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10/2017051001186.html
입력 : 2017.06.10 22:07
천체물리학에서 그리스 문명 연구로 전환한 학계가 주목하는 동양인 학자
그리스 문명 연구 분야에서 동양인 학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 문화의 뿌리를 외국인 학자가 연구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캐나다 토론토대에서 그리스 예술 고고학을 강의하는 김승중 교수다.
도올 김용옥 교수의 맏딸로, 천체물리학 박사에서 그리스 문명 연구로 전환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그가 최근 한국인의 시각으로 본 그리스 문명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
김승중 교수를 만난 곳은 토론토대 연구실에서였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논문이 끝나기도 전인 2013년, 캐나다 토론토대로 왔다. 그의 연구를 눈여겨본 대학 측이 적극적으로 영입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로마 개론을 비롯해 영웅과 신들의 이야기, 당대 예술작품, 그리스 여성의 삶 등을 강의한다. 고대 그리스 예술작품 중 도기화는 그가 특히 관심을 갖는 분야다. 장식용, 혹은 일상생활에 쓰였던 도기들에 그려진 그림은 기법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사료다.
“자세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잔치에 참여한 한 손님이 과음해 토하는 장면이 그려진 술병이 있어요. 그런데 당시 포도주가 워낙 걸쭉해 술이 가득 차 있을 때는 그림이 보이지 않아요. 술병이 비워질 즈음에야 이 장면이 나타나는 거죠. 이런 해학적인 그림을 비롯해 당시의 풍습이나 인생관 등을 유추해볼 수 있는 것들이 많아 도기화는 그 자체로 연구 가치가 있어요.”
“가끔 발굴 작업에도 참여한다”는 그는 “무덤에 묻혔던 도기들은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출토돼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얻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나라 유물 발굴을 외국인 학자에게 맡기는 것과 마찬가지인 경우라 현지 연구자들과의 긴밀한 네트워크가 없이는 허가를 받기 어렵다고 한다. 그리스 문명을 연구하는 동양인 학자가 드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만큼 그는 학회에서 매우 이례적인 존재다. 학과 내 동양인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롤 모델이 되었다.
“얼마 전 토론토대에 다니고 있는 한인 2세 학생이 제 방으로 찾아왔어요. 이 분야를 공부하며 동양인 교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신기했는데 한국 사람이라 더 놀랐다고, 저를 보며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중국인 학생들에게도 그런 말을 종종 들어요. 학생들에게 그런 동기부여가 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죠.”
그가 책을 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스 문명 연구가 서양인 연구자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깬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한국인의 관점에서 그리스 문명을 설명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신화와 역사, 고대 그리스인들의 시간개념, 영웅 이야기, 고대 그리스 드라마, 올림픽경기,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탄생과 민주주의 영웅 만들기 등 총 12장으로 구성된 각각의 주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연결해 보다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책의 말미엔 아버지인 김용옥 교수가 그리스 미술사를 시대별로 정리한 ‘희랍을 말하고 오늘을 말한다’는 글이 실려 있다. 또 아버지로서 딸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그는 “원고를 보고 아버지가 정말 좋아하셨다”며, “전공을 바꾼다고 할 때도 한마디 책망도 하지 않으시고,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으면 누구나 전공하는 근현대미술사를 기웃거리지 말고 서구 문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고대미술사를 공부해 보라고 권하셨다”고 한다.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이 연구의 씨앗
서울대 천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에서 천체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석·박사 과정을 하는 동안 공부에만 몰두했던 그는 다른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한동안 학업을 중단하고 프랑스로 떠났다. 그곳에서 박물관, 미술관 등을 다니며 유럽의 멋진 예술작품들에 푹 빠져 살았다.
미국으로 돌아와 다시 전공 관련 연구를 하는 중에도 틈틈이 고대 그리스 미술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학문적 열정이 뜨거웠던 그는 결국 전공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당시 존스홉킨스대에서 박사 후 과정을 하고 있던 터라 1~2년만 더 연구하면 자신의 분야에서 교수 자리를 찾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버지니아대에서 다시 석사 과정부터 시작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많은 발굴 프로젝트에 참여해 고고학의 생생한 현장을 경험하는 행운을 누렸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는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박사 과정을 마쳤다. 그는 “하늘만 쳐다보다 땅을 공부하게 된 셈”이라며 웃었다.
외국어에도 능해 영어는 물론 고대 그리스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중국어와 독일어는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이처럼 남다른 학문적 성취의 비결을 묻자 그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도전하도록 격려해 준 부모님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최영애 전 연세대 중문과 교수다.
“어릴 때 아버지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계셔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미국에서 살았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미국에서 신던 신발을 신고 학교에 갔는데, 남자애들이 여자애가 남색 신발을 신었다며 엄청 놀렸어요. 울면서 집에 들어온 제게 엄마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앞으로는 남자나 여자나 이런 색깔 구분이 없는 시대가 온다. 너는 오히려 앞서간 것’이라며 ‘사회의 틀에 얽매이지 말라’고요. 어린 마음에도 그게 무척 강렬하게 마음에 와 닿았어요. 지금도 제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다른 관점으로 무엇을 본다는 건 연구자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거든요.”
그가 지금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시간개념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했다고 한다. 하나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간, 다른 하나는 주관적이고 철학적인 시간이다. 과학적인 시간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런 인식과 태도가 미술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또 문화 전반에는 어떻게 작용했는지 등을 연구하고 있다. 그 결과물이 곧 영문판 책으로 발간될 예정이다.
스스로 한계를 두지 않고, 학문과 학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 젊은 학자의 도전이 그리스 예술 고고학계에 어떤 족적을 남길지 기대가 크다.
'화제의 이야기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도 한국 방송 리메이크… 新한류 될까 (0) | 2017.06.13 |
---|---|
[Why] 한 지붕 네 목사… 이민자 위로하는 이민자 가족 (0) | 2017.06.11 |
[Why] 교도관 15명, 7개 국어 전공… 끼니마다 한식·양식·이슬람식 나오는 교도소 (0) | 2017.06.11 |
30분 지나면 포기하는데… 77분 집념, 멈춘 심장 깨우다 (0) | 2017.06.09 |
[주간조선] 남대문시장서 막걸리 마시는 수퍼리치들 (0) | 2017.06.04 |