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20.01.22 00:48
4월 총선이 ‘문재인 선거’로 굳어져 가는 분위기다. 여권에선 오로지 문 대통령만 보인다. 관료들은 ‘청와대 정부’에 압도돼 있고 민주당도 수직적 당·청 관계에 짓눌려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청와대 출신의 친문만 60여명 총선에 나서고 비문(非文)은 찾기조차 어렵다. 문 대통령의 거침없는 독주다. ‘문재인 선거’가 돼버린 4월 총선
고정 지지층 만으로 승부할 채비
조국 공소장의 ‘우리 편’ 챙기기
과거 친박도 의리 - 배신으로 몰락
대통령 말에도 무시무시한 힘이 실리고 있다. 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조국 전 장관에게 아주 크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하자 이틀 뒤 신임 검찰 간부가 “조국을 무혐의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와대를 향해 수사의 칼날을 겨누었던 검사장들은 모두 물갈이됐고 내일은 부장·차장검사들에 대한 보복 숙청이 예고돼 있다. 군사 독재정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문 대통령의 “이제 북미 대화만 쳐다보고 있지 않겠다”는 발언도 어마어마한 파장을 낳았다. 여기에 태클을 건 해리 해리스 주한 미 대사를 향해 “무슨 조선 총독이냐”(민주당 의원) “콧수염이 일본 순사 같다”(친문 네티즌)는 인종차별·인격살인의 무차별 공격이 퍼부어졌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청와대·정부·민주당이 스크럼을 짜 일단 밀어붙이고 본다. 상식이나 합리적 판단은 사라졌다. 문재인 청와대에서 근무하고 나온 인사들은 이렇게 입을 모은다. “수석과 비서관들은 과거 정권보다 더 대통령 눈치를 살피고 문 대통령은 민주노총과 참여연대만 의식한다.” 그래서 자꾸 좌파 정책만 쏟아진다는 것이다. 고정 지지층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에 “노 대통령 퇴임 후에 검찰을 통해 비리가 흘러나오자 진보 언론들은 살점을 후벼 파는 식으로 무섭게 노무현을 공격했다”고 썼다. 다른 건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는데, 같은 편이라 생각했던 진보 진영의 살기 어린 공격에는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조기숙 전 홍보수석도 “노 대통령 서거는 진보 언론들이 ‘산화하라’, ‘굿바이 노무현’ 같은 칼럼으로 돌아가시라 고사를 지내다시피 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증언했다. 문 대통령이 지지층 이탈에 극도로 예민한 배경에는 이런 트라우마가 깔려 있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만약 문 대통령이 “소득주도 성장의 결과가 나쁘니 정책을 바꾸겠다”고 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2018년 여름에 잠시 그럴 기미를 보이자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소득주도 성장을 버리고 소득포기 성장을 하겠다는 소리냐”며 핏대를 세웠다. 민주노총과 참여연대도 “기존 정책을 강화하고 더욱 공격적인 재정정책을 펴라”고 압박했다. 그 이후 대통령의 발언은 “매우 아픈 지점”→“소득주도 정책의 효과를 보려면 시간이 걸린다”→“우리 경제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유체이탈 화법만 반복했다. 오히려 정책 전환이나 협치·탕평을 기대한 게 순진한 생각이었다. 청와대 인사들이 언급하는 또하나의 공통 분모는 정권 재창출에 실패할 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곁에서 총선·대선에 패배할 경우 어떤 비참한 말로를 맞는지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그래서인지 지난 연말부터 무리하게 선거법을 고치고 총선 변수가 될지 모를 검찰 수사는 서둘러 무력화시키고 있다. 수사 칼날이 조국에 이어 김경수·윤건영·백원우·천경득까지 파고들자 ‘검찰 개혁’이란 이름으로 ‘윤석열 라인’을 대놓고 학살했다.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던 일을 전혀 부끄럼 없이 해치우고 있다. 더 이상 진영논리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사치스런 일이다. 문 대통령은 4월 총선을 전면전이자 마지막 승부처로 보고 총력전을 각오한 모습이다. 이에 비해 여전히 보수 야권은 헤매고 있고 안철수 전 의원까지 귀국했다. 하지만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안철수의 새정치는 화전민(火田民) 정치였다. 토양이 좋은 수도권이나 호남에 돌아가며 불을 놓아 한철 수확을 한뒤 보따리를 쌌다. 중도를 내건 그의 새 도전이 성공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번엔 불을 놓을 공간조차 잘 안 보인다. 여권은 보수 분열과 남북 이벤트를 기대하는 눈치다. 하지만 4월 총선은 1대1 정면 대결로 가는 분위기다. 민주당의 폭주와 외부 압박으로 한국당-새보수당이 합칠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보수 통합 대신 분열의 메시지를 내기도 쉽지 않다. 문 대통령이 ‘진보+호남’의 고정 지지층으로 승부수를 띄우는 데 따른 역풍이다. 현재 여론조사를 보면 일단 문 대통령의 계산대로 돌아가는 유리한 국면이다. 하지만 그제 검찰의 조국 공소장에는 불길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친문 실세들이 한 몸이 돼 유재수 구하기에 나선 것이다. “같은 편도 못 알아보는가” “함께 고생한 우리 식구니 봐 달라” “청와대가 금융권을 잡고 나가려면 그런 인물이 필요하다”…. 4년 전 친박도 세상을 의리와 배신으로 나누었다. 자기편만 ‘진실한 사람’이라 우기다가 총선에 패배하고 탄핵의 막장으로 굴러 떨어졌다. 석 달 뒤 정권이 심판받을지 야권이 심판당할지 운명적 갈림길이 다가오고 있다. 어느새 총선이 대선 만큼 판이 커져 버렸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출처: 중앙일보] [이철호 칼럼] 대통령의 위험한 승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