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이슈

[선우정 칼럼] 콩가루 사법부가 얻은 뜻밖의 소득

Shawn Chase 2018. 9. 26. 11:21

조선일보

  • 선우정 사회부장


  •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25/2018092501438.html



    입력 2018.09.26 03:17

    위기의 법원이 발표한 제 식구의 불구속 사유는 2838자짜리 長文이었다
    사법史에 남을 일이다… 다른 구속 피의자에게도 2838자로 설명해 달라


    선우정 사회부장
    선우정 사회부장


    법원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구속하면서 공개한 사유는 85자(字)였다. 범죄의 소명이 있고 증거 인멸 우려가 있다는 간략한 내용이다. 그동안 많은 구속 기사를 쓴 현장 기자들은 "그나마 긴 편"이라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 때 공개한 사유는 27자였다. 내용은 '증거 인멸의 염려' 하나였다. 앞서 구속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사유도 43자에 불과했다.

    주요 피의자의 구속 여부는 보통 자정에서 새벽 사이에 결정된다. 기자들은 영장 발부와 영장 기각의 경우를 모두 대비해 두 가지 기사를 미리 써놓고 기다리다가 법원의 결정 즉시 기사를 송고한다. 그 순간 법원이 무섭게 다가온다. 전 대통령이든, 글로벌 기업 총수든, 잡범이든 200자 원고지 절반도 안 되는 이유로 구속된다. 반세기 이상 끌어온 검경의 영장 청구권 다툼도 그 순간 '애들 싸움'처럼 느껴진다. 청구권보다 훨씬 중요한 영장 발부는 독점 논란조차 없다. 27자든, 85자든 입 다물고 철창행이다. 법의 권위일까, 법관의 위엄일까. 하지만 그 싸늘한 침묵이 폭력적으로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구속되는 당사자는 몇백 배 더할 것이다.


    이런 법원이 지난주 전례 없는 사유서를 발표했다. 2838자짜리, 200자 원고지 18.3장 분량이다. 판사 출신 유해용 변호사에 대해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 기각 사유였다. 유 변호사는 대법원 기밀 자료를 반출했다는 혐의와 박 전 대통령 비선 의료진의 정보를 수집해 청와대에 전달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소위 '사법 농단' 수사 과정에서 나왔다. 법조인들도 이렇게 긴 사유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법관은 무엇이 불안했는지 이 내용을 법원 내 온라인망에도 올렸다.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사법부 전체를 향해 '내 판단을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

    검찰의 영장 청구는 영장 청구권이라고 한다. 하지만 법원의 영장 발부는 영장 발부권이라고 하지 않는다. '영장주의'라는 차원 높은 말을 쓴다. 영장주의는 사법부의 영장 없이 행정부가 국민의 신체 구속과 강제 수사를 함부로 못 하도록 규정한 헌법 이념이다. 영장주의는 불구속 수사, 불구속 재판을 원칙으로 한다. 이런 원칙을 깨고 예외를 적용할 할 때 27자 사유를 내놓던 법원이 원칙대로 하면서 2838자짜리 사유를 발표했다. 헌법 이념에 따른다면 반대로 해야 했다. 구속되는 사람을 납득시키기엔 2838자도 부족하다. 반대의 경우엔 27자로 충분하다.

    법원이 거꾸로 돌아가는 이유는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법부 70주년 기념행사에서 "지난 정권의 사법 농단 의혹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을 '촛불 정신'이라고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뒤로 압박해도 겉으론 존중하는 게 관례였다. 촛불이 삼권(三權) 사이의 장막까지 태워버렸나. 대법원장 약속대로라면 검찰의 압수 수색은 저인망식으로 진행돼야 했고 구속은 이뤄져야 했다. 하지만 모든 수사가 법원의 영장 단계에서 제동이 걸리고 있다. 약속 위반이다. 영장 전담 판사가 '적폐'라서 그런가. 법관 인사권은 대법원장에게 있다. '우리법'인지 '인권법'인지 자칭 '청류(淸流)'로 바꾸면 해결될 일 아닌가. 장문(長文)의 기각 사유서는 이에 대한 당사자의 우울한 해명처럼 보였다.

    이번 파동은 김명수 사법부가 시작한 것이다. 검찰은 대통령 뜻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행정부 조직이다. 검찰의 파상 공세를 탓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대통령 뜻에 따르는 자신을 탓해야 옳다. 법은 '촛불 정신'도 '대통령 지시'도 '대법원장 약속'도 아니다. 법은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다. 압수 수색과 같은 강제 수사도 제한해야 한다. '별건 수사'는 말할 것도 없다. 지금 일어나는 소동은 본질적으로 법과 시류(時流)의 불협화음이다. 법원은 당연히 법의 편이다. 그런 법원이 그동안 얼마나 시류를 배척하고 법을 따랐나. 전직 대통령, 글로벌 기업 총수, 일반 잡범들의 구속 과정에서도 지금 제 식구들에게 적용하는 것과 같은 잣대를 적용했나.

    이번 사법부 파동은 법원 안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위법의 경우를 선별해 법 절차에 따라 해결하면 됐다. 최고의 법 전문가들이 실체도 없는 소위 '블랙리스트'로 의혹을 키우다가 스스로 귀신을 불러들였다. 콩가루 집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와중에 뜻밖에 얻은 값진 소득이 이번 장문의 사유서다. 당해봐야 안다고 했던가. 앞으로 구속 영장을 발부하는 모든 이에게 최소 2838자짜리 사유서를 제시하라. '촛불 정신'은 몰라도 '법 정신'엔 이쪽이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