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한·일 손잡고… 조선통신사 기록물, 세계유산 만들었다

Shawn Chase 2017. 11. 1. 13:44

유석재 기자


입력 : 2017.11.01 03:02

[양국 공동으로 해유록 등 333점 유네스코 등재]

조선왕실 어보·어책 - 의례용 도장과 옥에 새긴 교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 "기생·걸인·도적까지 의연금 내" 언론 보도·수기 등 2472건


"층집과 날개를 편 듯한 누대가 구름 속에 빛나며 수많은 인가의 담장과 벽들도 다 깨끗하다. 작은 땅이라도 그저 내버려둔 데가 없다." 1719년 조선통신사 일행의 제술관으로 일본에 간 문인 신유한(申維翰)은 기행문인 '해유록(海游錄)'에서 오사카(大阪)의 번화하고 청결한 시가 모습을 적었다. 한편으론 그에게 글을 청하러 몰려드는 일본인들을 "문장이 볼품없고 졸렬하다"고 평하며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신유한은 조선과 일본 양국의 외교 관계뿐 아니라 근세 일본의 발전상과 제도를 자세히 기록했다.

'해유록'을 포함한 111건 333점의 '조선통신사 기록물'이 '조선왕실 어보(御寶)와 어책(御冊)''국채보상운동 기록물'과 함께 10월 31일(한국 시각)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조선통신사 기록은 한·일 양국이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공동 추진해 성공한 첫 사례다. 한국의 부산문화재단과 일본의 '조선통신사 연지(緣地)연락협의회'가 앞장섰다. 양국은 등재 과정에서 이 기록물이 '평화와 선린외교의 상징'임을 강조했다. 조선통신사 기록은 한국의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부산박물관 등에 소장된 63건 124점과 일본 오사카역사박물관 등에 소장된 48건 209점으로 외교 기록, 여정, 문화 교류 기록 등을 포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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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기록물,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등 3건의 문화유산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1711년(숙종 37년)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그린 일본 오사카역사박물관 소장 ‘정덕도조선통신사행렬도’, 세종비 소헌왕후의 어보,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기록한 간찰 자료. /문화재청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9년 뒤인 1607년(선조 40년)부터 1811년(순조 11년)까지 조선이 일본 막부(幕府)의 요청으로 일본에 12차례 파견한 외교사절이다. 전쟁으로 단절된 양국 관계를 극복하고 우호를 재정립하기 위해 시작된 이 외교사절단은 조선 후기 양국 문화 교류의 중심 역할도 수행했다. 300~500명에 달하는 통신사가 일본을 다녀오는 데 6개월에서 1년이 걸렸으며, 방문지마다 서화(書畵)와 시문(詩文)을 남겼다. 손승철 강원대 명예교수는 "조선통신사는 한·일 간 약탈과 전쟁의 시대를 공존과 평화의 시대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며 "국가 간 갈등을 풀 수 있는 훌륭한 역사적 사례라는 점을 유네스코가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은 1411년부터 1928년 사이에 제작된 어보 331점과 어책 338점이다. 어보는 금·은·옥으로 만든 의례용 도장으로, 왕·왕후의 덕을 기리는 칭호를 올리거나 왕비·세자·세자빈을 책봉할 때 제작했다. 어책은 세자·세자빈 책봉과 비·빈의 직위를 내릴 때 만든 교서로 대나무나 옥에 교훈적인 내용을 새겼다. 문화재청은 "왕실의 정통성과 신성성을 표현한 유물이며 조선왕조의 정치적 이념과 문화·예술의 독창성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했다. 지난 8월 어보 4점이 일제강점기에 도난돼 다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었지만 '정식 절차를 거친 재(再)제작품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는 논리로 등재에 성공했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1907~1910년 추진된 국채보상운동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로, 발단·전개를 기록한 수기 12건, 확산·파급을 기록한 수기 75건, 일본 정부 기록물 121건, 언론 보도 2264건 등 모두 2472건이다. 국가가 진 빚을 갚 기 위해 국민의 25%가 자발적으로 참여한 이 운동은 '남성은 술·담배를 끊고, 여성은 반지와 비녀를 내놓았고, 기생·걸인과 도적까지도 의연금을 냈다'는 이야기를 남길 정도였다. 중국(1909), 멕시코(1938), 베트남(1945) 등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당대의 기록물이 온전히 보존돼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01/201711010021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