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6.28 18:46
문 대통령에게 기대를 접었다는 분들이 있다. 그래도 ‘김광일의 입’은 몇 가지 당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마지막 당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제발 망신을 당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싫든 좋든 나라의 얼굴이다. 대통령의 망신은 국민의 망신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그래서 이번만은 가만있으면 안 된다.
엊그제 문 대통령은 7개국 통신사와 서면 인터뷰를 했다. 원고지 75장, A4용지 10장, 3092개 단어에 이르는 장문의 인터뷰다. 입맛에 맞게 잘라서 보도하라는 뜻인 것 같다. 한 대목은 이렇다.
"나는 언제든지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시기와 장소,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지 김 위원장을 직접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나의 의지입니다."
가수 박상철이 부른 ‘무조건’이란 노래가 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특급사랑이야/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당신이 부르면 달려 갈 거야/ 무조건 달려갈 거야/ 쨔쨔쨔 짜라짜라 쨔쨔쨔" 이 노랫말처럼 문 대통령은 거의 ‘무조건’ 수준으로 매달리는 모양새다. 청춘들의 연애도 이런 연애는 오래 못 간다. 과거 ‘통일 대통령’의 환상을 가졌던 전임들도 무조건적 정상회담을 제안한 적은 있다. 그러나 이제 북은 핵보유국 행세를 하고 있다. 북핵 폐기는 매달린다고 이뤄지지 않는다. 핵은 핵으로만 해소된다. 핵만큼 강력한 제재로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애걸복걸하는 대통령에겐 핵 폐기가 아니라 국격(國格)이 폐기된다.
그런데 진짜 치욕적인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문 대통령의 통신사 인터뷰가 국내 신문에 보도된 그날 아침 권정근 북한 외무성 미국담당 국장이 담화를 발표했다. 원고지 6장, A4용지 1장, 242단어다. 문 대통령 인터뷰의 13분의1 분량이다. 요점은 간단하다. 트럼프·김정은 협상에 ‘문 대통령은 끼어들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쪽을 향해 ‘냄새를 피운다’는 말도 했다. 지난 4월 김정은이 말했던 "오지랖 넓은 중재자 행세를 그만하라"는 말과 동일선상에 있다. 이것 역시 북한식 말투요 표현법이려니 저들의 ‘내재적 접근’으로 넘어가겠다.
그러나 팩트가 어긋난 부분은 그냥 넘길 수 없다. 문 대통령은 7개국 통신사와 인터뷰를 했으니 사실상 전 세계를 향해 발언한 셈인데, 이렇게 말했다. "남북 간에도 다양한 경로로 대화를 지속하기 위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북 외무성 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남조선 당국자들이 지금 북남 사이에 다양한 교류와 물밑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광고하고 있는데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
일개 국장이라는 자가 문 대통령의 메시지를 묵사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기사 댓글에는 ‘모욕’, ‘능욕’ 이런 단어가 많았다. 국민들은 그런 치욕을 느끼는 중에도 알 것은 알아야한다. ‘다양한 경로’가 됐든, ‘물밑’이 됐든, 남북 사이에 대화가 있는가, 없는가.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한국 대통령인가, 북한 외무성인가.
이제 청와대 혹은 외교부·통일부가 우리 국민에게 정식 해명을 해야 한다. 어제 기자가 묻자 통일부 당국자는 "남과 북, 북미 간 대화의 ‘조속한 재개를 바탕으로’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정착을 위해 계속 노력해나갈 것"이라고만 했다. 몇 번 읽어봐도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북한 외무성은 ‘교류와 대화,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 이렇게 명확하게 말했다. 통일부 답변은 ‘노력하겠다.’이다. 동문서답일 뿐이다. 이제는 북 외무성 국장의 눈치를 보고 있는가.
얼마 전 국내 민간 신문에서 ‘김정숙 여사의 버킷 리스트?’란 칼럼을 싣자 청와대는 주장을 담은 칼럼조차 정정해달라고 공식 서면 브리핑을 내놓았다. 그런데 북한 외무성의 모욕적인 담화에는 청와대도 우리 외교부도 일언반구 반응이 없다. 이건 ‘팩트 체크’에 관한 부분이다. 누가 허튼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안보와 경제, 이 두 가지다. 부국강병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는데, ‘국민의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다. 대통령의 망신은 대통령 개인의 망신이 아니다. 국민의 자존감이 크게 손상되는 일이다. 대통령과 청와대는 이걸 아는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28/201906280258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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