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치

[사설]5대 그룹에 ‘공동 사업화 방안 내라’는 靑의 시대착오 행태

Shawn Chase 2020. 1. 23. 14:06

동아일보입력 2020-01-23 00:00수정 2020-01-23 00:00


청와대가 5대 그룹에 공동으로 사업화할 수 있는 신사업 아이디어를 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김상조 대통령정책실장이 지난해 11월 말 5대 그룹 기업인과의 조찬모임에서 “제2 반도체가 될 만한 신사업을 5대 그룹이 함께 찾고 공동연구개발 및 투자에 나서면 정부도 이를 국책사업으로 삼아 수십조 원의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이에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등 5대 그룹 고위 임원들이 최근 모여 ‘공동 사업화’ 과제를 논의했으나 이렇다 할 결과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김 실장의 제안은 반도체 이후 우리 경제를 책임질 미래 먹거리 산업 창출이 시급한 상황에서 재계에 협조를 구하려는 취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발상부터 구시대적이다. 기업이 미래 먹거리 사업을 정하는 일은 고도의 경영 판단에 따라 이뤄지는 ‘자율적 영역’이다. 청와대가 개별 기업에 ‘아이디어를 내라, 마라’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상식이다. ‘요청’이라는 형식을 빌리긴 했지만 대통령정책실장의 요청은 재계에서는 ‘지시’로 통한다. 5대 그룹을 지정해 특정한 과제를 준 것도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 횡행하던 ‘관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청와대가 일선 기업에 공동 사업화 방안을 내라고 하는 것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일이다. 청와대로서는 5대 그룹이 재계를 대표하는 하나의 기업군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때론 견제하는 사이다. 재계에서는 “기업마다 중장기 사업의 방향, 핵심 기술이 다른데 협업하라는 건 현실과 동떨어진 요청”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지난달에는 청와대 비서관이 국내 전기차 배터리 3사와 현대자동차 고위 임원들을 청와대로 불러 공동으로 미래차와 차세대 배터리 개발에 나설 방안을 찾아달라고 요구해 기업들이 반발하고 있다고 한다.


기업은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아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에 체질화된 조직이다. 정부에서 미래 먹거리 산업을 찾지 말라고 해도 생존과 발전을 위해 본능적으로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삼성전자와 애플의 협력에서 알 수 있듯 경영상 필요하면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부가 진정 미래 먹거리 산업 창출에 도움을 주려면 기업인을 불러 이래라저래라 하기보다 기업들이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법적, 사회적 여건을 만드는 게 급선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외이사 임기를 제한하는 상법 시행령 국무회의 의결 등 기업인의 의욕을 꺾는 일들이 다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