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이슈

[아침을 열며]추석날 시댁에 가지 않은 이유

Shawn Chase 2018. 9. 30. 22:24

지난주 추석이 지나갔지만 아직 곳곳에 ‘여운’이 남아 있다. 우리집부터 그렇다. 결혼 22년차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추석날 시댁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12년 전 둘째가 추석 전날 태어난 덕분에 한 번 빠진 적이 있고, 추석 당일 회사 당직을 마치고 저녁에 간 일을 제외하곤 그야말로 처음 있는 일이다.

[아침을 열며]추석날 시댁에 가지 않은 이유

연휴가 끝난 후 출근해 명절 인사를 나누다가 슬쩍 “시댁에 안 갔다”고 하자 부서 선후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두들 궁금증과 우려의 눈빛으로 이유를 물었다. 그런데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동안 겪은 수많은 감정들과 답답함, 혼자 되뇐 자기긍정과 부정, 체념과 해탈까지 이 복잡한 것들의 요체가 빚어낸 22년 만의 행동을 몇 마디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올해 추석을 기점으로 사회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는 점이다. 추석 무렵이 되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집집마다 달라진 풍경이 비춰졌다. ‘올해 80세 된 아버지가 차례(제사)를 없애고 함께 여행가자고 제안하셨다’ ‘1주일 앞당겨 간단히 성묘하고 연휴 때는 각자 쉬기로 했다’ ‘시어머니가 차례 중단을 선언하셨다’ 등등. 과거 지인의 지인 경우로 금싸라기처럼 전해진 이야기들이 평범한 집안들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언론에서 소개한 웹툰 작가 ‘서늘한 여름밤’이 주최한 ‘제사 가지 말고 나랑 놀자’ 모임도 눈길을 끌었다. 전통제례 전문가들의 조언도 이어졌다. 대개는 추석 차례상의 바른 의미와 그에 따른 간소화의 필요성, 기제사로 잘못 변형된 문제점, 여성에게 희생을 강요해온 가부장제의 부당함 등에 관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중 특히 “예(禮)란 언어와 같아서 사람들과 소통하면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하면 사라지고 만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나의 행동은 최근 분위기에 용기를 얻은 것이 사실이다. 추석 전날, 시댁에서 차례음식 준비를 마치고 분위기를 살피며 얘기를 꺼냈다. “글쎄, 퇴계 이황 17대 종손도 차례를 안 지낸대요. 어른들 모시고 가족이랑 놀러간다고요!!” “전문가들(예를 들면, 성균관 전례위원장)에 따르면 차례는 추석이나 설날에 차를 올리면서 드리는 예로 기제사와는 달라서 간단히 차와 과일만 올려도 된다니깐요. 우리집처럼 기제사도 밤 12시에 지내는 집이 요즘 세상에 어디 있냐고요….” 

언제나처럼 남편은 물론 시댁 식구 중 내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저 좋자고 하는 말 아니에요. 어머님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실 때 자식들이랑 여행도 다니고 하셔야죠.”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말씀하셨다. “나 있을 때까지 이렇게 할 테니, 나중에 좋을 대로 해라. 앞으로 몇 년을 더 한다고.”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이때 눈치 없이 타이밍을 못 맞춘 남편이 기름을 부었다. “애엄마는 내일 큰애 밥주고 학원에 데려다준 다음 늦게 올 거야(차례상은 못 차리고 설거지하러 온다는 얘기).” 이후 상황은 생략. 추석날 시댁에 가지 않은 것은 전날의 생략된 상황에다, 약간의 두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엔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센 진통제를 먹고 억지로 갔지만 올핸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내적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새벽에 악몽까지 꿨다. 양쪽 어깨와 다리까지 수술하고도 맏며느리로 50여년을 제사와 명절 음식을 장만하시는 어머니가 같은 여성으로서 애처로웠다. 누구보다 희생하였으면서도 시대가 바뀌어 변화의 대상이 된 듯한 처지가 죄송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론 고집스러운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난 왜 이렇게 용기가 없나, 당당하지 못할까, 차라리 약 먹고 빨리 갈까….’ 나중엔 돌아가신 친정 부모로 빙의해 “맏며느리인데 어서 가라” “아픈데 가지 마라” 혼자서 널뛰기를 했다. 시간은 흘렀고 점심때가 돼서야 내적 갈등을 끝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사 가지 말고 나랑 놀자’ 모임에 취재라도 갈 것을. 며칠 후 모임 후기를 찾아봤다. 주최자도 놀랐을 만큼 신청자가 몰렸고, 사는 곳과 하는 일이 제각각인 20~40대의 여성들이 추석날 모여 삶의 이야기를 나누며 유쾌한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내년도 기약하면서. 

               

추석이 1주일 지났지만 남편과는 그날 얘기를 꺼내지 않고 있다. 그만큼 ‘뒤끝’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이번 추석 여성들의 반란에 (남자)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은 큰 흐름이라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 가부장제 자체가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사라지고 있고 페미니즘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도련님’ 등 성차별적인 호칭 문제도 분출되지 않았나. 방향이 맞고 사회현상이 된 만큼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며느리들이 속좁…(이하 생략).” 시작은 좋았던 남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상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 부디 내년엔 우리 모두 본질에 더 다가서 있기를.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9302042005&code=990507#csidx301fe26c52491469998d1549e82fe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