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공항

방산수출보다 비리척결에 몰두하더니…KAI `예고된 추락`

Shawn Chase 2018. 10. 4. 21:10

10조원 美공군 훈련기 사업 수주 실패
10년 넘은 T-50에 비해
보잉은 최신기로 도전
92억弗 저가공세에 쓴맛

KAI, 美수출길 막히면서
제3국 진출도 난항 예고
첨단엔지니어 육성 무산

  • 문지웅 기자
  • 입력 : 2018.09.28 17:47:03   수정 : 2018.09.29 11:27:07
  • ◆ 위기의 방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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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28일 미국 공군 고등훈련기 입찰에서 보잉·사브 컨소시엄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사진은 고등훈련기 T-50을 조립하고 있는 경남 사천의 KAI 공장 내부 전경. [사진 제공 = KAI]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방산비리 수사가 결국 발목을 잡았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미국 고등훈련기 교체사업(APT사업) 수주에 실패하자 방산업계에서는 "일찌감치 예고됐던 일"이라며 자조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수주 실패의 직접적 원인은 높은 가격에 있지만 방산 진흥보다 방산 비리 척결에 집중하고 있는 정부를 원망하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방산업계에 대한 검찰, 감사원, 방위사업청의 전방위 압박을 이제는 풀어줄 때가 됐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28일 방산업계에 따르면 KAI가 APT사업 수주에 실패한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이 발목을 잡았다. 미 공군이 당초 책정한 사업비는 197억달러였다. 시장에서는 실제 수주 규모를 160억달러대로 추정했다. 하지만 이날 보잉·사브 컨소시엄은 92억달러에 APT사업을 수주했다. 시뮬레이터 46대의 가격을 빼면 대당 가격은 2500만달러 안팎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KAI가 태국에 수출한 T-50의 대당 가격은 3250만달러였다.

    록히드마틴은 KAI에 지속적으로 가격 인하를 요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가격이 승패를 가를 결정적 변수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기자간담회에서 김조원 KAI 사장은 "록히드마틴에서 가격 인하를 요구한다"며 "원가 이하로 가게 되면 제가 배임에 걸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감사원 출신인 김 사장은 저가 수주 시 불거질 수도 있는 문제를 처음부터 고심해 온 것으로 보인다.

    미 공군은 T-50이 개발된 지 10년이 넘은 낡은 기종이라는 인식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KAI가 내세우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이라크, 태국 수출 실적 역시 미 공군 입장에서는 큰 점수를 주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선진국 또는 미국의 동맹국에 수출한 실적이 없다는 지적이다.

    외국 방산업체 관계자는 "보잉은 맞춤형 최신 훈련기를 만들어 입찰에 참여했지만 KAI는 10년도 넘은 모델이 약간 개조해서 나왔다"며 "선진국 수출 경험이 전혀 없었던 것도 플러스 점수를 받지 못한 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미국 정부나 군에서 볼 때 KAI가 방산 비리와 연루된 기업이라는 점도 평가에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 방산업체 관계자는 "방산업계에는 비리가 만연할 것이라는 추측에 근거한 수사나 조사가 계속됐다"며 "방산 비리에 연루된 기업에서 만든 무기를 어느 나라에서 사주겠느냐"고 지적했다. 문제는 수주 실패가 아니라 앞으로 닥칠 일이다. T-50의 미국 수출길이 막히면서 다른 나라 수출에도 비상이 걸렸다. `낡은 데다 가격도 비싸다`는 인식이 국제사회에 확산되면 T-50 수출은 64대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암울한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미국 수출에 성공할 경우 F-35 전투기를 운용하는 10여 개 국가에 500대(약 30조원) 가까운 추가 수출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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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부가가치 일자리 창출 기회를 한순간에 날리게 된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항공산업은 완전 자동화가 어렵다. 일반 제조업 공장과도 다르다. 고액의 연봉을 받는 숙련된 엔지니어를 필요로 한다. APT사업을 수주했을 경우 KAI는 물론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 협력사들도 대규모 추가 고용에 나설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이와 관련해 보잉 측은 미국 내에서 90% 이상을 생산해 일자리 1만7000개를 창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KAI가 이번 수주 실패로 경영이 어려워지면 국내에서 진행 중인 대규모 사업에도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KAI는 국내 최대 규모의 항공우주 관련 업체로 한국형전투기 개발 사업(보라매·KF-X사업)과 군용정찰위성 개발사업(425사업)을 맡고 있다. 군용정찰위성 사업은 군이 추진하고 있는 킬체인 구축의 핵심적 분야다. 특히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위해 우리 독자적인 대북감시정찰능력이 선결조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형전투기도 개발 예산만 8조8000억원에 이르는 초대형 사업이다. 정부와 군은 2020년대 초까지 시제기를 만든다는 계획인데 KAI가 미 고등훈련기 사업을 통해 기술 성숙도를 높이면 난관이 훨씬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군 관계자는 "미 고등훈련기 사업을 통해 한국형 전투기 개발에 활용도가 높은 노하우와 소프트웨어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놓쳐서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

    방산업계에서는 KAI 자체의 수출 역량 강화가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KAI가 2030년 세계 5위 항공우주업체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정부에 의존하는 수출 관행에서 벗어나 자체 수출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 방산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정부가 주도해 수출을 해와서 KAI의 수출 역량은 보잉, 록히드마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다"며 "APT사업을 반면교사로 삼아 수출주도형 조직으로 탈바꿈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