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Why] 일제가 반토막 낸 이상룡 선생 본가, 완벽하게 복원하려면

Shawn Chase 2017. 8. 27. 17:54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입력 : 2017.08.26 03:02

[김두규의 國運風水]


"경북 안동에 임청각(臨淸閣)이라는 유서 깊은 집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입니다. 무려 아홉 분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고,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 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습니다. 아흔아홉 칸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지금도 반 토막 난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소개한 임청각 사연이다. 지난 19일 김종진 문화재청장이 임청각을 둘러보고 관계자들과 복원을 논의했다.

임청각이 풍수사(史)에서 등장한 것은 1931년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이 펴낸 '조선의 풍수'에서였다. '3명의 정승을 낳게 될 영실(靈室)이 있는 (…) 이상룡의 집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그 조상이 (…) 이 땅을 점쳐 지은 99칸짜리 건물이다. 집의 평면도는 동쪽에서 볼 때 용자형(用字形)이다.' 용(用)자는 日과 月을 붙여 놓은 모양으로서 해와 달의 기운을 땅으로 불러들여 이른바 천지의 정기를 합치도록 하기에 풍수상 길하다는 것이 무라야마의 설명이다.

그가 이 책을 출간한 1931년은 석주 이상룡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때였다(1932년 작고). 무라야마도 임청각의 실소유주가 석주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이 책은 조선왕조 500년의 풍수를 이해하고 집필한 800쪽 넘는 대작이다. 효율적인 식민지 통치는 식민지 문화를 정확하게 이해함을 전제로 한다. 이 책의 발행 목적이다. 출간되자 그 어떤 책보다 많이 팔렸다. 풍수술사들뿐만 아니라 지식인들까지 구해 읽었고, 해방 이후 출간된 많은 풍수 서적과 논문도 이 책의 덕을 보았다. 문자 그대로 '풍수 입문 고전'이다. 최근 임청각 관련 기행문과 논문이 나오고 있지만 역시 '조선의 풍수'가 소개한 내용을 변용하거나 옮겨 적는 수준이다.

대통령이 말한 '임청각에 대한 일제의 보복'은 사실일까? 1960년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려 할 즈음 '조선의 풍수'가 긴급 '수배'되었다. 도로를 내면서 잘리게 될 수많은 산맥으로 인한 재앙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1960년대에도 그랬는데 1930년대는 오죽했을까?

이상룡 선생의 본가인 경북 안동 임청각. 그 앞에 철로가 놓여 있다.
이상룡 선생의 본가인 경북 안동 임청각. 그 앞에 철로가 놓여 있다. / 안동시


중앙선은 1936년 착공해 1942년 완공된다. 그때 임청각 앞에 펼쳐지는 낙동강 푸른 물과 하얀 백사장, 빼어난 경관도 파괴되었다. 수시로 지나가는 기차는 임청각을 흔들어댔고 귀를 먹먹하게 했다. '일제가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다'는 소문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이 아니다. 토지 측량을 위해 박은 삼각점을 쇠말뚝으로 오해한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임청각의 경우는 다르다. 다른 곳으로 철로를 낼 수 있었다. 이곳을 고집한 것은 석주 가문을 모욕하기 위한 의도적 행위였다.

임청각 복원은 철로 철거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옆의 자동찻길 역시 지중화하거나 우회시켜서 '옛날 그 모습'을 복원해야 한다. '옛날 그 모습'은 18세기를 살았던 임청각의 주인 이종악(1726~1773·석주의 직계 선 조)의 그림에서 확인 가능하다. 그는 이곳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임청각은 산을 등지고 물을 대하고 있다. 평평한 모래밭이 아래로 뻗어 있는데 안개와 노을을 칠해 놓은 듯하고, 수많은 해오라기와 황새가 떼를 지어 노는 것만 보일 뿐이다. 저잣거리가 가까이 있어도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로 말미암아 이곳 산수의 아름다움이 영남에 이름났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5/201708250181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