌이 포스터의 가운데에 나오거나, 한·일 관계가 안 좋아서 그런지 아예 영화 제목에서 한국 색깔을 없애는 적도 많았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관객 수 1000만 명을 넘은 대히트 영화 ‘부산행’의 일본 제목은 ‘신칸센 파이널 익스프레스(新感染 ファイナル·エクスプレス)’였다. 이러면 ‘부산행’의 한국에서의 흥행을 듣고 보고 싶다고 일본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같은 영화인지 모르고 놓쳐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장률 감독의 영화 ‘후쿠오카’의 한 장면.

장률 감독의 영화 ‘후쿠오카’의 한 장면.

제2차 한류 붐이라 불렸던 동방신기, 소녀시대, KARA 등 K팝 인기가 한참 높았던 때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계기로 한·일 관계가 악화하면서 지상파에서 갑자기 한국 가수들도 한류드라마도 사라져 버렸다. 그때쯤 한국영화 일본 홍보 담당자들은 “방송에서 아예 한국영화를 소개해 주지 않아요”라고 하소연을 했다. 그래서 ‘기생충’ 덕에 한국영화가 일본에서 다시 주목받는 건 나로서도 너무나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후쿠오카에서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극장에 온 사람 중엔 개봉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기생충 아직 3번밖에 못 봤다”는 관객도 있었고, 토크 후에도 나한테 와서 줄을 서서 자기가 얼마나 한국영화를 사랑하는지를 열변하거나 한국영화에 관한 여러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도쿄(東京)나 오사카(大阪)였다면 이렇게까지 뜨거운 반응은 없었을 것이다. 후쿠오카는 지리적으로 한국에 가깝고 특히 부산으로는 배를 타고 갈 수도 있어서 옛날부터 왕래가 많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에서 후쿠오카로 가는 관광객이 급증하고 2018년 후쿠오카를 방문한 외국인 중 60% 이상이 한국사람이었다고 한다. 내 주변에서도 후쿠오카를 갔다 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지난해 7월 이후엔 급감하긴 했지만.
 
그 외에도 후쿠오카에 한국영화 팬들이 많은 이유가 더 있다. ‘아시아 포커스 후쿠오카 국제영화제’는 한국영화를 재빨리 소개해 왔다. 봉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도 그렇다. 이 작품은 한국에서 ‘살인의 추억’(2003)이 히트 친 다음 일본에서 ‘살인의 추억’ 감독의 전작으로 극장 개봉했다. 그런데 후쿠오카 영화제에서는 이미 2001년에 ‘플란다스의 개’를 상영했었다. ‘기생충’ 상영 후 자신이 2001년에 후쿠오카에서 ‘플란다스의 개’를 봤을 때부터 봉준호 감독 팬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봉준호 감독 장편 데뷔작이 재빨리 후쿠오카에서 상영된 건 우연이 아니다. 거기에는 훌륭한 영화 평론가가 있었다. 사토 타다오(佐藤忠男)다. 임권택 감독 작품들을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 알리는 역할도 한 사람이다.
  
“거리도 마음도 부산이 도쿄보다 가까워”
 
아시아 포커스 후쿠오카 국제영화제는 1991년에 시작하고 그 첫 회부터 2007년까지 사토 타다오 평론가가 디렉터를 맡았다. ‘플란다스의 개’는 한국에서도 흥행에 성공은 못 했지만, 사토 평론가는 일찍부터 그 재능을 알아봤던 것이다. ‘기생충’에 대해서도 내가 가장 소감을 듣고 싶었던 건 사토 평론가였지만 건강 상태 때문인지 기사는 못 찾았다.
 
후쿠오카에는 이번 외에도 한국영화의 인연으로 방문한 적이 있다. 장률 감독 ‘후쿠오카’ 촬영 때다. 2018년 봄 벚꽃이 예쁘게 폈을 때였다. 취재 겸 자원봉사도 했다. 배우나 스태프의 식사를 준비해서 제공하는 자원봉사였다. 그날 메뉴는 카레. 박소담 배우나 윤제문 배우가 먹는 옆에서 설레면서 일했다. 윤제문 배우에게 “한국에서 온 일본사람”이라고 자기소개를 한국어로 했더니 왜 일본인이 한국에서 왔는지, 왜 한국어를 잘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던 게 기억난다.
 
장률 감독은 후쿠오카 영화제에 자주 초청받아서 지내다 보니 그곳이 마음에 들어 후쿠오카에서 영화를 찍게 됐다고 한다. 그의 작품 ‘후쿠오카’는 지난해 11월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도 상영됐다. 나도 그때 봤는데 영화 크레딧에 처음으로 내 이름이 나온 것도 흐뭇했다. 딱 한 번 식사 준비를 도와준  것뿐이지만. 일본과 한국, 그리고 일본인과 한국인의 경계가 애매해 보이는 영화였던 것도 신기했다.
 
하긴 후쿠오카 사람 중에는 “거리뿐만 아니라 마음도 도쿄보다 부산이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번에 다시 후쿠오카에 가 보니까 한국 여행객들이 다시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듯했다. 지난해 7월 이전처럼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날이 기다려진다.
 

나리카와 아야 전 아사히신문 기자


나리카와 아야(成川彩) 2008~2017년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주로 문화부 기자로 활동한 후,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석사과정에 유학. 한국영화에 빠져서 한국에서 영화를 배우면서 프리랜서로 일본(아사히신문 GLOBE+ 등)의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칼럼을 집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